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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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따라 이틀을 더 행군하니 가공된 석재와 목재가 잔뜩 쌓여 있는 공터가 있었고, 거기서 하루를 더 전진한 곳에 도시가 있었다.
마을이라기엔 컸지만 우리가 출발한 영지의 도시보단 크기가 작았고, 무언가 활기찬 느낌이 부족했다.
사람과 가축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도 그런 느낌을 주는 원인은 사람들의 표정이 썩 좋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리라.
부대는 도시 외곽에서 행군을 멈췄고, 멀리서 보고 있자니 영주 아들을 포함한 몇몇 인원만이 도시 안쪽으로 이동했다.
행군하는 도중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이번엔 무언가 달랐다.
도시 가까이 있는 성벽에 보이는 성문.
목적지에 도착한 게 분명했다.
"베르제스, 바다 보러 갈래?"
"아, 나도! 나도 보고싶어!"
처음엔 회색 선으로 보이던 성벽도 이제는 꽤나 가까워졌다.
전력으로 달리면 5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로 보였다.
군사행동 중 무단 이탈은 군사재판에 회부되기 딱 좋은 중죄였지만 군인도 아니고, 바다도 본 적 없는 철부지 아가씨들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인 듯하다.
부대에 휴식을 명해 놓고 방금 도시로 들어갔으니 잠깐 다녀와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우리의 모습을 상관이나 영주 아들에게 보고하는 사람이 있어도, 딱히 처벌을 내릴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내 경험상, 이 세계의 모험가는 원래 이렇게 한다.
잘못이 있다면 자랑 좀 하고 돈 좀 아끼겠다고 영지군을 놔두고 소피를 고용해 끌고 온 영주와 그 아들 잘못이다.
성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내 머리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었다.
비교적 널찍한 좌완부를 분리해 바닥에 내려놓고, 몇 번 발로 밀어 보며 흔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 위로 올라간다.
바위를 떼어냈을 때 모양이 적절했기에, 나름 쉴드 대용으로 쓰기 위해 일부러 조금만 가공한 파츠였지만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상대는 너무 약하거나 너무 강했기에 방패가 활약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사용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우와아아아아아!"
"바다, 바다다! 바다야!"
바다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모래사장. 그 주변의 바위산.
성벽은 절벽 바로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 정면엔 바다만 보였고, 좌우로 둘러보아야 파도에 깎여나가는 바위절벽과 그 위에 세워진 성벽이 보였다.
그나마 성문 주변엔 적당한 경사와 꽤나 넓은 모래사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부러 모래사장 방향으로 성문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였다.
쉴 새 없이 파도가 밀려오고 물새만이 날아다니는 바다는 좋게 말하면 평화로웠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심심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피서객이나 배, 그물과 부표가 없는 자연 상태 그대로의 바다는 처음이었다.
거북 등껍질 위에 올려진 세상이라고 하니, 진짜 자연 상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 세계는 달이 큰 놈이 둘, 작은 놈이 하나 해서 세 개나 되는데 조차(??)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세상의 끝으로 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그대로 우주로 튕겨져 나가는 건가?
하늘에서 내린 비가 산을 타고 강을 건너 바다로 흘러들어와 거북이 등딱지 아래로 흘러내려 순환이 이루어지지 못 하고, 점진적으로 세계적 사막화가 진행되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떠올렸지만 우스운 생각이다.
아무리 판타지 세계라고 해도 신성력이 있고, 신이 있는 세상인데 아무렴 세상을 그렇게 대충 만들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도록 하자.
한동안 그런 쓸데없는 상념에 잠긴 사이에도 소피와 리소테는 바다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불러대며 자신이 발견한 바다의 놀라운 모습을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면서도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해변가에 데려다 놓으면 삼일 밤낮으로 뛰어다닐 것 같은 기세다.
얼마간 있은 뒤, 도시에서 영주 아들의 마차가 나오는 것을 확인했기에 동체를 돌려 행렬로 돌아갔다.
***
"바다는 재밌었나?"
"네! 토벌이 시작되면 저희도 바다에 들어갈 수 있겠죠?"
"그건……아마 힘들 거다. 무스파날라 거북의 토벌은 기본적으로 성벽 위의 마도 병기가 맡는다더군.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거북이 산란을 위해 육지로 다가오는 동안 도망치다가 육지까지 밀려나오는 잔챙이들을 막는 거야. 바다에는 육지에서 볼 수 없었던 온갖 해괴한 몬스터들이 있다고 하고, 그 방어 전선도 성벽에 형성한다고 들었다. 절대 바다로 들어가지 않도록 신신 당부를 들었으니 돌발 행동은 하지 마."
"베, 베르제스가 있으니까 잠깐 정도는……."
"의뢰 내용엔 우리 영지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을 것도 포함돼 있었을 텐데."
"윽."
소피와 리소테는 영주 아들이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엄포를 늘어놓고 나서야 울상을 지으며 물러섰다.
이 세계의 바다는 나도 조금은 궁금하긴 했지만, 영주 아들이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게 아예 막아버린 것도 나쁘진 않았다.
