소설리스트

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29화 (29/65)

〈 29화 〉 1.27

* * *

마법사는 수정구를 과시하듯 우리 앞으로 내밀어 보인 후 탁자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놨다.

데굴.

"어."

데구르.

"아."

기우뚱.

"뭐로 받쳐주면 되잖아."

"아아. 그렇네. 히히."

…….

인간이 아닌 지성체에게도 무언가에 대한 첫인상은 중요하다.

한 번 자리가 잡히면 추후에 그 대상을 판단할 때마다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만다.

때문에 저런 덤벙거리는 모습을 보여도 최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

전생의 기억을 뒤져보면 어떤 분야에 깊게 몰두한 사람이 그 외의 분야, 특히 일상 생활을 난잡하게 보내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어쩌면 이 세계의 마법사들이 딱딱한 몸짓에, 말을 아끼며 무게를 잡는 것도 한 꺼풀 벗겨보면 저렇게 나사 빠진 꼴이라서 그러는 걸 지도 모른다.

칠칠치 못 하고 방정맞은 행태와 실력은 반비례한다.

좋다.

내가 자기세뇌를 하는 동안, 소피가 먹던 찻잔을 기대놓고 나서야 수정구는 기울어진 탁자 위에서 굴러다니지 않고 고정됐다.

곳곳에 나있는 흠집에서, 이미 과거에 몇 번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깨지지 않은 걸 보면 생각보다 단단하다.

"자~. 잘 보라구."

마법사가 지팡이를 흔들자 수정구 안에서 일렁이는 무언가가 나타나고, 점점 형태를 갖추며 영상이 재생되었다.

역시 이런 마법도 있는 건가.

영상은 작은 콜로세움 같은 장소를 비춘다.

흙이 깔린 원형 공터와, 공터를 둘러싸고 층층이 올라가는 의자들.

공터 한 가운데 서있는 녹색 마법사.

아마도 그녀다.

거리로 봐선 이 영상이 저 작은 콜로세움의 상당히 위층에 있는 의자에서 촬영됐음을 알 수 있다.

초점이 잠시 마법사에게 줌인 되었다가, 그녀 옆에 놓여진 장대들을 늘어놓은 거치대로 옮겨지고, 정면으로 이동해 허수아비에 맞춰진다.

촬영 목적과 영상의 내용을 알기 쉬운 연출이다.

이 곳에서도 촬영 기법이란 게 연구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곧이어 영상 속의 마법사가 팔뚝 길이의 마법 지팡이……완드를 허공에 휘두르며 손짓을 한다.

마법을 영창하는 건가.

부드럽게 움직이던 완드가 정지하고, 정면을 향한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법사는 완드를 땅에 아무렇게나 버리고, 거치대에서 보다 긴 지팡이를 집어든다.

그녀의 상체 정도 되는 길이의 지팡이.

스태프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영창.

마법사의 몸짓과 지팡이의 궤도를 보면 방금 전과 같은 마법일 가능성이 있다.

다시 지팡이가 정지하고, 정면을 향한다.

지팡이의 끝에서 작은 무언가가 잠깐 일렁이다 사라진다.

다시 버려지는 지팡이.

이번엔 마법사의 신체보다 조금 더 큰 지팡이로 마법을 펼친다.

그녀의 키를 생각하면 지금 지팡이가 보통 인간이 사용하는 크기의 지팡이일 것이다.

자신보다 머리 두세개는 더 큰 지팡이를 열심히 휘두르며 완성한 마법은, 화염구를 생성한 후 전방의 허수아비를 통해 날아가서 착탄한다.

폭발.

줌 인.

화염이 걷힌 화면에 멀쩡한 허수아비가 비춰진다.

저 허수아비도 방어 마법같은 게 걸린 마도구인가보다.

마지막으로 꺼내든 지팡이는 마법사 키의 두 배가 넘는 장대였다.

거치대가 아니라 땅에 그냥 놓여져있길래 영상의 내용과는 상관 없는 자재인 줄로만 알았다.

