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1.45
* * *
소피와 리소테가 콕피트에 오르는 것을 기다린 후 동체 구성을 시작한다.
결국은 돌고 돌아 흙 동체인가.
성벽까지 이동한 후 비교적 반듯하게 가공된 돌을 빼내어 석재 동체를 구성해도 괜찮았겠지만, 긴급 상황에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몇 번 맞부딪쳐본 결과, 상대는 나보다 출력과 동체를 견고하게 붙잡고 있는 능력이 떨어졌다.
당연한 일이다.
내겐 지성이 생기고 난 후부터 마나 처먹고 동체만 만지작거린 경력, 역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노하우가 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되는 대로, 그냥 주변에 널린 대로 아무 거나 주워서 동체를 구성한 어중이떠중이와 비교당하는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을 정도다.
방금 전엔 소피를 직접 공격해서 당황했을 뿐이다.
녀석이 내 석재 동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흙 동체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베르제스랑 저 슬라임이 나를 두고 씨름을 할 때 저쪽에서도 느껴지는 게 있었어."
내가 소피의 마나를 사용하며 흙에서 동체를 일으키는 동안,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베르제스처럼 확실한 감정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슬라임이 어떤 놈인진 알 만했어. 사납고, 끔찍하고, 악의에 가득 차 있고."
"슬라임이 생각도 해?"
"생각, 보다는 그냥 그런 놈이었어.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 같은."
내가 사념파를 내보내듯이, 놈도 소피에게 무언가 영향을 끼치려고 한 것인가.
원본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슬라임이고, 동일한 공정을 통해 태어난 것이 개량 슬라임이다.
진화하는 방향성은 다르더라도, 어느 정도 공통되는 특징이 발현될 수 있는 거겠지.
"그런 놈을 가만히 놔둬선 안 돼."
소피의 말엔 나 역시 동감이다.
동체 구성을 마친 후 투영 마법을 사용하며 몸을 일으킨다.
지금까진 거대한 팔을 이용해 상체를 어느 정도 세운 채로 사족 보행하는 고릴라 형태였지만, 내 동체를 움직이는 데 충분히 익숙해진 소피에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 제대로 직립 보행을 하는 동체로 만들었다.
체고 8m.
관절의 수도 늘려 이전보다 훨씬 인간에 가까운 움직임이 가능하다.
일단 동체를 구성하는 게 우선이라 미관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건 단점이지만, 어차피 놈에게서 석재 동체를 돌려받기 전까지 사용할 가동체(???)다.
"가자, 베르제스."
긍정.
리벤지 매치다.
***
성벽으로 달려가는 동안 수많은 병사와 마주쳤다.
상대는 무한한 체력으로 날뛰면서, 무한히 동체를 재생시키는 개량 슬라임이다.
일반 병사가 전투에 참여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놈의 동체 소재가 될 뿐이겠지.
때문에 경보에 몰려와서 진영을 이루던 병사들을 후퇴시키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다.
하지만, 성벽으로부터 멀어지는 그들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감정의 배합을 살필 필요도 없다.
병사들은 공포를 느끼고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빨리.
소피의 마음이 급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내게 보내는 마나의 양이 늘어난다.
더 빨리.
무게 중심을 앞으로 기울인 채 전력으로 질주하는 소피의 조종 실력과 균형 감각은 이미 증명된 사항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바라보는 방향은 성문이 아니다.
할 수 있어.
예전엔 내 머리 위였던, 그리고 지금은 내 머리와 같은 높이인 성벽이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수십 톤에 달하는 흙더미를 끌어안고 저 성벽을 뛰어넘으라고?
땅으로 착지하면서 발생하는 충격을 오롯이 감당하라고?
할 수 있어.
아무런 추진체도 없이, 탄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동체를 도약시키라고?
베르제스라면 할 수 있어.
물론, 할 수 있다.
고대의 전쟁 중에 콕피트를 깎아내면서 떠올렸던 생각이다.
파일럿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
마음에 메카를 품고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성벽 너머로 느껴지는 놈의 위치를 표시한다.
