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1.35
* * *
"아난그티아드의 축복을 받아 형태를 취하게 된 자여!
하나의 톱니바퀴 되어 세상을 지탱하는 자여!
그대에게 새겨진 시간의 틈새, 무한한 찰나를 보이라!!
그대가 바라마지않던 빛나는 모습이 현현할지니!!
바로, 지금, 이곳에!!!
미랄르유이그마에 쓰인 역사가 도래하노라!!
모멘터리 에피파니!"
오오.
"하아. 하아. 하아. 베, 베르제스? 이제, 됐어?"
긍정.
"진짜? 진짜로? 그럼 이제 마법 쓸 수 있어?"
부정.
"왜애애애애애애애액~~!!"
리소테가 옷이 더러워지건 말건 땅바닥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마구 휘두른다.
창잡이가 저럴 땐 심하게 꼴불견이었는데 소인족이 하니까 또 나름 어울렸다.
"나한테 왜 이러는 데에에에엑!!"
"리, 리소테! 이제 됐어! 그만해도 돼!"
"할 쑤 있따매!! 보여달라매!!"
긍정.
"근데 이게 며뻔째냐구~~!!!"
"그만! 괜찮아, 리소테. 울지마, 울지마. 응?"
"히이이이이이잉~. 끄어어어어어엉~."
"누, 누가 괴롭혔어. 우리 리소테 누가 괴롭혔어? 응? 얘야? 이 나쁜 슬라임이야? 내가 혼내줄게. 이 나쁜 놈! 나쁜 놈! 응? 리소테, 울지마. 이제 뚝 하자."
……개판이군.
***
발단은 소피가 지나가듯이 해 본 말이었다.
내가 일종의 마법을 사용한다는 리소테의 설명이 문득 기억이 났는지, 리미터 해제 마법을 직접 사용할 수는 없느냐는 물음.
나는 당연히 긍정의 사념파를 보냈다.
그런 마법을 내가 사용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미 두 번이나 성공한 나다.
세 번째는 더 쉽겠지.
만약 실패한다면, 비슷한 효과의 마법을 만들어서라도 쓸 것이다.
나는 리미터 해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언젠가는.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고 리소테가 흥미를 느껴, 내게 마법을 가르치려 했던 게 행군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 3주 전이었다.
그녀는 열정이 대단했다.
아마도 '세계 최초로 슬라임에게 마법을 가르친 마법사'같은 타이틀에 욕심이 난 거겠지.
만약 진짜로 성공하게 된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는 사실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슬라임에겐 지능이 전혀 없으니까.
내가 조금 특별한 슬라임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이번 사례로 인해서 각자가 길들인 몬스터나 동물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이 유행이 될지도 몰랐고, 뭐가 됐든 리소테는 지금 당장 수행 마법사 딱지를 뗀 후 정식 마법사 받고 연구원 자격에 얹어서 어디 거창한 곳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미래에 생각이 닿았는지, 그녀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 나를 가르쳤다.
마법의 발생 설화와 기초 이념부터 시작해서, 마나를 느끼는 법과 세계의 마나와 자신의 마나를 섞어서 동화시키는 방법, 마법진을 그리는 방법, 영창하는 방법 등등.
행군 중엔 사주 경계도 겸하고 있는 소피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밤에만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녀의 끈기는 대단했다.
내가 아무리 부정의 사념파를 보내도 포기하지 않았다.
밤이면 밤마다 듣기도 싫고 알기도 싫다는 내게 마법이 얼마나 위대하고 신비로우며 전능한지 일장 연설을 해댔다.
리소테가 소 귀에 경 읽기 라는 말을 알까.
이곳에 적어도 비슷한 관용구가 있긴 할 것이다.
내가 마법 비스무리한 것을 사용하긴 하지만 인간들이 사용하는 마법과는 분명히 체계가 다르다.
애초에 마나를 느끼는 방법 자체가 다르다.
그녀의 설명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바에 의하면, 인간들은 마나를 시각과 촉각으로 느낀다.
피부로 바람을 느끼듯이 영혼의 촉각으로 무언가 간질간질한 느낌을 감지하는 과정에서 마나의 실체를 깨닫게 되고, 그 간질간질함의 흐름에 익숙해지면 내면의 눈으로 마나를 직접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인간이 마나를 느끼는 방식이라고 한다.
리소테가 정말로 진지하게 몇 번이나 설명하기에 거의 통째로 기억한 후 여러 번 곱씹어봐도 개풀 뜯어먹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나를 미각으로 느끼고, 그에 아득한 시간 동안 익숙해져버린 개량 슬라임에게 인간의 방식을 가르친 후 따라 하라는 요구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다른 것들도 비슷했다.
마나를 먹이로 삼는 개량 슬라임은 자신의 마나를 대기 중에(리소테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 퍼져있는 마나와 섞지 않는다.
먹는 걸 왜 먹다 말고 뱉어서 흐르는 강물과 곱게 섞는단 말인가.