저런 지팡이도 있었군.

마법사는 장대를 낑낑 거리며 세운 후 양손으로 힘껏 휘두른다.

장대가 휘청이자 그녀의 몸이 딸려가며 넘어질 뻔 하지만, 가까스로 자세를 잡는다.

다시 한 번, 휘청.

또 한 번, 휘청.

저런 식으로도 영창이 되기는 되는지, 지금까지의 4배는 되는 시간이 흐른 뒤에 마법이 완성되었다.

"오."

지겨운 영창 과정에 따분해하던 소피의 눈이 조금 커진다.

허수아비 주변으로 흙먼지가 조금 일어나더니, 그것이 점점 커지고 빨라지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났다.

회오리인가.

자연 상태라면 저 정도 회오리 바람은 크게 위협이랄 것 까진 없다.

물론 휘말리면 위험하겠지만, 성인 인간을 집어삼켜서 공중으로 띄워올릴 정도의 힘은 없다.

흙먼지에 눈이 따갑고, 돌덩이 같은 것에 맞을 수 있는 정도.

하지만 마법이라면 다르다.

이 세계의 마법은 마법사의 상상과 열망의 실체다.

마법사가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회오리 바람을 상상하고 마법을 영창하면, 그렇게 된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마나와 마법사들의 그릇을 가르는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 듯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자세하고 체계적인 이론은 몰라도, 어깨 너머로 마법을 배워 내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 투영 마법과 사출 마법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내 생각이 틀리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저 회오리 역시 무시할 것이 못 된다고 예측할 수 있다.

화염구의 폭발에도 멀쩡했던 허수아비를 뽑아버릴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고 있다.

사람이 휘말리면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솟는 게 아닐까.

재수가 없으면 1m 높이에서 떨어져도 죽는 게 사람이다.

사람이 밀집된 전장에서 사용하면 그 살상력과 장악력은 화염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회오리가 지속되는 가운데, 마법사는 거치대를 붙잡고 방방 뛰기 시작한다.

처음엔 시연이 끝났으니 공터를 정리하기 위해 거치대를 옮기기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으나, 거치대의 한쪽을 잡았다가 반대쪽을 잡았다가 위로 들어올리는 척 하다가 몸을 기대기도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깨닫는다.

그녀는 지금 영창을 하고 있다.

영상에 기록된 마지막 마법.

어떤 마법인진 모르겠다.

그저, 완성되자 수정구 속 영상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진인가?

그렇다기엔 거치대 자체는 흔들리거나 엎어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것은 수정구와 바닥에 버려진 지팡이 뿐.

영상에 거대한 손가락이 나타난다.

아마도 촬영자의 손가락이다.

흔들리는 수정구를 꼭 부여잡는 움직임으로 보이는데, 딱히 진동이 사그라들진 않는다.

그렇게 흔들리던 와중에, 땅에 버려져있던 지팡이가 거치대로 빨려들어가듯 달라붙더니, 급작스럽게 화면 속 거치대가 확대─.

"이게 끝이야?"

"아, 안 놀라네?"

"사실 마법은 잘 모르겠어서……."

"아, 그게 아니구. 보통은 마지막에 자기가 거치대랑 부딪치는 줄 알고 놀라서 탁자를 걷어 찬단 말이야."

마법사는 주섬주섬 수정구를 다시 챙기며 말했다.

너무 몰입해서 보면 그럴 수 있겠군.

하루 종일 TV를 보는 전생의 인간들도 그런 모습을 종종 보이는데, 영상을 쉽게 접하지 못 하는 이세계에선 말할 것도 없겠지.

마법사가 영상이 끝날 쯤부터 자세를 낮추고 무언가를 대비하기에 나 역시 그녀를 경계했지만, 아마도 소피가 놀라 수정구가 탁자에서 떨어지게 되면 붙잡기 위한 준비였나보다.

