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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36화 (36/65)

〈 36화 〉 1.34

* * *

먹다 남은 멧돼지 구이는 얼마 뒤에 치워졌고, 하인 복장을 입은 자들이 차를 내왔다.

이 세계의 상류층은 행군 중에도 차를 마실 정도로 차를 좋아하거나, 혹은 차가 별로 비싸지 않은 가격에 유통되고 있는듯 했다.

그러고보니 드워프 집단의 사무소에서도 무언가를 끓인 물은 자주 보였다.

소피는 차의 향기를 잠깐 맡고 호록 마셔본 뒤 별 말 없이 내려놨다.

나와 소피에게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 많았다.

상석 쪽에 앉은 영주 아들과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했고, 무언가 벽이 쳐진 것 처럼 천막의 입구와 가까운 쪽에 앉은 지휘관들은 소피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소피의 집락촌은 고블린과 야생 동물을 잡아 밥을 벌어먹고 사는 일종의 사냥꾼 집단이었다.

물론 그것 만으로 여러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살며 입에 풀칠을 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에 도시에 집을 마련할 생각은 못 하고, 성벽 밖에서 생활을 하며 세금을 내지 않고 몬스터의 영역 주변에서 생활을 했다고.

듣는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닌듯 했다.

어쩌면 나와 소피가 토벌을 하며 돌아다닌 경로에서 조금 더 벗어난 곳에 그런 집락촌이 한두 개 정도 더 있었을지도 몰랐다.

소피가 가족을 잃은 것은 어떻게 보면 불운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예정된 일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소수 편성으로 산을 내려가 도시에서 식량 등을 구해올 수 있는 모험가인 베테랑, 사수, 창잡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아있던 전투원 중 일부가 고블린들의 함정에 부상을 입었고, 하필 그 때 평소보다 조금 큰 규모의 습격이 이어졌다.

소피의 집락이 그곳에 자리를 잡은지 몇 년은 지났고 작은 텃밭도 가꾸고 있었으니, 고블린들은 이미 집락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거겠지.

반면에 나에 대해서는 말해줄 것이 별로 없었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지능이 있다는 것.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소피를 좋아한다는 것.

다른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마법사를 특히 적대한다는 것.

소피의 말에 따르면 내가 리소테에게도 아직 경계심을 품고있다는 듯하다.

딱히 대놓고 경계하진 않았는데, 내 평소 태도에서 그녀가 느끼는 바가 있었나보다.

사실 리소테가 수행하고 있다는 단카프루그 학파는 좋은 마법을 만드는 곳이 분명해보이지만,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고대 문명에 관심이 많고 나를 고대 문명의 산물로 의심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나를 포획해 실험대에 올려놓고 말거라는, 그런 생각이 희끗희끗 보이곤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망상이다.

리소테가 스스로 그런 말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꺼낸 적은 없다……만은.

나는 내 감을 믿는 편이다.

될 것 같은 건 보통 된다.

그런 자세로 콕피트와 각종 마법을 만들기 시작해 결국 성과를 냈고 소피를 내 동체에 태우는 데 성공해, 여기까지 왔다.

그런 내 감이 보여주는 미래의 파편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피 앞에 놓인 차가 완전히 식고 상석의 인간들의 대화가 일단락 될 무렵엔 자리를 파했다.

아마도 저 부대가 '소피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웃 영지'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굳이 소피를 저 자리에 부른 건 저들에게 소피를 소개시켜주고 내 동체와 나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겠지.

평소엔 저런 자리는 앞으로의 군사 행동을 논하기 위한 자리일테니, 앞으로 소피가 불려갈 일은 없을 것이다.

"수고했네."

영주 아들이 소피의 어깨를 두드린다.

중간부턴 아주 약간 나아졌지만, 소피는 천막 안에서 시종일관 긴장하고 있던 게 느껴졌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주 아들도 그런 긴장감을 유발하는 존재 중 한 명이었지만, 그래도 아예 처음 보는 사람들보단 나은지 소피의 목 부근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아, 왔어? 늦었네?"

"리소테! 아까 일부러 도망친 거지!"

동체로 돌아오자 콕피트를 닫아놔서 들어가지 못 하던 리소테가 내 동체에 기댄 채로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소피는 리소테의 볼을 양쪽으로 잡아당기고, 그녀가 미안하다고 할 때까지 놓지 않았다.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찔끔 고였다.

놓아준 뺨이 벌건 걸 보니 힘조절을 하지 않았나보다.

"내가 거기 따라가서 뭐해~."

찡찡대는 리소테에게 소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덜 풀렸다기보단, 자기 스스로도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게 사람이긴 하다.

***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해가 졌다.

군대는 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간이 주둔지를 정리하고 다시 행군을 시작하면 몇 시간이라도 더 걸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콕피트의 투영 마법으로 들어오는 빛이 점점 줄어들자 리소테는 콕피트 안에 마법의 빛을 띄워놓고 노트에 무언가를 계속 적었다.

"뭘 그렇게 쓰는 거야?"

"오늘 있었던 거. 다른 학파 마법사들도 만났구. 루드보어를 해체하는 걸 눈 앞에서 보기도 했구."

"일기?"

"수행 일지거든~. 일기보다 대단한 거야."

리소테가 자신이 끄적이던 노트를 슬쩍 보여줬다.