소피는 투영 마법으로 보이는 표시에 따라 몸을 약간 틀고, 숙였던 상체를 점점 젖히다 완전히 일어서는가 싶더니,
확신과 함께 땅을 힘차게 박찬다.
날 수 있어!
날 수 있다.
[비, 켜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이전에 만들어두었던 외부 스피커를 최대 출력으로 가동시킨다.
훈련과 학습을 통해 사람의 언어를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됐지만, 슬라임의 청각과 사람의 청각이 같은 방식으로 자극을 수용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흉내내서 진동시키는 소피의 말과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내가 의도한 대로 들린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상관없다.
내용이 어떻게 들렸든, 하늘에서 날아오는 골렘이 내는 굉음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벽 위에 있던 마법사들이 몸을 바닥에 딱 붙이며 숙이고, 거대한 덩어리에 달라붙어 있던 기사들이 이탈하고, 정신없이 동체를 휘두르던 놈이 급변한 상황에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바라보는 순간.
수십 미터를 도약한 톤 단위의 질량은 전술적 충격으로 작용한다.
꽈앙─────!!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전력을 다 했음에도 흘려내지 못한 충격이 콕피트를 뒤흔든다.
리소테가 몸을 둥글게 말고 아무렇게나 비명을 지른다.
기절까지 가지 않고 타박상 정도로 끝낼 수 있으면 성공이다.
기껏 만들어놓은 흙 동체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지만, 녀석도 마찬가지니 상관없다.
짧은 시간 동안 녀석이 구축해놨던 동체를 분석한다.
약간의 모래, 피와 살과 뼈, 갖가지 무구와 갑옷.
내 바위 동체는 어디로 갔지?
놈의 동체 소재가 될 수 있는 몬스터의 시체를 깔끔하게 태워놓았던 모래사장에 곳곳에 바위와 돌이 눈에 띈다.
그 짧은 사이에 아주 박살을 내놓으셨구만.
마법사의 지원을 받는 다수의 기사와 근접전을 벌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그래도 깔끔하게 절삭된 상태를 예상했는데, 잘게잘게 부서진 부분이 많군.
기존에 퍼진 내 정보와 토벌 기간 동안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기사들이 둔기, 방패, 건틀릿 따위로 대놓고 때려 부순 게 틀림없다.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전술이다.
그럼에도 놈에게 당해 기사의 시체와 장구류가 동체의 소재로 활용된 것은 나쁜 소식이다.
수일간 지속된 토벌이 끝나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술을 들이 부었으니, 기사 중에서 제 힘을 내지 못하고 당하는 자들이 차례차례 나왔겠지.
기사끼리 지지고 볶고 해서 놈을 처리해주는 상황은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드래곤마저도 트롤로 지연전을 펼치며 퇴각할 시간이나 벌었던 대상이 개량 슬라임인 것이다.
하지만, 전황이 내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다.
녀석은 이전보다 성문 방향으로 훨씬 전진한 위치에 있고, 오러에 피해를 받으며 기사와 드잡이질을 한 것치고는 쌩쌩한 편이다.
가설 1.
녀석은 마나, 오러에 이어 신성력마저도 약간의 동력으로 변환시키며 기력을 회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성벽 위의 사제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신성력을 수 차례 투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설 2.
내가 사념파와 동체 가공의 정밀도에 특화했듯이, 녀석은 본체 회복과 오러 면역에 특화됐다.
판단할 근거가 적은 지금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성벽에서 신성력이 추가로 투사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녀석보다 출력은 높아도 지속력은 떨어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단기전으로 가야한다.
놈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전투가 질질 끌리게 되면 이쪽에 승산은 없다.
"베르제스. 내 마나를 모두 가져다 써도 좋아."
소피가 말한다.
이전 같았으면 거부했겠지만,지금은 다르다.
기수(?手)의 자격으로내리는 명령을 거스르는 메카라면 무인기로 운용하는 게 골백번 낫다.