사실 그렇게 떨어지기 전에 잡을 생각을 하는 것 보단 전용 받침대 같은 걸 만들어서 안 떨어지게 하는 게 더 나아보이지만…….

어쨌든, 소피는 내 동체를 조종하며 자신과 동체를 분리하는 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수정구 속 영상에 휘둘리지 않은 것 같다.

장하고 기특하다.

"지금 보여준 마법은 내가 재현시킨 고대 마법이야."

"불을 쏘고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거?"

"음, 조금 달라."

마법사는 가방을 여민 후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첫 번째. 발현되는 마법은 매개체에 따라서 달라져."

"메게채?가 뭔데?"

"매개체. 화염구 연습용 지팡이로 사용하면 화염구가 나가고, 북부의 참부릅나무로 만든 깃대로 사용하면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고, 요정이 선물한 거치대로 사용하면 주변의 물건을 끌어들여서 정리해."

"거치대는 뭐로 만들었는데?"

"아무도 몰라! 120년 전에 받았다는데 요정이 봐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구. 인간 목수는 요정이 사는 숲에 있는 나무 종류를 모르고. 그리고 나무를 여러 종류 섞어서 만들었대."

마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젔더니 두 번째 손가락을 편다.

"그리고 두 번째! 발현되는 마법은 매개체가 크고 오래 될 수록 강력해져."

"……오?"

"사실 화염구같은 건 내가 직접 쓰면 고대 마법으로 쓰는 것 보다 훨씬 센 게 나간단 말이야. 그런데 회오리 마법은 내가 쓸 때보다 더 강한 게 나갔구. 물건을 정리하는 마법은 남이 들고 있는 것까지 뺏어오는 효과는 없어."

"그럼 그 마법을 베르제스한테 쓰면……어떻게 되는데?"

"그걸 이제 알아보자구!"

마법사가 활짝 웃으며 팔을 치켜든다.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이건가.

고대의 마법…….

확실히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이전 전투 때 본 게 다지만, 현대의 마법은 고대의 마법과 무언가 결이 다르다.

과거 전쟁중에 내가 봤던 마법은 거대한 마법진위에 갖가지 재료, 혹은 제물과 촉매를 들이부어서 행해졌던 일종의 의식이었다.

마법사도 많이 투입됐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고.

이제 와서 생각해도 산 너머에서 날아온 포격 지원은 마법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전생의 박격포병에게 똑같은 걸 시켜도 초탄부터 정확한 위치에 화력을 집중시키는 기예는 흉내도 못 낼 것이다.

아마도 마법사들이 날린 마력 덩어리에 '눈'이 달려있어서 착탄 지점을 예상하며 실시간으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었겠지.

즉발적으로 마법을 발동시키는 마도구도 존재하긴 했지만, 종류가 많지는 않았고 사용자도 마법사로 한정됐다.

지금처럼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가 널리 보급돼있었으면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이 갑옷을 입고 벗을 때마다 죽을 상을 짓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현대의 마법은 조금 더 스마트하고 콤팩트한 느낌이다.

불이 쉽게 붙는 부싯돌은 물론이고, 얼마 전에 소피의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던 경량화 마법이 부여된 전신 갑옷은 일반인이 사용해도 마법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영창 역시 빨랐다.

과거 전쟁중엔 내 흙탄두를 막았던 흙벽처럼 즉발적으로 발동되는 마법이 없었다.

수정구로 봤던 고대 마법의 영창 과정도, 사실 현대 마법의 영창 과정에 가까웠다.

아마 복원 과정에서 현대적 해석이 상당 부분 들어간 거겠지.

어쩔 수 없다.

복원된 문화재가 과거의 기록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아니면 그녀가 말하는 '고대'가 내가 생각하는 옛날 만큼 오래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찌 됐든, 6급 모험가가 된 소피가 새로운 상대와 맞서기 전에 전력 증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에 잘 된 것 같다.

내게 어울리는 건 디테일과 편의성을 살린 현대 마법이 아니라 연비를 무시하고 화력을 때려박는 고대 마법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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