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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33화 (33/65)

〈 33화 〉 1.31

* * *

그런 거북이 몬스터가 수 억 살을 먹으면 세상을 짊어지게 되는 건가.

물론 전생의 지동설과 천동설같은 이야기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지동설이 상식이 되기 전의 세상은 천동설을 굳게 믿고, 그에 대한 증거를 몇 개쯤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도 마법과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면 세상은 거북이 따위가 짊어진 게 아니라 평범한 구체 행성이라는 게 밝혀질 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상식'을 설명하는 리소테의 태도가 너무 굳건해서, '이세계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납득하고 만다.

사실 별로 관심 없는 화두기도 하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거북이가 지고 있다면, 우주는?

이곳은 열권까지 뚫고 나가도 별의 바다가 펼쳐지지 않는 것인가?

외우주에서 온 침략자도, 은하 간 전쟁을 피해 불시착한 외계 문명도 없는 것인가?

그런 건 꿈과 로망이 없다.

거대 거북 토벌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출발했다.

예정은 이동에만 왕복 두 달에, 토벌 기간이 더해지는 형태다.

내가 전력으로 달리면 그 절반도 걸리지 않을 거리지만, 인솔자로 붙여진 영주의 큰 아들이 마차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지루해."

"어쩔 수 없잖아. 50년에 한 번 있는 이벤트라구. 한 번 참여하면 평생동안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을 거야!"

마차의 속도는 끔찍하게 느리다.

두 마리의 말이 박자를 맞춰서 끌고 있으니 전력 질주 같은 건 처음부터 논외였다.

물론 긴급한 상황엔 어쩔 수 없이 하겠지만, 말 한 마리가 기수를 태우고 달리는 만큼의 속력은 기대할 수도 없는 건 당연하고, 마부와 마차의 탑승자는 마차가 박살나거나 뒤집어지지 않길 하늘에 기도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마차를 끄는 말은 기본적으로 걷는다.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조금 더 빠를까.

체력이 있는 만큼 부지런히 걸으니 사람보다는 확실히 빠를 것이다.

하지만 느리다.

이미 내 동체의 속도에 익숙해진 일행에겐 끔찍하게 느리다.

심지어 커다란 발소리에 겁이 많은 말들이 놀라기 때문에 거리를 충분히 두고 따라가야 한다.

한 걸음, 쿵 내딛고

기다렸다가

다시 한 걸음, 쿵.

그걸 식사 시간, 혹은 야영 시간이 올 때까지 하루 종일 반복해야만 한다.

'소피가 걱정이군.'

개량 슬라임인 나야 금세 익숙해졌다.

내 동체로 부지런히 걸을 때야 달랐지만, 지금처럼 느릿느릿 한 걸음 씩 내딛는 동작을 몇 번 반복하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꾸물거릴 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적당한 진동이 주기적으로 가해지면 인간이 쉽게 잠에 빠지듯이, 비슷한 동작을 천천히 반복하니 어떠한 편안함조차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소피는 다르다.

크게 변함이 없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적당히 때가 되면 거리를 봐가며 한 걸음 씩 내딛어야 하는 동시에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영주의 큰아들을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은 소피다.

교대 인원이 없는 경계 작전 풀 근무.

다행히 부사수로 리소테가 붙어있긴 하지만, 아무리 젊은 여자들이라도 수다를 떠는 데엔 한계가 있는 법이다.

3일 째 오후에 들어서자 소피는 마침내 내게 스스로 움직여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거절했다.

소피가 딱하긴 하지만, 이 지옥의 행군을 견뎌내면 그녀는 한층 더 강력한 파일럿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편도 한 달의 행군.

중간중간에 들리는 마을에서 물자를 보급받으며 하루 이틀 정도 쉴 수도 있고, 옆에는 비슷한 또래의 동료가 있으며, 호위 대상임과 동시에 감시자 역할을 하는 영주의 아들과 함께 하는 여정.

지금처럼 비교적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장기간 기동을 유지하며 끈기와 정신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물론 식사 시간이 올 때마다 폭식을 하는 소피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는 건 사실이다.

명백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막대한 양의 음식을 위장으로 쓸어넣고 있다.

끊임없이 들어가는 음식들을 보며 영주 아들의 일행이 질린 듯한 표정을 짓는데, 평소라면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먹을 법도 했지만 소피는 전혀 사양하지 않고 식사를 지속한다.

옆에서 숨을 삼키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리소테의 태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리소테의 반응은 기동 중에 졸음 껌을 씹듯이 육포를 입에서 떼지 않는 걸 봤기 때문인 듯했다.

뭐가 됐든 소피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실제로 소피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감에 따라 마나 소모도 점점 커지니 몸이 더 많은 영양을 원한다는 신호를 보낼 법도 했다.

