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1.38
* * *
역사적으로 선전 포고가 없는 전쟁은 계속해서 있어 왔다.
이 세계의 국가, 혹은 영지간 외교 관습과 연락 체계를 알 수 없기에 장담하진 못하지만, 결국 똑같은 사람 사는 곳이고 명예와 도의를 찾는 자들이 있으니 이곳에도 선전 포고와 비슷한 개념은 존재할 것이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전 포고를 하지 않는 자들을 무작정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사정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선전 포고를 할 수 있는 수단이나 언어, 혹은 지능이 없는 경우라든가.
전생엔 인간이었던 내가 봐도, 솔직히 몬스터는 선전 포고 없이 전쟁을 일으켜도 된다고 생각한다.
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
여느 때처럼 성벽 보수를 위한 자재를 옮기던 중, 종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사전에 전파 받았던 신호다.
하지만 소피는 종소리에 반응하지 못하고, 느긋하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우르르르르릉.
"베, 베르제스? 갑자기 왜 그래?"
소피의 조종을 무시하고 온몸에 부착해 놓았던 자재를 바닥에 대충 쏟아버린다.
기다란 목재 몇 개가 떨어지는 바위에 맞아 부러졌지만 어쩔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병사들도 급하게 하던 작업을 마무리 짓거나 무구를 챙기기 위해 임시 막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종소리……. 드디어 왔구나!"
경보라는 게 생각보다 알아채기 힘든 경우가 있다.
특히 평소에도 갖은 소음이 들리는 곳에선 아무리 날카로운 경보를 울려도 사람이 의식하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하물며 실내에서 울려 펴지는 사이렌도 아니고, 일정 간격으로 설치된 작은 종을 사람이 직접 치면서 울리는 신호니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제어권을 다시 소피에게로 돌린다.
그녀는 내가 쏟아놓은 자재들을 팔로 대충 그러모아서 통행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정도로만 슥 밀어놓은 뒤, 리소테가 있는 임시 막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병사들은 각자의 임무를 위해 사방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다.
소피는 그런 그들을 요령 좋게 피해가며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나갔다.
이런 거구의 동체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데도 대다수의 병사는 피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경적이라든가 위험 신호 같은 걸 울리는 기능을 추가할 방법을 고민했지만, 전생의 지게차가 쉼 없이 울려대던 '엘리제를 위하여'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지배했기에 급하게 생각을 멈췄다.
보수 작업을 너무 오래 했나보다.
내 동체가 대지를 박차며 생기는 거대한 땅울림이 이미 위험 신호다.
저들은 스스로도 정신이 없고, 인형 병기에 깔려 죽은 사례가 없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뿐이다.
"소피! 여기야!!"
리소테는 임시 막사에서 군사용 단거리 통신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과연 제대로 배워놨을까.
물론 그녀가 단거리 통신 마법을 사용하지 못 해도, 실제 통신은 기본적으로 그녀에게 지급된 마도구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리소테가 마법을 배우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마도구의 기능에 이상이 생겼을 때를 위한 대비책이다.
사람이 도구의 스페어 역할을 맡는다는 것도 조금 우스웠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인력을 갈아넣어 어떻게든 해결을 해보려는 생각이 차원 공통이기 때문에 이뤄진 조치인 것 같았다.
원래 전쟁 중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때워야 하는 법이었다.
"얼른 타!"
"무슨, 무슨 일이야? 뭐가 온 거야?"
"나도 몰라!"
막사 바깥에서 손을 흔들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리소테와 합류한 후, 일전에 현장 지휘관을 맡은 아무개 경과 사전 답사를 했던 집결 장소로 향한다.
지휘관은 무슨 무슨 영지의 기사라고 했는데, 고유 명칭은 기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다.
그저 느낌 상 중위 쯤 돼 보이는 인상에, 날개 같은 작은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는 것만 떠오를 뿐이었다.
어쨌든 그 아무개 경이 이번 토벌을 마칠 때까지 소피의 상관 노릇을 하도록 되어있다.
우리에게 할당된 방어 구역은 성문에서 조금 왼편이었고, 구불구불한 해안가에선 곶에 해당하는 지형이었다.
비교적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조금만 몸을 돌리면 성문 앞의 모래사장까지 사선에 넣을 수 있었다.
