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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45화 (45/65)

〈 45화 〉 1.43

* * *

온몸이 쭈글쭈글해져서 미라같이 말라버린 기사를 조심스레 구석으로 치워놓는다.

동족은 나를 눈앞에 두고도 자신이 새로 만든 동체를 관조하는 데 여념이 없다.

태평한 놈이다.

슬라임이니 어쩔 수 없지만.

"벌써 세 마리 째야."

"베르제스, 제대로 안 보이잖아! 저것 좀 치워봐."

잘못된 정보 전달로 인해 콕피트에서 앓는 소리가 나오지만 애써 무시한다.

온갖 뼈를 그러모아 지지대를 만들고 아무 고기나 대충 덕지덕지 이어붙여 만들어진 동체는 방금 전에 비하면 훨씬 그럴싸해지긴 했다.

피와 광기에 물든 타이어 회사 마스코트 정도면, 심연에서 기어나온 어둠의 미트볼보다야 양반이지.

녀석도 자신의 솜씨가 나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동체를 꺾어보고 돌려보고 하며 가지고 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엔 사악한 의식이라든가, 역병을 부르는 저주같은 걸로 보이겠지만 나는 녀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장난감은 항상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 마련이다.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라면 더더욱.

'행복하냐? 그럼 됐다…….'

녀석이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다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는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놈에게도 나름의 고달픈 슬생이 있었을 테지만, 요약하자면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었든 악마와 싸우다 도태됐든 천사가 세상을 뒤집었을 때 의식을 잃었든, 어쨌든 모종의 이유로 대충 아무 데서나 굴러다니다 몬스터들에게 먹히고 배설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결국은 무스파날라 거북의 위장, 혹은 바위섬에 처박히게 된 거겠지.

그런데 갑자기 발사된 고대 병기의 마나 파동에 화들짝 정신을 차려서 이제서야 활동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저런 짓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장악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뛰어넘은 거대 거북의 사체를 무리하게 움직여 해저 지형에 몸통 박치기를 한다거나, 보리 콜라나 솔잎 음료에 비견될 만큼 특색이 과한 인간의 오러를 생명에 위협을 가할 정도로 정신없이 쪽쪽 빨아먹는다거나, 어떤 형태로든 사지가 달린 동체를 만드는 개량 슬라임의 본능을 거스른 살덩이를 구성한다거나.

그런 게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럽지만, 개량 슬라임에게 있어서 중추 신경계를 담당하는 부분이 완전히 녹아버렸다는 가설 외엔 놈의 기행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개량 슬라임을 이런 형태로 망가뜨릴 수 있을 만한 요소는 방금 봤던 고대 병기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내 예상이 얼추 들어맞을 것이다.

'암흑 진화.'

처음엔 동족일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떠올리지 못 했고, 다음엔 설마설마 하며 아니길 바랬지만 놈에게서 느껴지는 마나 파동과 실시간으로 두 번이나 동체를 교체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지성을 갖추고 선택 받은 인간들의 도움을 받은 나는 메탈 개량 슬라임으로 진화했지만, 슬라임의 본성대로 살아가다 온갖 세상의 풍파를 겪고 정신까지 나가버린 녀석은 스컬 개량 슬라임으로 진화해버린 내 동족이다.

뼈와 근육.

그래, 좋긴 하지.

괜찮은 몬스터의 사체는 어중간한 모래나 진흙을 뭉쳐놓은 동체보다 튼튼하면서 질기고 유연하다.

나도 드래곤과 싸울 때 동체를 잃으면 급한 대로 종종 애용하곤 했다.

이제 와선 한낱 철없던 시절의 치기이며, 지우고 싶은 흑역사에 지나지 않지만.

'거대한 고깃덩이는 거인이나 괴수지. 메카라곤 할 수 없어.'

때문에 저 흉한 모습은 소피에게 보여줄 수 없다.

잊었던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내 자화상이나 다름없는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벌써 세 마리라고?

좋다.

소피가 놈과 나의 유사성을 떠올리기 전에 해치운다.

만약에라도 그녀의 입에서 '역시 베르제스의 형님'같은 말이 나온다면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

놈을 죽인다.

나의 명예와 존엄을 위해서.

베르제스.

발진.

***

슬슬 '놀이'를 끝내고 나를 의식하는 놈에게 다가간다.

개량 슬라임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당장 떠오르는 방법 중에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리소테 왈, 마법은 기합이라 하지 않았는가.

근성. 노력. 기합.

이 세계는 정신론으로 어떻게든 굴러가는 세상이다.

"흡."

콰직­.

소피가 짧은 호흡을 뱉으며 준비 자세 없이 주먹을 뻗는다.

가면 갈수록 전투술에 도가 트고 있다.

빠르게 뻗어나간 주먹이 놈의 가슴팍을 부서트리고, 허리까지 꺾어놓는다.

생명체였다면 이 한 방에 최소 반신불수행이였겠지만 개량 슬라임에겐 큰 문제가 아니다.

