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1.44
* * *
"카핫. 악. 으읏!"
소피의 전신이 경련한다.
쥐라도 난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수축하며, 혈관도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눈을 꽉 감은 채 뜰 생각을 못 하고 있다.
'긴급 퍼지!'
어떤 방법으로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할 시간조차 아깝다.
팔, 어깨, 다리, 허리, 머리.
콕피트만 남긴 채 녀석에게 전부 넘겨버리고 모래사장으로 추락한다.
꾸웅!
"꺄앗!"
리소테가 비명을 지른다.
아무리 모래사장이라도 수 미터 높이에서 바위가 떨어지는 충격은 만만치 않다.
소피는 내 본체로 충격을 흡수했기에 괜찮겠지만, 아예 정신을 잃어 내게 힘 없이 안겨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나는…….
"골렘이 당했다! 서둘러!"
"퇴각하시오!"
성문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던 기사들이 속도를 높여 나와 놈 사이를 가로막는다.
좋다.
오러는 생체 슬라임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다.
치명상을 입히려면 아주 난도질을 해야하지만, 적어도 베어낼 때마다 움츠러들게 만들 순 있다.
이제 저들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젠장, 그런데 콕피트가 왜 굴러가질 않는 거야.
아아, 모래사장에 처박혀서 그렇구나.
모래에서 이동하려면 뭐가 필요하지?
무한궤도? 스파이크?
호버링 같은 건 불가능한데.
"베르제스! 뭐 해! 정신 차려!!"
리소테가 찢어지는 톤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급한 건 나도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소피가 죽어버린다구!!"
죽어?
소피가?
안 돼.
오, 소피.
안 돼.
죽으면 안돼…….
***
어떻게 임시 막사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리소테가 뭔가 마법을 쓴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어찌어찌 콕피트를 굴릴 수 있는 동체를 구성해서 빠져나온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도 소피는 많이 안정된 상태다.
심장도 제대로 뛰고 있고, 호흡도 안정적이다.
놈에게 억지로 빼앗긴 마나도 약간은 회복된 듯 보인다.
리소테가 신관을 닦달하며 손에 잡히는 포션은 죄다 들이 부으려 든 보람이 있었다.
반면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소피의 몸에 달라붙어 안절부절하는 것밖에 없었다.
방금 전엔 당황했다고는 해도, 끔찍하게 한심한 꼴을 보였다.
빌어먹을.
뭐가 에이션트 슬라임이냐.
지금까지 잠들어있다 얻어맞아서 금치산자가 돼버린 동족에게 역습을 맞고 허둥대는 꼴이라니.
나는 온갖 역경을 뚫고 살아남은 인형 병기 전투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 전생의 기억에 의지해 모든 것을 깔보다가 실패 한 번에 무너져내린 애송이였을 뿐.
소피의 용태를 살피다가 이젠 내 눈치를 보는 리소테의 시선이 아프다.
'정신 차려라……!'
마음을 다잡는다.
평범한 산골 소녀였던 소피가 머나먼 바다까지 와서 병상에 누워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내 아집 때문이다.
고블린의 습격에 그녀가 숨어든 여우굴이 내 콕피트가 아니라 진짜 산짐승의 안식처였다면,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하다 집락촌민과 합류해서 나름대로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산에서 나는 과일과 약초를 채집하고, 농사도 짓고, 음식과 옷을 만들고, 적당한 남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그런 삶.
얼마 전에 성인이 됐으니, 빠르게 결혼했다면 지금쯤 불러온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피의 그런 미래는 내가 무참히 짓밟아버렸고, 지금 그녀는 전사로서 내게 탑승해 전선에 나와 부상을 입었다.
만약 여기서 이대로 좌절해버린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게 된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염치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인간의 마음이 없는 추악한 몬스터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소피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런 오만한 말은 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녀가 내 동체에 탄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것이 한 인간의 인생을 비틀어버린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썬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그녀에겐 좋은 기억만 남겨주고 싶다.
"넌……착한 슬라임이구나."
"앗, 소피!"
소피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신체에 별문제는 없어보이지만, 그동안 누적된 피로에 방금 전의 공격이 쐐기를 박았는지 혈색이 나쁘다.
"읏, 차."
"누워 있어! 억지로 일어나지 마."
"나 환자 아니야. 그냥, 좀……. 이젠 괜찮아."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만, 상체만 겨우 일으켜서 침대에 기대 쉬고 있는 소피의 모습은 영락없는 환자의 그것이다.
놈이 그녀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방금 전엔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천천히 돌이켜본 결과 마나를 빼앗아간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 외에 뭔가 영구적인 장애를 입혔다든가 한 건 아니겠지?
"하하하."
"소, 소피. 갑자기 왜 웃어."
"아니, 아니야. 일어나니까 너무 배고프다. 뭐 먹을 것 좀 가져와줄래?"
"먹을 거? 응! 찾아볼게! 조금만 기다려~."
천막을 젖히고 나가는 리소테의 발걸음이 가볍다.
소피가 지쳐보이는 건 정말로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일까?