나름 최중요 구역에 배치됐다고 볼 수 있었지만, 지휘관이 하는 말의 뉘앙스는 우리가 아무런 전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
진짜 전력은 성문 구간을 지키는 본대와 그 오른날개, 그리고 우리의 예비대로 배치된 왼날개로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왕국 중앙에서 내려온 근위대와, 서부의 대부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공작의 군대라고 한다.
본래 왼날개를 차지했어야 할 부대를 예비대로 밀어내고 우리가 배치된 것은 저번에 치렀던 이웃 영지군과의 전투가 원인이었다.
소문이 공작의 귀까지 들어가, 꼭 전투를 직접 보고 싶다는 요청을 들었다고.
영주 아들이 시간을 내어 찾아와 '부담 가질 필요는 없지만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다' 같은 말을 했었다.
나와 소피가 제 구실을 못 하고 나가 떨어져도 방어전엔 지장이 없을 편제를 짜 놨지만, 그래도 진짜 실패하면 지역구 망신을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토벌엔 서쪽 지방의 모든 영지가 참가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와 전쟁을 치른 영지군도 오지 않았을까?
당시에 천 명 정도의 인원을 보내 큰 피해를 입고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추정)까지 잃었으니, 사람을 보내지 않고 돈이나 어떠한 이권으로 내줌으로써 면제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집결 장소로 달려나가며 지면에 닿는 팔과 다리를 이용해 조금씩 흙을 채취해 동체의 등 뒤로 옮겨 돌 탄환을 담아둔 백팩같은 구조물을 더욱 거대하게 만들어 놓는다.
지휘관의 설명에 따르면, 무스파날라 거북의 토벌은 사실 방어전이 메인이라고 한다.
넓게 펼쳐진 성벽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몰려들어오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농성전을 펼치다, 무스파날라 거북이 산란을 마치면 '마도 병기'로 사살.
거북이 죽은 후엔 거북에게 밀려나서 육지 방향으로 도망친 몬스터들도 얌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며 토벌이 종료된다.
얌전히 돌아간다는 말에는 조금 의문을 느꼈지만, 본능만이 있을 것 같은 야생 동물 사이에서도 무언가 불문율와 규칙이 존재했다.
아마 몬스터에게도 그런 게 있는 거겠지.
대신, 거대한 거북이 밀어내는 몬스터들의 종류와 양이 어마어마해서 방어전만 수일에서 수십일 씩 지속된다고 한다.
그 기간을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흙을 조금씩 모아봤자 금방 소비가 돼버리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내 사출 마법의 원리를 이해시키는 게 중요했다.
소피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기에, 내가 사출 마법에 사용할 탄환은 땅에서 직접 채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자리를 지킨 채 수 일에 걸쳐 흙을 끌어모으면, 좁은 범위라고 할지라도 주변 지형이 변해버린다.
자칫하면 성벽을 지지하고 있는 기반까지 빼서 써야 하는 상황이 올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거대한 흙 백팩을 조금씩 소비하다가, 이윽고 바닥에서까지 흙을 끌어 쓰면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흙을 추가로 준비해 줄 것이다.
영지전에서 보았던 흙벽을 만드는 마법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저번에 들었던 리소테의 마법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의 마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에 나처럼 땅의 흙을 끌어모으는 형식이 아니라 진짜 없던 흙이 생겨나는 방식일 것이다.
***
집결 장소엔 이미 우리를 제외한 인원은 모두 도착해 있었다.
현장 지휘관을 맡고 있는 기사.
관측과 기록을 할 무슨무슨 학파의 일원들.
거기에 전투 보조의 리소테와 실질 전투원인 나와 소피.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만큼 초라한 편제다.
아마도 내 전투력을 맛만 보고, 조금이라도 밀릴 낌새가 보이면 실질적 본대인 예비대를 투입할 심산이겠지.
어떻게 된 일인지 예비대로 편제된 부대는 보이지 않는다.
크게 상관은 없다.
그들이 나설 차례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몬스터들이 당장 들이닥치고 있는 상황은 아닌 건지, 지휘관은 성벽 위에 올라 뒷짐을 지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을 확인한 본 소피는 마음이 급해져서 움직임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거대한 동체엔 거대한 관성이 걸리기 때문에 급제동을 걸었을 때 제동 거리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딱히 포장된 길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세계에선 내 속도와 자세, 노면의 상태에 따른 변수가 너무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다.
