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1.30
* * *
"정."
파일 벙커.
"깡깡이."
파일 벙커.
"익스트림 스팅어."
파일 벙커.
"거대 강철 정."
파일 벙커……!
"공포의 가시 말뚝?"
파일 벙커!!
"파워 워드 페네트레이트"
분노.
알고 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파일 벙커라는 건 애초에 억지로 적당한 단어를 이어 붙힌 명칭이고, 이세계에서까지 그런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올 가능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파일 벙커가 어떤 무장인지 어떻게든 설명하고, 그리고 그걸 실제로 만들어서, 테스트까지 성공했으니 이미 내가 원하던 목적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왜 안 된다는 거냐! 멋진 단어가 세 개나 들어갔는데!!"
"베르제스가 따로 생각한 이름이 있나 봐요……."
"그래서 그게 거대 강철 정보다 멋있다고!!"
"파워 워드가 붙은 이름이면 말도 안 되는 극찬이라구!"
하지만 역시 이세계는 이세계.
이들의 작명법과 내 전생의 기억으로 남은 작명법은 감성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파일 벙커는 내 욕심이라고 해도, 적어도 아머 브레이커나 완부착암기같은 이름이 나올 줄 알았건만.
"까…, 깡깡이 별로니?"
"소피. 아까도 말했지만 쓸 때마다 이름을 외치려고 이름을 붙이는 거라구. 말뚝질 할 때마다 깡깡이! 깡깡이! 할 수 있겠어?"
"그렇지! 적어도 거대……."
"'그드 긍츨 증~' 할 수 있겠냐구."
"뭐라고? 이 반푼이가!"
"난쟁이가 누구더러 반푼이래!"
모든 게 잘 굴러가고 있었을 때.
발단은 리소테의 참견이었다.
이 무장에 이름은 있느냐.
이름은 중요하다.
내가 보아하니 동체가 탄환을 발사하고 파일벙커를 격발할 수 있는 이유는 일종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계는 다르지만 결국은 마법이다.
그리고 마법에서 이름은 중요하다.
이름이 정해지면 마법의 성격이 더욱 명확해지고, 사용할 때마다 힘차게 외치면 효과가 커진다.
구구절절히 맞는 말이었고,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마법을 사용하며 시동어를 외치는 것은 전투 중에 기합을 넣거나 함성을 지르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한다.
파고들자면 거기에도 어떠한 규칙이 있고, 영창 중의 높낮이와 악센트, 손짓발짓에도 의미와 기능이 각각 정해져 있지만 마법사가 아닌 수준에선 시동어를 힘차게 외치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는 것.
솔직히 말해서 리소테가 말하는 시동어의 기능이 내가 독자적으로 구축한 마법체계에도 적용이 될지 모르겠다.
아니, 체계랄 것도 없다.
내가 대충 만들어낸 마법은 민간 신앙, 혹은 미신 수준의 신비일 뿐이다.
어째선지 제대로 동작하고 있어서 '어, 이게 되네?' 하는 데서 탐구를 멈추고 그냥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하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든 없든, 무장의 이름을 붙히는 데엔 찬성이다.
소피가 배에서부터 끌어올린 기합과 함께 무장명을 외친다면 내가 그만큼 힘을 낼 수 있다.
파일럿의 혼을 담은 외침.
노력과 근성.
귀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고양될 수밖에 없다.
만일 마법의 효율이 올라가지 않는다면, 평소 출력을 일부러 낮춰 소피가 무장명을 외치게 유도하고 싶을 정도다.
그렇게 시작된 이름 짓기.
설마 난쟁이 집단과 소피에게 파일 벙커의 개념과 컨셉을 설명할 때보다 애를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적어도 그땐 소피의 몸을 움직이며 시연이라도 할 수 있었지.
지금은 그런 편법도 통하지 않는다.
파일 벙커라는 명칭을 무슨 제스쳐로 표현할 것인가.
이럴 때마다 동체에 몰래 만들어놓고 테스트 중인 외부 스피커를 이용해 직접 말을 할까 고민되기도 하지만, 애써 참는다.
스피커나 문자 등을 통해 내 의사를 직접 표현하는 건 내가 정해둔 어떠한 '선'을 넘는 행위다.
개량 슬라임으로서의 선.
이세계 유일 메카로서의 선.
전생에 인간이었던 자의 선.
나 같은 존재가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지적 생명체와 체계화된 언어로 소통해선 안 된다.
옳게 된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추정 수 천 년 동안 묵언수행을 이어왔던 내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추한 꼴을 보이게 될지 나 스스로도 짐작이 가질 않는다.
이 세계에서도 베테랑이나 난쟁이를 보면 나이 좀 먹었다 싶은 사람이, 소위 '꼰대' 짓을 하고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고깝게 여기는 풍조가 있다.
수 천 년 묵은 꼰대.
심지어 전생에서 얻은 이세계의 지식과 고대의 전쟁, 즉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정신이상자.
내가 직접적인 언어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내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자네들, 이런 곳에 있었나?"
"아, 집사님."
머리채를 부여잡고 아둥바둥 몸싸움을 벌이는 난쟁이와 리소테를 애써 외면하며 영주의 집사가 소피에게 말을 건다.