깨알같은 글씨가 보였고, 앞장으로 넘기자 루드보어의 신체 구조가 제법 디테일하게 그려져있었다.

작은 노트인데도 오밀조밀하게 잘 그려놨다.

실력이 좋다.

"사실 멧돼지랑 너무 똑같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그릴 필요는 없거든. 그냥 미래 준비 같은 거야."

"준비?"

"이런 게 모여서 내가 학파로 돌아갔을 때 그동안 외부 수행을 잘 했나~ 못 했나~ 평가를 해. 그래서 내가 아는 것도 많고 마법도 잘 쓴다 하면, 이제 수련 마법사 끝! 진짜 마법사 시작, 땅땅땅! 하게 되구."

리소테는 허공에 도장을 찍는 시늉을 하며 웃는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미래인 걸까.

기쁨의 감정도 확실히 느껴진다.

"그렇게 진짜 마법사가 되면, 학파를 나와도 되구 학파에 남아서 하고싶은 걸 해도 돼. 나는 원래 남아서 연구원 하려구 했는데 나와서 돌아다니다보니까 재밌는 것도 많네. 루드보어 고기가 엄청 맛없다는 건 아무데도 안 적혀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먹어보고 이제 설명을 추가할 생각을 하니까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것 같은 거 있지."

"그런 거구나."

소피는 리소테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대화는 리소테의 미래 계획보다는,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인생과 미래 계획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보니 뭔가 느끼는 게 있었나보다.

조금 방향성이 빗나간, 슬픔과 비슷한 감정.

아마도 불안감이거나 착잡함, 혹은 의문.

그런 감정이 소피에게서 흘러나왔고, 밤이 깊어짐에 따라 점점 커졌다.

밤을 지샌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잠자리를 설칠 정도로 고민하던 소피는 결국 어떠한 답을 내진 못 했다.

그저 뒤숭숭한 느낌으로 아침에 눈을 떴고, 내 본체에 얼굴을 묻어 세수를 하는 겸 밍기적거렸을 뿐이다.

***

군대에서 한 무리가 떨어져나와 행군 방향의 반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본대는 임시 주둔지를 정리하고 가던 길을 가기 위한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엔 아직도 적당히 도축하다 만 루드보어와, 내 돌탄두에 산산조각나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된 새끼들이 방치돼있다.

아마도 지금 떨어져나간 별동대가 인근 영지에 연락해 저 사체의 처리를 할 예정일 것이다.

고기의 가치가 없고, 가죽과 뼈도 연약한 축에 속하는 거대 멧돼지를 토벌해서 얼마나 큰 보상이 나올진 모르겠다.

물론 일개 중대 규모는 돼보이는 군대도 어느정도 피해를 각오해야 할 전투력이니, 의외로 많이 나올지도 몰랐다.

행군의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사람의 발은 말보다 느리고, 지구력도 떨어졌다.

편도 한 달의 행군이, 사람의 군대와 합류해서 이동 속도가 느려질 것 까지 염두에 둔 기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도 있었다.

우선 영주 아들의 마차가 군대의 중간에 위치하며 호위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피의 심력 소모가 덜해졌다.

이 정도 인파에 달려들어 약탈을 하거나 고기를 얻으려는 몬스터는 적다.

루드보어나 트롤 같은 대형 몬스터의 영역을 침범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몬스터는 오기 전에 발견할 수 있고, 대응할 수 있다.

물론 영주 아들과 군대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 하니, 갑자기 돌변해서 영주 아들을 죽일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저들이 그럴 마음을 먹는다면 애초에 수백의 인파 속에서 영주 아들을 지켜낼 방법이 없었다.

아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장거리에서 요격한다면 승산이 있을 수 있을진 몰라도 내 동체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병과 기마병이 목숨을 걸고 화망을 뚫는다면 결국은 뚫리게 돼있다.

한 명이라도 마차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면 딱히 전투 능력이 없는 영주 아들과 마부, 하녀의 목숨은 없다.

그저 저들의 관계가 지금까지 원만했고, 적어도 토벌 의뢰가 끝날 때까지도 좋은 상태로 유지되길 비는 수밖에.

두 번째로 다행인 점은 소피의 대화 상대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첫 날엔 커다란 막사에 모인 지휘관 급들, 그리고 영주 아들과 이야기를 하는 척 하며 소피를 유심히 관찰하던 기사들의 차례였다면, 다음 날부턴 일반 병사에게 차례가 돌아갔는지 식사 시간마다 질문 공세가 들이닥쳤다.

병사들의 무리에 동체를 가까이 붙히고 내려 배식을 받은 소피와 리소테가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정하기도 전에 사방에서 이리로 오라며 불러대고, 온갖 칭송과 아부, 질문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끔찍하게 지루한 행군이 다시 시작되려나 하던 차에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운 것인지, 아니면 먹성이 좋다며 자신이 배식 받은 음식을 조금씩 나눠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소피는 즐거워보였다.

삼일 째 쯤 되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데 조금 싫증이 나는 듯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의 궁금증은 어느정도 해결되었고 내 동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옮겨갔으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소피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소피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듯 했다.

어른의 문턱을 이제 막 넘은 소피다.

내 전생 역시, 사회에 진출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지금까지의 생활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질 만한 참에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어떤 새로운 길이 있진 않은지 등을 고민하는 소피의 모습은 오히려 바람직해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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