소피는 내 동체를 움직이는 데 겁이 없고 거침이 없다.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와 탁자를 펴놓은 관측대를 지나친 소피는 팔을 높게 들어올려 이족 보행으로 전환하고, 동체의 무게 중심을 뒤쪽으로 옮긴다.
동시에 다리 파츠를 절묘한 각도로 땅에 갖다대 지면을 긁으며 감속.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내 다리가 땅에 깊은 고랑을 만들며 흙먼지를 일으킨다.
느낌상 감속은 문제가 없다.
팔을 거치시킨 채로 사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다른 곳보다 성벽을 조금 덜어낸 범위에 정확히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지한 후가 문제다.
지금은 관성으로 버티고 있지만, 동체가 완전히 멈추게 되면 치우친 무게 중심 탓에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게 될 것이다.
미끄러져가는 우리의 시야에 지휘관의 뒷모습이 천천히 지나간다.
곁눈질로 성벽을 깎아낸 위치를 확인하는 소피.
동체의 감속에 맞춰 하늘로 치켜들었던 팔을 서서히 내린다.
꿍!
소피의 의도를 눈치챈 내가 살포시 대는 느낌으로 팔을 성벽에 거치시켰지만, 역시 무게가 무게인지라 커다란 소리가 나며 한차례 진동이 생겼다.
하지만 성벽이 무너질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상관없다.
거치된 팔을 지지대 삼아 무게 중심을 회복하고 자세를 바로잡는 소피.
완벽한 제어에 만점짜리 퍼포먼스였다.
내게 팔만 있었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을 것이다.
소피 스스로도 방금 제동 과정이 썩 마음에 드는지 꾹꾹 눌러놓은 기쁨의 감정이 조금씩 삐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있는 앞에서 이런 '당연한 것'에 희희낙락 할 수 없는 법.
우리에게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다.
적어도 저들이 보기엔 그래야 했다.
지금 보여준 소피의 조종이 얼마나 대단한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라면 조금이라도 티를 내야겠지만, 이 세계에도 골렘은 있었고 관측대는 그 둔하고 멍청한 동작 수준을 알고 있었는지, 각자 탁자 위에 놓인 펜이며 수정구를 쥐고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1, 12번 진지! 전투 배치 완료!"
한 박자 늦게 리소테가 어색한 손동작으로 마도구를 만지작거리며 책을 읽는 어조로 완료 보고를 수행한다.
보고 대상은……, 아마 바로 옆의 지휘관이겠지.
일개 통신병 나부랭이 위치의 리소테가 직속으로 배치된 지휘관을 건너 뛰고 중앙과 직접 통신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지휘관이 바로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더라도 이러한 과정은 필요하다.
진짜 인형 병기를 본 적이 없는 이세계인에겐 기초부터 친절하게 알려줘야 하는 것이 것이 식자(?者)된 도리다.
자, 그래서 적은 어디냐.
핸드 발칸의 포구를 전방으로 지향한 채로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를 주시한다.
무수한 빨판이 달린 크라켄의 다리나, 씨 서펜트의 굵직한 몸체는 보이지 않는다.
상대는 해양 생물인 만큼, 바닷속에 잠복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기에 잠시동안 기다렸지만 일정하게 밀려오는 파도 외엔 특징적인 물그림자나 파문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모래 사장으로 몸을 돌린다.
적은 어디냐.
모래 사장에서 당장 전투가 일어났다면 이미 소리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문과 오른날개에 배치된 병력들은 나처럼 전방을 경계하고 있을 뿐, 아직 전투를 치르진 않고 있었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된다.
몸집이 작은 어인같은 종류는 파도가 밀려듬과 동시에 모래 사장 위로 올라와, 물이 빠지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
잠시동안 기다렸지만 파도에 젖은 모래가 어두운 색으로 변했다가 물이 빠지며 잠깐 밝은 색으로 돌아오기만 할 뿐, 역시 특이사항은 없었다.
성벽을 들어내지 않은 부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지휘관에게 몸을 돌린다.
적은 어디냐.
"16분 48초. 한창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이었던 걸 감안하면 놀랍도록 빠른 시간이지만, 그래도 자네들은 겨우 둘에 이동 수단까지 있으니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지 않았나?"
……아아.
이건 알고 있다.
전생의 군복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익숙하다.
드디어 찾아낸 '주적'을 향해 핸드 발칸을 돌리려 했지만 소피가 말렸기에 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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