동체의 장악력을 잃지도 않았군.

진짜 정신을 차렸나 본데.

"흥!"

이어지는 두 번째 펀치.

허리의 회전까지 가해진 스트레이트의 목표는 하복부.

그리고 이어지는 발포.

촤악.

이번엔 약간 버티려는 힘이 느껴졌지만 녀석의 동체는 속절 없이 터져나가고 만다.

쏟아지는 피와 살, 뼈에 본체를 숨겨 이탈한 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동체를 구축하려들지만 놓치지 않는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내 화살표에 반사적으로 흙탄환을 발사하는 소피.

모래사장 위에 쌓인 시체들이 피에 젖은 모래를 뿌리며 산산조각 난다.

그 사이에 또 도망갔군.

이번엔 어디냐.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한 마리야! 같은 놈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라구!"

이럴 때만 눈치 빠르게 정확한 분석을 내리는 리소테가 밉다.

다음은, 바다뱀인가.

시체 사이로 기어가 목이 잘린 바다뱀의 사체를 장악한 놈이 동체를 꿈틀거린다.

멍청한 녀석.

갑자기 다리도 없는 특수 동체를 다룰 수 있을거라 생각했나!

소피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우완부에 마력을 집중한다.

빠르게 난동을 부리는 동체에 정확하게 꽂히는 주먹.

그대로 살덩이를 움켜쥐고,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

콰앙────!!

두꺼운 바다뱀의 시체를 끊어내는 파일 벙커.

하지만 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튀어나간 말뚝을 되돌리며, 다음은 왼팔이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하아, 하…. 아직이야?"

긍정.

파일 벙커를 연속으로 사용하며 바다뱀 동체를 토막내는 데 성공했지만 놈은 재빠르게 다음 동체를 물색하고 있을 뿐이다.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흑역사고 나발이고, 지연전으로 가면 소피가 먼저 나가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성벽에서 지원! 소피, 피해!"

"어디로…. 앗, 불이야!"

화르륵!

잠깐 불꽃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모래사장 전역에 불길이 치솟아오른다.

마법인가!

젠장, 광역 마법을 사용할 거라면 아군이 휘말리지 않게 하라고!

소피는 갈팡질팡하며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한다.

일단은 내가 소피의 몸을 본체로 감싸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온도 유지는 가능하지만, 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바위가 달아오르기라도 한다면 나 혼자선 도저히 막을 수 없다.

소피가 내 동체 안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풍경이 번개처럼 떠올라 급하게 바다로 동체를 이동시킨다.

"어, 어? 베르제스! 잠깐! 잠까아아안!!"

첨벙!!

네 걸음째까지 무릎 쯤에서 바닷물이 철썩였지만, 한 걸음을 더 내딛자 갑자기 깊어지며 순식간에 가슴 높이까지 차오른다.

소피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심장이 철렁 하는 게 느껴진다.

다행히도 바닷물이 거기서 멈췄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가 파일럿을 익사시킬 뻔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는 도박이었다.

모래사장에서 버티고 있었으면 더욱 고통스럽게 죽는 미래밖엔 없었다.

"물 들어온다! 소피, 어떻게 좀 해봐!"

"베르제스가 말을 안 들어!"

동체 곳곳에 뻗어놓았던 본체를 최소 한도로만 남기고, 콕피트로 최대한 끌어온다.

물이 들어오는 건……, 콕피트 이음매와 통풍구 외에도 생각보다 많군.

본체로 최대한 틈새와 구멍을 틀어막자 콸콸콸 쏟아지던 바닷물이 방울져서 떨어지는 수준으로 바뀐다.

이걸로 한시름 놨군.

"휴, 휴우. 베르제스. 다음부턴 말 좀 해."

"그래! 열기를 막아주는 마법도 있단 말이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소피와 리소테가 상황이 안정되자 나를 타박한다.

말을 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기에 리소테는 달궈진 돌의 무서움을 전혀 알지 못하는 티를 팍팍 낸다.

내가 리소테의 마법을 믿고 저 불길 속에서 버티다가 뒤늦게 입수했다면 내 동체로 바닷물이 끓어올랐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베르제스는 불을 무서워하나봐.'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모래사장을 주시한다.

마법사가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래사장 전체가 불바다로 변했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놀 줄을 모르는 우리 마법사 선생들은 엉덩이는 무거워도 자기 할 일은 톡톡히 해내고 있다.

신나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병사들에게선 기대하기 힘든 모습이다.

매개체가 되는 시체를 불태우는 방법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가장 쉬운 대처법이다.

어설프게 태우면 좀비가 스켈레톤으로 바뀔 뿐이지만 충분히 강한 화력을 가해서 뼈까지 태울 수 있다면 이만한 방법이 없지.

신성력처럼 극적인 효과는 없지만, 비교적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아무래도 연비가 좋다.

