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1.39
* * *
"저곳을 봐라."
지휘관은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며 어딘가를 가리킨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는 쉴 새 없이 꾸물거리며, 햇빛을 어지럽게 반사하고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지, 비교적 가까운 곳에선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파도들을 제치고 불규칙한 파문이 일어난다.
시선을 위로 올리면, 날카롭게 잘라놓은 것 같으면서도 넓은 붓으로 슥 그어놓은 것도 같은 고요한 수평선.
하늘에 옅게 스며든 듯한, 하야면서도 조금 희끄무레 한 색의 구름.
도대체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군.
저렇게 티끌 하나 없는 바다에서…….
'있다.'
있었다.
아주 자그마한 티끌이.
처음엔 파도가 넘실거리며 만들어내는 밝은 빛과 어두운 빛에 가려져 알아채지 못 했다.
하지만 한 번 눈치채니, 계속해서 일렁이고 요동치는 파도 사이로 꿋꿋하게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는 검은 점이 확실히 보인다.
물체를 중심으로 투영 마법을 줌 인 한다.
하지만 아무리 줌을 당겨도 점은 점이다.
점이 점점 커짐에 따라 소피와 리소테가 화면에 빨려들어가듯, 상체를 점점 기울인다.
화상을 과도하게 확대해서 수평선이 더 이상 직선이 아닌,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보이고 사물의 윤곽이 유채화처럼 일그러지고 뭉개질 때쯤.
그제서야 점으로 보였던 그것이 낮은 삼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섬?'
"약 150년 전. 제국의 대마법사 '위대한 일로트 리브'의 협력 하에 대대적인 시계 확보 작전을 펼쳤다고 하는군. 아주 철저하고, 집요하게 말이야. 그 전엔 이 바다에 '섬'이라는 게 있어서 엄폐물이 되고, 몬스터의 서식지가 됐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없다. 이 바다엔 바닷물 외엔 아무것도 없어. 있어선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보인다면……,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가 처리해야 할 대상이겠지."
소피가 그때까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눈을 질끈 감고 꾹꾹 눌렀기에 투영 마법의 배율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삼각형의 물체는 다시 점으로 돌아온다.
멀다.
거북이 등딱지 위에 올려진 이 세계가 지구보다 평평한 편이라고 가정한다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먼 거리다.
"거북이 보인다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저 녀석의 움직임에 따라 밀려나고 밀려난 몬스터들이 언제 육지로 상륙할지 장담할 수 없지. 특히 소형 몬스터는 발견 즉시 교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더군. 현재 시간 14시 42분. 현 시간부로 12번 진지 전투조는 보수 작업을 중지하고 전투 태세를 마친 채 경계 작전에 투입된다. 교대 예정 시간은 17시. 몬스터나 수상한 현상을 발견하거든 나에게 보고하도록."
지휘관은 말을 마친 후 마도구를 이용해 어딘가로 통신을 보냈다.
인접 진지를 다시 보니 전에 얼핏 보았던, 대대급에 가까웠던 인원이 아니라 소대급보다 조금 많은 인원만이 집결해 있었다.
여기저기 퍼져 보수 작업을 하던 병사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경보를 울린 건가.
이곳에 있는 병력 중에선 각 영지의 정규군도 있겠지만, 우리처럼 영주에게 고용된 모험가나 용병대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통신용 마도구를 분출하고 사용법을 숙지시킨 게 아니라면, 경보를 울려야만 단시간 내에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었겠지.
우리의 예비대가 보이지 않던 것도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중앙 본부 주변에 있던 예비대는 경보의 내용을 사전에 전파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올 필요가 없으니 오지 않은 것이다.
지휘관이 처음으로 뱉은 말이 전생의 군대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라 조금 오해를 한 것 같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전투 준비 태세를 준비하기 위해 준비했던 경험은 죽었다 깨어나도 잊혀지지 않고 또 다시 내게 끔찍한 기분을 선사했다.
성벽 아래 탁자를 차린 뭐시기 학파 일원들은 펠리컨처럼 생겨선 까마귀 같은 깃털을 가고 있는 새의 목에 커다란 수정구를 달아 내 쪽으로 날렸다.
새는 내 머리 파츠 위에 앉아 끽끽 소리를 내더니 박제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리소테와 처음 만났을 때 봤던, 영상을 기록 하는 마도구로 보였다.
새는 패밀리어인가.
설마 내 머리에 새똥을 싸는 건 아니겠지.
"잔뜩 긴장하고 왔더니 이게 뭐야~."
"흠흠. 언제 싸울지 모른다잖아. 필요한 일이야."