마법진 역시 중앙에서 빛과 함께 얼굴 형태로 변신할 수 있는 메카가 나오지도 않는 주제에 복잡하고 깐깐한 도형의 배치를 배울 의욕이 나지 않았고, 영창에 이르러서는 리소테가 현실을 도피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리소테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와 타협하는 데 10일 정도가 걸렸다.
결국 그녀는 나의 요청에 따라 리미터 해제 마법을 내게 반복해서 보여주고, 그것을 내가 나름대로 분석하고 변형시켜서 따라 하는 방법을 택하게 됐다.
문제가 있다면 리미터 해제 마법의 마나 소비량이 너무 크고, 영창하는 데에도 시간과 체력이 격렬하게 소모되며, 무엇보다 조금 요란하다는 것.
해가 질 때쯤부터 저녁식사를 한 뒤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해서 잠들 때까지 시범을 두어 번 보일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처음엔 흥미롭게 지켜보던 영주 아들도 점차 흥미를 잃고 약간의 의문과 약간의 동정을 담은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저러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하는 시선.
타 영지의 부대와 합류한 첫날엔 이래저래 눈치도 봐야 했고 리소테도 할 일이 있어 보였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그 다음날부턴 다시 그녀에게 마법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리소테의 스트레스가 폭발하고 만 것이다.
***
리소테는 충분히 잘해주고 있다.
그녀의 합류 목적이었던 리미터 해제 마법은 점점 개량되어, 현대어로 된 영창이 만들어지면서 이전보단 영창 시간이 짧아졌고 마법진도 점점 크기를 줄여나가 지금은 콕피트의 천장에 마법진을 새겨넣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소피에게는 나름 오랫동안 지속했던 솔로 활동을 끝내줄 동료 모험가이자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또래 친구가 되어주었다.
루드보어와의 전투에선 전술적 가치를 증명하기도 했다.
지속 시간이 길진 않지만, 거대한 생물체의 시각을 앗아가면서 피아 식별까지 되는 섬광탄은 확실히 메리트가 있다.
그 외에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가 몇 가지 더 있다고 하고, 가지고 있는 지식의 분야가 다소 편중돼 있는 나와 소피의 빈틈을 메워주는 역할도 맡고 있다.
대신에 소인족이라 그런 건지, 마법사라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사람이 그런 건지……, 소피보다 연상임에도 아이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정신 연령이 아주 어린 것 같진 않지만 조금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나 심리적 압박에 대한 내성이 낮다.
신체적 특성에 따라 성장 환경과 사회적 관계가 그런 식으로 조성됐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이번 일의 원인은 리미터 해제 마법에 대한 내 욕심이 대부분이다.
될듯 말듯 하면서도 몇 번만 더 보면 감을 잡을 것 같아서 조금만 더 시켜보려고 했는데, 그 '조금만'을 개량 슬라임의 기준으로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끔찍하게도 이기적인 슬라임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딱히 변명 거리가 없다.
사람의 말을 배우면서 전보단 집적적인 소통이 가능해졌기에, 조금 더 사람의 사정을 배려할 생각이긴 했지만 아직은 부족한 듯했다.
***
행군은 계속되어 타 영지의 부대를 하나 더 조우해 합류했다.
그대로 며칠을 더 걸으니 어느샌가 길다란 성벽이 지평선을 대신하게 되었다.
기나긴 행군에 지칠 대로 지쳐 껍데기만 남아버린 소피는 저녁 시간에 같이 식사를 하던 병사에게 듣고 나서야 그 사실을 눈치챘다.
"저 성벽 너머에……바다가 있다고?"
"나는 잘 안 보여."
다음 날 해가 뜨고 행군이 다시 시작되어도 성벽은 가느다란 선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굵어지고 높아지는 성벽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너머엔 강이나 호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생명의 기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피는 점점 정신이 각성하며 걸음이 자꾸 빨라지게 되었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던 행렬이 어느새 성큼성큼 가까워지자 소피가 애가 탄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쥔다.
마음이 상당히 급해졌는지, 자신의 몸은 가만히 두고 내 동체의 발을 동동 구르려고 한다.
그녀가 살던 집락촌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린다.
지금은 대규모 인원이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만나지 못 했지만, 오는 길엔 각종 몬스터까지 도사리고 있었겠지.
소피가 지금까지 살면서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 했을 거라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대감에 마음이 부푼 소피와는 다르게 내 머리속엔 걱정이 앞선다.
거북이 등딱지 위에 얹혀진 세계.
이곳의 바다가 과연 내 전생의 바다와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
넘실거리는 파도와 햇볕에 달궈진 모래사장, 풍랑에 깎여 신기하고 웅장한 모습이 된 바위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바다를 보지 못 하게 빈틈없이 가려진 성벽이 내 불안감을 더욱 부추긴다.
과연 저 성벽이 어떤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목적인가.
아니면 지상의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지 못 하게 가두는 울타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