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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35화 (35/65)

〈 35화 〉 1.33

* * *

한 마리, 두 마리, 그리고 세 마리.

소피는 도망치면 마지막 새끼 돼지가 다리를 잃고 쓰러져 버둥거리는 꼴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방금 받은 충격을 보여주듯, 분리된 어깨죽지 부근이 깨지고 금이 가있다.

지금 당장은 겉으로 보기에 그렇지만 적당히 흙과 돌을 긁어모아 떼우면 돌아갈 것이다.

"뀌이! 뀌익! 뀍!"

천천히 걸어가 확인 사살을 한 후, 퍼지한 우완을 회수.

파일 벙커에 뇌를 관통당한 멧돼지의 시체 뒤엔 불도저가 지나간 것처럼 땅을 갈아엎은 흔적이 길게 나있다.

고대하던 파일 벙커의 첫 실전 치곤 손맛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팔뚝 부분까지 파고 든 오른팔을 보니 오히려 안심이 된다.

아무리 멧돼지의 뼈와 가죽이 단단하지 않은 편이라곤 해도, 기본적으로 저 거대한 몸뚱아리를 지탱할 힘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처참하게 뚫릴 만큼 강한 충돌이 일어났다면, 손맛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다.

파츠가 퍼지된 상태로도 피해를 입힐 정도의 위력을 보여준 사출 마법에 감사하자.

"으……. 느낌이 이상해."

소피는 멧돼지의 머리에서 돋아난 뿔처럼 보이는 우완부를 잡아 당기지만, 사체에서 뽑아내는 데 실패한다.

결국 우선 어깨를 갖다대서 다시 장악을 마친 후, 오른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허리를 회전시키는 힘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팔이 뽑혀져 나온다.

동시에 터져나오는 끈적끈적한 고깃덩이와 피가 동체에 튄다.

이것도 나중에 동체 겉면을 갈아내서 지워야겠다.

동체를 석재로 바꾸고 나서부터 알게 된 건데, 석재 동체는 의외로 소모성이 강하다.

부서진 동체를 흙과 자갈로 덮어서 때울 순 있어도 통짜 암석만큼 견고하진 않았고, 피가 튀면 그걸 지워낼 약품이나 재도장 할 수 있는 도료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얼룩이 지는 꼴을 보기 싫으면 그 부분을 갈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반년간 트롤을 사냥하면서 가장 많이 갈아낸 손목 부분은 이미 초기 암석이 7할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파츠의 윤곽선이 눈에 띄게 변한 것을 눈치채고 난 뒤에야 동체 전체를 얅은 흙으로 도포해서 얼룩으로부터 보호했지만, 싸우다 보면 그런 코팅은 금세 벗겨지기 마련이었다.

언제 날을 잡아서 채석장에서 새로운 동체를 만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난 속이 이상해……."

동체가 충격을 받아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후부터 정신이 반쯤 나가있던 리소테가 이제야 겨우 죽는소리를 낸다.

집락촌민 일행은 내 어깨 위에도 타보고, 이런저런 전투를 겪으면서 동체에 전해지는 충격에 익숙해질 시간이 충분했기에 트롤과 싸울 때에도 그럭저럭 버텼지만 리소테는 이번이 첫 실전이었다.

애초에 집락촌민들은 모두 육체파였고, 리소테는 소인족 특유의 신체비율 덕분에 다부져보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6급부터 시작한 낙하산 모험가라는 차이도 있었다.

이번엔 전력으로 달리는 도중에 영창을 해낸 것 만으로 만족해야겠지.

어떤 면에선 달리는 말 위에서 마법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수당은 따로 나오는 건가요."

"고생했다. 내가 따로 말해서 챙겨주도록 하지."

전투 시간은 이동을 포함해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영주의 아들은 돈 이야기부터 꺼내는 소피에게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보어는 퇴치했지만 부대는 행군을 재개하지 않았다.

소피와 리소테는 뭔가 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기다렸는데, 이번엔 말을 탄 병사가 다가와 멧돼지의 머리에 구멍을 추가로 뚫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정확히는, 피를 빼달라고 했다.

행군은 집어치우고 멧돼지를 해체하려는 생각인 듯했다.

아직 식사 시간은 조금 남았지만 저 거대한 몸집을 도축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았다.

저 멀리서 활기차게 웃고 있는 영주 아들과 기사들은 이미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출발을 한 것인지, 토벌에 늦을까봐 걱정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소피는 내 동체를 루드보어의 사체로 끌고가서 아직도 피와 뇌수를 질질 흘리고 있는 머리에 팔을 갖다댔다가, 생각을 바꿨는지 목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고 보니 '돼지 멱 따는 소리'라는 말이 있었다.

피를 빼려면 목을 베어야 한다.

"리소테. 마법으로 어떻게 안 돼?"

"윈드 커터라는 마법은 있어두, 이건 너무 커서 안 돼."

리소테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약간의 슬픔이 느껴졌지만, 적어도 도축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 아닌 듯하다.

거대 거북 토벌이라고 듣고 왔는데, 아주 별에 별 걸 다 한다는 감상을 갖게 된 걸지도 모른다.