리소테가 김이 빠졌다는 듯이 볼멘 소리를 했지만, 소피는 다소 우격다짐으로 행해진 당나라 스타일 소집에도 크게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트롤 사냥에 질려서 종종 받았던 채집 의뢰나 야생 짐승 소탕 의뢰보단 사정이 나았다.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의뢰를 내곤 했는데, 다른 베테랑 모험가들에게 줄줄이 거절당한 의뢰가 소피에게까지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무력과 실적으로 단기간에 4급 모험가까지 오른 슈퍼 루키 소피는, 그만큼 짬과 요령이 부족할 수밖에 없어 몬스터 토벌이 아닌 일반 의뢰에선 상당히 애를 먹었다.
특히 짐승 소탕 의뢰가 심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들 입장에서 상당히 비싼 돈을 들여 고용한 모험가의 노동력을 최대한 뽑아먹으려 들었고, 적절한 선에서 끊는 법을 몰랐던 소피는 소탕 증거로 가져온 짐승 사체의 도축과 훈제부터 시작해서 일을 점점 떠맡다가 온 마을의 지붕을 싹 뜯어고친 후 '수상할 정도로 성장이 빠른 나무'를 뿌리 뽑고 나서야 의뢰 완료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도 그건 몬스터였다.
내 동체를 향해 가지와 뿌리를 뻗던 나무에게서 미약한 적대감을 느꼈다.
그때에 비하면 진지 보수하다 갑자기 무장하고 뛰쳐나오는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 거겠지.
적어도 본래 목적을 벗어난 요구는 아니다.
내 입장에선 조금만 품을 들이고 신경을 쓰면 합리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을 대충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처리하니 불만이 있었지만, 소피가 덮어두려고 했기에 나도 잊기로 했다.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모양에 슬라임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금처럼 일어난 일은 제쳐두고 현재 상황에 맞춰 행동하려는 것이 소피의 개성이자 장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내 콕피트는 아직도 비어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
교대는 제시간에 이루어졌다.
우리의 예비대가 근위대인지 공작의 병사들인진 제대로 듣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콧대 높은 병사들이 모험가인 우리를 무시해서 교대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결국은 기우가 되었다.
지휘관이 끝까지 남아 우리와 함께 경계를 섰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교대조에는 예비대의 지휘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화를 대충 들어보니 '보여주기'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우리 지휘관은 시범 운용 부대에 가깝고, 온갖 시선이 집중돼있기 때문에 신경도 쓰이고 눈치도 보여서 근무를 같이 선 듯했고, 예비대 지휘관은 우리 지휘관 때문에 덩달아 끌려나온 느낌이었다.
힘 내라며 등짝을 팍팍 치는 예비대 지휘관의 손길에 감정이 실려 있다.
느낌 상 저 자는 경계를 두어번 서다 안 나올 것 같았고, 우리 지휘관은 토벌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현장에서 구르게 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중앙 본부에 있다는 공작이라는 양반은 서부의 실세를 꽉 잡고 있다고 하니 못해도 장성급 인사는 되겠지.
이곳의 정치 형태에 따라선, 왕도 벌벌 기게 만드는 권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휘관이 뒷짐을 지고 뻣뻣히 서있던 게, 모험가 상대로 파워 게임을 벌이며 우리를 찍어누르려기 위한 액션이 아니라 상부의 프레셔에 짓눌리고 있는 중간관리직의 허세였을 가능성을 떠올리니 어쩐지 조금은 측은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주적'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야간 경계 근무에서 완전히 제외됐다.
내 동체가 내는 굉음이 부대의 취침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휘관은 고마운 줄 알라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모험가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불침번이란 걸 서본 적이 없는 소피는 딱히 와닿지 않는 듯했다.
집락촌민들이 내 적재 공간에 살림을 차리기 전엔 그들이 잠을 쪼개가며 불침번을 섰는데, 먼저 들어가서 자라는 말에 소피는 순진하게도 세상 모르게 잠을 잤었지.
대신, 주간에는 오전이나 오후 중 하나를 통째로 떠맡게 되었는데 어딜 봐도 우리에겐 그쪽이 이득이었다.
기나긴 행군을 통해 소피의 끈기와 인내심은 최고조에 달해있었고, 집중력 저하라는 걸 모르는 내가 있기 때문에 수 시간 동안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어도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없었다.
뭐시기 학파 쪽도 크게 환영하는 눈치였다.
뙤약볕에 갑옷을 입고 서있어야 하는 지휘관만 죽어나겠군.
일정상 공사판 느낌이 나던 임시 막사에는 이젠 제법 진중한 분위기가 흘렀다.
각자 무구를 점검하거나,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어두려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경계를 설 때만 해도 재잘재잘 잘도 떠들던 소피와 리소테도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식사를 한 후 곧바로 잘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