원래부터 식욕이 왕성한 그녀였지만, 마나를 많이 소비했을 때엔 평소보다 더 많은 영양을 섭취하곤 했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오히려 걱정이 된다.
소피가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얼버무리는 게 아닐까, 하는.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베르제스. 조금 어지럽긴 한데, 정말 괜찮아."
어떻게 알았는지 소피가 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한다.
내 파일럿 소피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다.
그녀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내가 사념파를 발하지 않을 때에도 내 마음을 파악해서 말을 건넬 때가 있다.
가끔씩은 틀리기도 하지만,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예측의 정확도가 쑥쑥 올라갔다.
단순히 찍었는데 맞은 건지, 아니면 '여자의 감'이라는 건지.
어쩌면 내게 나도 모르는 모종의 버릇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베르제스."
대신에 나도 그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내 이름을 불러서 내 주의를 충분히 끌고 난 뒤에 한 박자 쉬고 꺼내는 말은, 대부분 듣기에 껄끄럽거나 달갑지 않은 말이 대부분이다.
"너랑 쟤랑 똑같은 슬라임이지."
이것 봐라.
……젠장.
긍정.
"왠지 그런 것 같더라."
소피가 한숨을 푹 내쉰다.
내 파일럿 소피는 눈치가 빠르다.
하지만 눈치가 빠르다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능하면 모른 채로 넘어가길 바랬지만,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지금 그녀를 속이는 것보단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뒤로 소피의 낌새가 어쩐지 이상하다.
뭔가, 뭔가가 달라져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소피에게 몹쓸 짓을 한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몹쓸 짓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아내려면, 나와 그녀가 서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공유해야 단서를 잡을 수 있으리라.
마침, 소피도 평소처럼 내 본체를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
"방금 전에 말이야. 저 슬라임이 너한테서 골렘을 뺏어가려고 했는데 잘 안 됐잖아."
긍정.
"그래서 그 다음엔 나를 뺏어가려고 했거든. 내가 느끼기엔 그랬어."
긍정.
"그런데 이상하잖아? 골렘 안에 내가 타고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고 뺏어가겠어. 그것도 리소테도 같이 타고 있는데 딱 나만 골라서."
긍정.
"그건 말이야. 네가 나를 골렘의 부품처럼 생각해서 그런 거야."
긍……, 아니. 뭐라고?
"솔직히 말해. 지금 말하면 봐줄게.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 적 있어, 없어?"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동체와 소피를 동일 선상에 둔 적이 없다.
어떻게 메카와 파일럿을 같이 취급하겠는가.
소피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 마나 저장소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가끔, 아주 가~끔은 있었을지도?
"이 나쁜 놈.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화낼 거야."
소피는 내 본체를 꼬집고 잡아당기고, 꿀밤을 쥐어박는 시늉까지 한다.
화는 이미 내고 있는 것 같지만 잘못은 내게 있으니 얌전히 소피가 하는 대로 당해준다.
짚이는 부분이 꽤 있었는지, 조금 오랫동안 '나쁜 놈, 나쁜 놈.' 하던 소피가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다시는 골렘 안 타려고 했는데, 니 태도가 달라진 것 같아서 봐주는 거야."
"이제는 네 생각까지 느껴져. 엄청 정확한 건 아니지만……. 사실 벌써 깨있었는데 조금 가슴이 뭉클해져서, 부끄러워서 계속 자는 척 했어."
"변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베르제스."
***
리소테는 이 난리통에 어디서 구해왔는지, 잼까지 바른 부드러운 빵과 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빵부터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고마어'라는 인사를 하는 소피.
정말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양은 얼마 안 되지만, 평소보다 배는 복스럽게 먹는다.
제대로 씹긴 하는 건지 걱정도 되고, 전생에 먹었던 딸기잼 토스트의 맛이 생각이 나서 멍하니 쳐다봤더니 소피가 눈을 째릿 흘긴다.
안 줄 거야.
오, 오오.
소피가 말한 게 이건가.
흥미롭군.
"베르제스. 니 '그거', 사실 골렘이랑은 다른 거지?"
"그게 뭔데. 아, 그거?! 그거 골렘 아니였어?"
손가락에 묻는 잼과 빵가루까지 핥아먹으며 무심히 물어보는 소피와 반대로, 리소테는 입을 쩍 벌리고 되묻는다.
소피는 저런 모습을 조금 보고 배웠으면 한다.
중요한 사안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잡념을 없앤 뒤 생각을 떠올린다.
내 동체는 마법으로 만들어낸 골렘따위가 아니다.
그건 『메카』라는 것이다───.
"음? 잘 모르겠어."
자, 따라해보세요.
메. 카.
"이게 뭘까……. 꿈? 희망?"
약간은 다르지만, 나쁘지 않게 전달 된 것 같다.
통신 감도 둘둘 보통.
"뭔가 다른데……. 아무튼 좋은 거란 말이지?"
긍정.
"어? 무슨 얘기야? 둘이 지금 무슨 얘기 해? 나도 끼워줘~."
"하하. 별 거 아니야. 그냥,"
소피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천막을 나섰다.
바깥엔 급한 마음에 개방해놓은 채로 방치된 콕피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거 돌려받으러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