다른 인부들도 굳이 개입하지 않는 걸 보면 난쟁이와 소인족 사이에 오랫동안 쌓이고 묵힌 종족감정이 있나 보다.
"자네는 모험가를 하면서 어떻게 길드 사무소에 한 번을 안 들를 수가 있나? 자고로 근면성실한 모험가라 하면 매일 아침 사무소에 얼굴도 좀 내밀고 의뢰도 훑어보면서……."
"아, 네. 그런데 집사님.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나요? 보시다시피 저희가 지금 느긋하게 집사님 대접해드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라서."
"……크흠. 저번 일이 있었으니 이번엔 넘어가겠네. 영주님의 소집일세. 길드에 말해놓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고 말이야. 꼭 이 늙은이가 여기까지 노구를 이끌고 오게 했어야 했나? 자네도 자네지만 길드 사무소도……."
집사가 내민 두루마리는 나름 무언가 문장을 찍어서 약식 밀랍 봉인까지 한 서류였다.
문장을 찍을 때 얼마나 대충 찍었는지 두루마리가 다 구겨져 있긴 하지만, 모험가 나부랭이한테 영주 쪽에서 다이렉트로 이런 서류를 보내는 데 엄청난 격식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저번 전쟁에 참여할 땐 집사에게 구두로 통보 받고 바로 영주성으로 끌려가 기사에게 작전 개요를 들었으니, 취급이 훨씬 나아진 셈이다.
소피는 말로만 듣던 밀랍 봉인을 처음 보는 건지 신기한 눈치로 살펴보다, 봉인을 뜯는 도중에 서류 끄트머리를 조금 찢었다.
쉴 새 없이 떠들던 집사의 눈초리가 까딱 올라갔고, 소피는 '헤헤' 하는 웃음을 흘린다.
나의 친애하는 영지민이자, 용맹한 6급 모험가인 소피 양에게.
200년 전 우리 가문이 선대 왕에게 백작위를 하사받음과 동시에…….
아니, 영주라는 양반은 평민 모험가한테 소집을 통보하면서도 무슨 영지 역사부터 미사여구에 안부 인사까지 넣는 거지?
밀랍 봉인과 서류 관리는 개판으로 해놓은 데 반해 과하게 귀족적인 소집 명령서다.
어쩌면 영주는 서류작성까지만 하고 그 뒤의 절차는 집사가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뭐야뭐야?"
"아, 리소테. 소집이야. 너도 읽어볼래?"
깨알같은 글자에 눈살을 찌푸리던 소피가 명령서를 리소테에게 홀랑 넘긴다.
분명 가정교사의 교습은 소피도 같이 받았을 텐데…….
물론 이 세계엔 문맹이 많은 편이고 소피 정도면 까막눈은 벗어났으니 평균 이상이라 할 수 있다.
파일럿에게 너무 높은 기준을 들이대는 것도 내 욕심이겠지.
"무스파날라 거북 토벌? 아, 이게 올해구나."
"그게 뭔데? 세상을 지고 다니는 거북은 아니지?"
"그거 맞아. 아직 어린 편이지만."
……뭐?
"동화 속 이야기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세상은 거대한 무스파날라 거북이 지고 있어. 아카데미에서는 상식으로 가르치고 있다구. 마법을 배울 때에도 처음에 가르치고. 세상을 지고 있는 '최초의 거북'은 몇 억살은 먹은 놈이라니까 아직 바다에 살고 있는 거북이랑은 비교도 안 되지만, 그 거북들도 나이를 먹으면 한계 없이 계속 커지니까 50년 주기로 너무 커진 놈들을 사냥한다고 들었어."
"자네가 파티로 등록된 마법사인가? 마법사 아가씨는 좀 알고 있구만. 왕국 서부에 있는 영지는 모두 참가하는 토벌일세. 영주님께서 자네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크니, 영광으로 알도록 하게."
집사는 거부 따위는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다는 듯이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물론 영주가 친필 서류까지 작성해서 소집하는데 그걸 거부하는 간 큰 모험가는 없겠지만…….
기억을 떠올려 보면 고대의 전쟁에서 거북이같은 몬스터와 싸운 전적은 몇 번 있었다.
크기는 제각각이었지만, 제일 거대한 놈은 드래곤이 직접 쥐고 날아와서 전장에 투하한 놈이다.
개량 슬라임도 '기절'이란 걸 할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직접 깔리지도 않았는데 충격파 만으로 사용하던 동체에 대한 제어권을 단박에 잃어버리고 잠시동안 움직이지 못 했지.
심지어 놈은 그 끔찍한 거구를 가지고 수십 미터 상공에서 투하당했으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행동을 개시하는 터프함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놈이 전투에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어딘가로 무심히 떠나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살고 있던 곳으로 돌아간 거겠지.
드래곤도 떠나가는 놈을 굳이 붙잡아서 재투하하진 않았다.
만약 그 거북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거나, 드래곤이 두 번째 투하를 시도했다면 개량 슬라임 중에서 사상자가 나온 최초의 전투가 됐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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