얼핏 본 바로는 마법사보다 신관의 숫자가 더 적어 보이기도 했고.

개량 슬라임은 언데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녀석이 사용하는 동체는 뼈와 살덩이가 주를 이뤘다.

내가 바위섬을 부수면서 떨어져나간 바위라든가, 모래사장의 모래가 있었음에도 살덩이만을 고집하는 걸 보면 그냥 저 녀석의 취향이다.

놈이 바다로 돌아와 해저에 가라앉은 바위를 회수하는 게 아니면, 사용할 수 있는 동체는 다 타버린 뼛가루나 단단하게 뭉치는 게 불가능한 모래알 뿐이겠지.

그런 걸 다루는 개량 슬라임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녀석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지만, 희귀한 걸 좋아하고 연구하고 싶어서 토벌까지 따라와 나를 관찰한 집단이 있으니 그들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불길이 점점 잦아든다 싶었더니, 내 뒤에서 거대한 파도가 들이쳐 모래사장을 덮친다.

처음 한 번은 어떻게 버텼지만, 두 번 세 번을 들이치니 중심이 흐트러지며 그대로 파도에 쓸려 해안가로 끌려가고 말았다.

엄청난 수증기를 내며 지글지글 끓는 모래사장까지 밀려와, 지면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고 연거푸 들이치는 파도를 버텨낸다.

지금까지 흙 동체를 쓰고 있었다면 진즉에 동체가 진흙이 돼서 파도에 다 쓸려 나갔겠군.

마법사들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아니었으면 소피는 벌써 다섯 번은 넘게 죽었다.

아무리 작전 수행 중엔 병사 목숨 한둘 정도야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정도고, 소피와 리소테는 정규병도 아닌 모험가 나부랭이라지만 대우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설마 토벌 기간 동안 내 동체의 스펙과 기능을 벌써 구체적으로 파악한 건 아니겠지.

***

불로 지지고, 물로 쓸어버리고.

이전보다 훨씬 깔끔해진 모래사장에, 녀석은 다 타버린 동체를 붙잡은 채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저것 봐라.

주변에 널려있는 모래를 놔두고 시체를 쓰는 건 취향이라니까.

상태를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려는데, 허공에 발광체가 생기며 놈의 동체를 밝게 비춘다.

마무리로 신성력까지 동원하는 모양이군.

개량 슬라임에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지만, 무탈하게 끝냈을 거대 거북 토벌을 이렇게 다 뒤집어놨으니 사람들이 신중을 기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빛이 사그라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녀석의 동체에 다가간다.

녀석은 나름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동체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죽은 체를 하고 있다.

개량 슬라임은 항상 수많은 동족들과 함께 대형 몬스터를 집단 린치하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역으로 당해보니 많이 당황스러웠던 거겠지.

놈에게 사념파는 없지만, 느긋하고 게으른 품성을 집어던지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생로를 찾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하.

지능도 없는 놈이 생각은 무슨.

사람들이 네놈을 포박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내 샌드백이나 돼라.

하지만, 있었다.

놈이 살아남을 방법이.

파앗─!!

"읏!"

"꺅! 저거 왜 저래?!"

놈이 재빠르게 본체를 내게 뻗는다.

단순히 마지막 발악인가 싶었지만, 놈의 명확한 '의지'가 내 동체를 침범한다.

이 자식, 내 장악권을 빼앗을 생각인가!

지금까지 나는 개량 슬라임의 포텐셜을 낮게 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은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에 '죽을 둥 살 둥' 힘을 쓴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고.

하지만 한 번 죽었다 깨어나고, 다시 한 번 죽음의 위기를 느낀 놈의 저력은 무시무시했다.

'내가 밀리고 있다!'

동체가 점점 내 의지를 벗어나는 게 느껴진다.

파츠의 이음부가 삐걱이고, 거구를 유지하는 지지력이 약해진다.

놈에게 제어권이 넘어가고 있다.

이게 개량 슬라임의 '전력'이라고?

내가 당한다고?

'웃기지 마라……!'

이건 내 동체다.

내가 얻어내고, 내가 깎아내서, 내가 구성한 나만의 동체다.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지도 모르는 말뼈다귀같은 놈에게 뺏길까보냐!!

마음을 다잡고 놈과 힘겨루기를 시작한다.

악에 받쳐서 내 동체에 몸을 뻗쳐 억지로 잡아당기는 놈의 제어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했던 게 잘못이었다.

힘에는 힘.

소피의 정순한 마력을 받는 내가 밀릴 리가 없다.

다시 제어권이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

멍청한 녀석.

시체덩어리나 다루던 녀석에게 메카를 탈취당할 내가 아니다.

시도는 좋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어? 베르제스? 이거 뭐야?"

그래서 놈은 상대를 바꿨다.

"이건 무슨, 어? 너는."

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앗. 아. 아아. 으? 끅."

"소피, 소피? 무슨 일이야? 왜 그래?"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소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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