"무스파날라 거북의 토벌은 주인공이 정해져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절차와 사냥법이 정착돼서 모두들 토벌이 아니라 조금 요란한 사냥 대회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 우리의 역할은 기껏해야 사냥에 외부 요인이 끼어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수준일 거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아버지께서 너만 징집하신 것도 너와 네 골렘이 어지간한 용병단 보다 강한 전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주변 영지에서 네 골렘을 보고 싶다고 은근히 보채는 요청이 많은 게 더 컸다."

영주의 아들은 이미 용모도, 태도도 이미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아들이 저 정도라면 영주 본인은 집사와 비슷한 나이일 것이다.

조만간 영지 운영을 물려받게 되지 않을까.

이번 토벌의 인솔자로 참가한 것도 서부 영지의 관계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니,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 온 느낌이었다.

그가 소피에게 보내는 눈빛에는 생각보다 깊은 신뢰감이 담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활동한 지 반년 된 신출내기 모험가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성벽에 세워둔 내 동체도 눈에 익었을 것이고, 모험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최근의 전적까지 알게모르게, 혹은 자세하게 보고를 받았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구나 내 전투력을 세세하게 분석한 정보력을 타 영지만 가지고 있을 리는 없으니, 자신의 영지민인 소피에 대해선 집안 내력이나 성장 과정, 성격과 기호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저 남자는 내 동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소피는 반쯤 정신이 나가 걷고 있기에 모르는 것 같지만 영주의 아들은 이동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내 동체가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는 데 소비하고 있었다.

잊을 만 하면 마차 뒤쪽에 뚫린 블라인드 사이로 시선이 느껴진다.

메카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

영주의 아들은 믿을 만 한 사내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행군이 이어지고, 리소테와 소피 사이의 대화가 점점 형태를 잃고 짐승에 가까운 소리를 내다 몇 번 꺄르르 웃고 난 뒤 이윽고 그것마저 질려버리고, 리소테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하다가 쇼를 목적으로 한 마술 같은 마법을 보여주며 시간을 떼우고, 지루함에 지친 소피가 영주 아들이고 뭐고 사출 마법을 아무 데나 갈기며 평야를 질주할 것처럼 몸에 마나를 돌리기 시작했을 때.

한 무리의 군대가 나타났다.

멀찍이서 보였을 때 분주하게 움직이며 진형을 갖추다가 조금 더 다가가서 내 어깨부위에 고정시킨 영지의 깃발을 식별한 뒤 경계 태세를 늦추는 것을 보면 토벌에 참가하는 다른 영지군인 듯했다.

군대에서 말을 탄 기사 두 명이 천천히 다가왔고, 영주의 아들은 적당한 지점에서 마차에서 내려 두 팔을 벌리며 인사를 건넸다.

얼굴을 알아보고 웃는다.

안면이 있는 사이인가 보다.

기사들은 투구를 벗고 영주의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 내 동체를 한 번 구경하고, 조금 오래 구경하고, 손가락을 뻗어 평야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들의 손가락을 따라간 지점엔 어떤 덩어리가 있었다.

투영 마법의 줌을 땡겨봐도 털로 몸이 덮힌 갈색 무언가로 보일 뿐, 제대로 식별이 되지 않는다.

주변엔 비슷한 색의 덩어리들도 몇 개 보인다.

이 정도 거리에서 덩어리로 보일 정도면 저쪽도 한 덩치 하는 모양이군.

반 쯤 정신이 나가서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던 소피가 덩어리를 보며 점점 생기를 띤다.

전생에 재미나게 읽은 소설에선 '기분 전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

기분 전환의 기색을 느낀 소피가 기대감을 품으며 자세를 바로 잡는다.

"리소테. 저거 봐, 저거."

"스으……."

"봐봐. 저기 뭐 있나 봐."

"으, 응? 응? 어? 뭐야? 벌써 밥이야?"

시뻘게진 눈을 비비며 일어나 급하게 침을 닦는 리소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점점 입꼬리를 올리는 소피.

침체돼 있던 콕피트 안에 조금씩 활기가 돈다.

이야기를 마친 영주의 아들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소피의 심장이 점점 강하게 뛴다.

소피와 리소테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콕피트를 최대한 느리게 개방한다.

"루드보어 무리가 산에서 내려……."

"네! 할 수 있어요!"

차라리 콕피트를 열지 말 걸 그랬나.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몸을 앞으로 내민 소피와, 얼굴이 땡땡 부어서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리소테.

모처럼 높았던 영주 아들의 신뢰도가 조금 깎여나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주의 아들은 웃는다.

우스운 것을 보고 웃는 것이 아닌, 만족스러움을 내포한 미소.

"그럼 부탁하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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