소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돼지 목에 손을 대고 자세를 잡았다.

파일 벙커다.

새로운 무장이 영업을 개시하자마자 돼지 도축에 쓰이는 건가.

이건 확실히 허탈감이 밀려온다.

소피는 내가 내뿜는 감정을 헛기침과 함께 애써 무시하고, 사출 마법을 사용했다.

"까, 깡깡이!"

푸슉.

…….

지금 소피가 뭐라고……?

"공포의 가시 말뚝!"

푸슉.

리소테까지 입을 쩍 벌리고 소피를 쳐다본다.

소피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건…….

아니, 실험과 검증은 하는 게 좋지만…….

"여, 역시 조금 이상하네. 그렇지? 하하, 하."

말에는 힘이 있고 이름은 중요하다는 리소테의 말을 옳았다.

발포 마법을 사용할 때 소피가 무장명을 외치자, 어딘가 힘이 탁 풀리고 맥이 빠졌다.

마법이 발현되는 감각 역시 그랬다.

영지에서 파일 벙커를 시운전 했을 때와 방금 전 실전에서 사용했을 때.

완부 파츠 내부에서 마나를 장약 삼아 폭발하듯 사출되며, 실제 감각을 뛰어넘어 달려있지도 않은 팔 전체가 저릿해지는 착각이 드는 반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관에 불이 붙고 격발되는 느낌이라기 보단, 뭐랄까.

공압 실린더같은……?

물론 공압 실린더도 강한 놈은 강하긴 해도…….

리소테는 한 박자 늦게 배꼽을 잡으며 웃었고, 자신이 떠올렸던 이름도 시험해 보게 했다.

익스트림 스팅어에서는 조금 느낌이 왔지만 실질적으로 의미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 외에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을 모두 실험해 봐도 대부분이 아무 말 없이 사출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위력이 떨어졌다.

파일 벙커의 이름 짓기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지만, 소피와 리소테 안에서 우선순위가 높아졌으니 오늘 했던 작업이 아주 헛수고는 아니게 됐다.

루드보어의 목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구멍을 뚫어 피를 뺀 후에, 피웅덩이를 피해 사체를 질질질 끌고간 곳에서 본격적인 해체 작업이 시작됐다.

역시나 루드보어의 가죽은 충분히 질기지 않았다.

군인 중 복장이 다른 몇몇 인원이 멧돼지의 몸체에 올라가, 소지하고 있던 거검으로 체중을 실어 찍어내리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가죽이 그대로 뚫렸다.

그 뒤엔 검의 가드 부분을 붙잡고 깡총깡총 뛰며 검을 더 깊이 박아, 완전히 구멍이 뚫리자 조금 옆으로 이동해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얼마 뒤엔 전생에 보았던 '절취선' 같은 홈이 여러 개 나게 되었다.

작업하던 인원이 모두 내려간 뒤에 신호에 따라 가죽을 붙잡고 양쪽으로 힘을 주자 투두둑 소리와 함께 뜯어진다.

그 뒤엔 다시 거검병의 도움을 받아 가죽을 조금씩 추가로 찢으며 옷을 벗겨내듯 가죽을 벗겨냈다.

가죽을 절반 정도 벗겨내자 부대는 살덩이를 조금씩 떼내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완전히 도축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덩치 만큼 지방층도 두꺼웠기 때문에 도끼창병들이 반쯤 벌거벗은 채로 모두 달라붙어 한참을 도끼질을 한 후에야 빨간 살덩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들도 뭔가 추가 수당을 받게 되는 걸까.

몸과 옷, 병장기가 아주 기름 범벅이 되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도끼창의 기름을 닦아내고 날과 손잡이 부분을 살리려면 고생 깨나 할 것 같다.

리소테는 부대에 있던 마법사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더니 함께 식사를 하러 가버렸고, 소피는 영주 아들에게 이끌려 크기가 가장 큰 간이 막사에서 밥을 먹게 됐다.

막사 안엔 기사 두 명과 몇 명의 인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피가 들어가자, '역전의 용사'니 '떠오르는 신성'이니 하는 소리와 함께 박수를 받게 됐다.

조금 놀란 그녀가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였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천막 안의 인원들은 이 부대의 장교와 고위 부사관 쯤 되는 위치인 듯했다.

서로 이런저런 소개가 이어졌는데, 영주나 예비 영주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기사 중 젊은 쪽이 무슨무슨 가문의 누구라고 하는 걸 보면, 귀족 출신은 맞는 것 같았다.

적당히 꼬치에 꽂혀서 구워진 고기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기대를 한껏 품고 한 입씩 베어 물었지만,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야생 동물은 근육질이기 때문에 살덩이가 부드럽지 못 하고, 특히 육식성이나 잡식성 동물은 누린내가 심하다.

물론 멧돼지는 비교적 흔한 동물이기에 어느 정도 감안을 했을 것이고, 고기에는 향신료도 확실히 뿌려져 있었지만 그래도 거대한 멧돼지에게선 거대한 누린내가 났나보다.

소피마저도 몇 꼬치를 먹다가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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