내 동체의 콕피트엔 아직도 방수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본체를 넓고 얇게 펴서 고무 패킹처럼 콕피트의 이음매를 막아버리면 어떻게든 물이 들어오는 걸 막을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는 동체 전체에 대한 장악력이 약해지고 산소통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전투 지속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석재 동체를 부유시킬 추진 장치가 없는 것도 문제가 컸다.
만에 하나라도 소피가 내 동체를 끌고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뒷감당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갑자기 높은 파도가 들이쳐 동체가 넘어지기만 해도 불안정한 해저 지형과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탓에 중심을 잡고 다시 일어서는 데 막대한 시간을 소비할 가능성이 있었다.
소중한 파일럿을 지키기 위해선 언제 어디서든 전투에 대비해야 하고, 가능한 모든 리스크를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아직 무리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반응을 보면 이 세계의 사람들은 누구도 바다에 들어가보지 못 했거나, 바다에 들어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는 듯하니 소피도 이해할 것이다.
***
병사들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기하던 장소에 그대로 숙영지를 꾸렸지만 일행은 영주 아들과 함께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영주 아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도시 전체가 일종의 초소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바다와, 바다로 통하는 성문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
다스리는 영주가 없는 왕국 직할령이며 왕이 직접 뽑은 기사가 10년 주기로 교체되며 도시와 성벽을 관리하는 영광을 누린다는 듯.
'영광' 부분 이야기를 할 때 영주 아들의 표정과 감정이 썩 좋지 못 했다.
실상은 귀양을 보내는 개념인가 보다.
농사를 안 짓는 건 아니지만,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기 때문에 식량은 생산량도 좋지 못하고 맛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주변에 가축을 방목시킬 수 있는 넒은 초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전되지 못한 만큼 도시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몬스터가 나타난다.
당연히 도시의 자급자족 같은 건 꿈과 같은 이야기.
왕국의 예산을 대부분 잡아먹으며 식량과 물자를 보내며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계륵 같은 도시가 이곳의 정체였다.
"백성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이니 노트는 넣어두는 게 좋을, 벌써 뭔가를 적었군. 당장 불태워라. 다른 사람들도 잘 볼 수 있게 높이 들어서."
리소테가 당황해서 노트를 몇 장 북 찢어낸 후 마법으로 불태웠다.
주변에서 느껴지던 적대감이 조금은 옅어졌다.
왕국은 바다를 봉쇄하는 데 진심인 것 같았다.
영주의 아들이 수고했다며 고급스러운 음식점에서 밥을 샀다.
아무리 왕국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이런 음식점이 유지되는 것은 그만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는 뜻이겠지.
소위 높으신 분들이 종종 사찰을 다녀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비싸 보이는 포도주도 나왔지만 소피도 리소테도 술에 입을 대진 않았다.
대신 소피는 오랜만에 리소테와 다른 방을 잡아 내 마사지를 받은 후 잠에 들었다.
***
한 달이 넘게 걸려 거점 도시까지 왔지만, 아직 토벌이 시작되기까진 조금 더 남았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빨리 온 이유는 긴 여정 중에 변수를 줄이기 위해 일찍 출발한 것도 있지만, 토벌이 시작되기 전에 성벽을 보수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음 날부터 소피는 병사들과 움직이며 성벽을 보수하는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본래라면 각지의 영주들은 대대급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지만, 소피에겐 내가 있기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보았던 석재와 목재들이 성벽 보수에 쓰일 자재였다.
기본적으로 메카는 중장비에 속하며, 인형 병기는 다양한 작업에 적용할 수 있는 범용성이 장점이다.
특히 돌과 나무를 옮기는 건 내 주특기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내 장악력엔 약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동체의 이곳저곳에 자재를 부착하고 지시받은 곳까지 이동하는 것 만으로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머나먼 미래가 되겠지만, 언젠가는 기동력을 모두 포기하고 전신에 포격 무장을 장착한 채 고정 포대로 활약해 볼 의향도 있었기에 무장의 구성과 배치에 참고할 만한 경험을 쌓을 수도 있었다.
혹은, 변신 합체라든가.
'합체인가…….'
사실 합체는 반쯤 포기한 상태다.
메카가 합체하는 데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은 크든 작든 메카가 두 대 이상 필요한 것이 합체다.
메카가 두 대.
내가 기억하기론 내 동족 중에 나처럼 인간이 탑승할 수 있도록 콕피트를 만든 개량 슬라임은 없었다.
인간들이 만들어준 마법 갑옷을 장악해서 전투에 참여하는 녀석들은 몇 마린가 있었지만, 눈에 띄는 전과를 보여주진 못 했다.
녀석들은 갑옷을 입고 싶어서 입은 게 아니라 그냥 인간들이 갑옷을 던져주고 마석 가루로 유혹했기 때문에 달려들었을 뿐이다.
그런 건 메카로 인정할 수 없다.
'마음'이 담긴 것들만이 메카로 분류될 자격이 있다.
같은 이유로,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골렘과 내 동체를 합쳐 몸집을 불리는 것도 논외다.
'그런 건 합체가 아니야.'
합체와 흡수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생각을 이어나가다보니 조금은 우울해져서 '풀아머 베르제스(포격 사양)'이 되는 미래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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