소피, 그녀는 내 파일럿이다.
"리소테. 강화 마법."
"으…윽. 지금은 무리야……."
"천장에 그려놓은 마법진이 있잖아."
"그, 그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구!"
"괜찮아. 베르제스가 어떻게든 해 줄 거야."
"쟤가 어떻게 뭘 해!"
어떻게라니.
당연히 할 수 있다.
'상식' 중의 상식이다.
파일럿이 있고, 메카가 있고, 테스트가 끝나지 않은 신기능이 있다.
이건 실패할래야 실패할 수가 없다.
반드시 성공한다.
'할 수 있지?'하며 묻는 소피에게 긍정의 사념파를 보낸다.
"너흰 마법을……. 에이, 몰라! 진짜 한다? 아난그티아드의 축복을 받아……."
흙 동체가 박살난 와중에 금이 간 정도로 버텨낸 석재 콕피트부에 모래를 대충 발라 때우고, 주변에 짚히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끌어모아 사지를 구축한다.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동력으로 끌어오는 소피의 마나량을 확연히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동체를 구성하는 속도가 녀석이 반 박자 정도 빠르다.
말뼈다귀에게는 말뼈다귀의 방식이 있다는 것인가……!
"흥!"
녀석이 먼저 몸을 일으켜 팔을 뻗어오지만, 소피는 드러누운 채로 미리 완성된 좌완부를 들어 막아내고 한창 구축중인 오른다리로 놈을 걷어찬다.
불안정한 자세에 힘을 싣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허무하게 중심을 잃고 조금 떨어진다.
슬슬 파일럿 경력 일 년을 채워가는 소피는 거대한 몸체로 싸우는 느릿한 전투 템포에 이골이 났으며, 체감상 내 출력은 놈보다 30%를 웃도는 출력을 낼 수 있다.
녀석도 나면서부터 대형 몬스터와의 전투를 이어가긴 했겠지만, 개량 슬라임은 되돌릴 수 없는 순간순간의 판단에 대한 리스크가 제로에 가깝다.
본체가 어지간해선 상처를 입지 않으니.
기회 비용은 있을지라도, 실제 손해는 없는 전투를 통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빛나는 모습이 현현, 꺄악!!"
"괜찮아!"
이제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에 놈이 방금 전처럼 본체를 뻗어오며 내 동체를 장악하려 든다.
같은 수에 두 번이나 당하진 않는다.
놈은 나보다 동체 장악력이 딸린다.
오히려 동체를 들이밀며 놈의 동체를 장악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동체를 단단히 굳혀 본체를 속박한다.
"하아아아아앗!"
서로의 동체를 꽉 붙잡은 상태에서 무게 중심을 가늠해 들쳐메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는다.
부드러운 모래가 사방으로 퍼지지만 크게 데미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동체에서 느껴지던 '마나 탱크'의 부재와, 자신의 동체가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 놈이 크게 당황한 것이 겉으로 드러난다.
문득 떠올라 시험해봤는데 생각보다 잘 먹혀들었다.
지금 내게 장악당한 놈의 동체는 본체를 가두고 있는 감옥이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모멘터리 에피파니!"
리소테의 영창이 끝나고 마법진에 빛이 일렁인다.
원래대로라면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강해야 하고, 그것이 점점 커지며 내 동체 곳곳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그녀의 말대로 소형화해서 내 콕피트 천장에 새긴 마법진은 아직 미완성이고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리미터 해제는 실패하지 않는다.
나와 생각을 공유하며 메카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고, 리미터 해제에 대한 개념을 어렴풋이 알게 된 소피와 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다만 계기가 필요했을 뿐.
불타오르는 분노와 투지.
동시에 호수처럼 흔들림 없는 마음.
미지의 초능력.
엔진을 점화.
급상승하는 RPM.
증기를 뿜어대며 신체에서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정신의 각성과 함께 수수께끼의 에너지가 응축되고 폭발하는 그것!
"터트려!!!"
"꺗! 뭐야? 뭐야!!"
내 동체 주위로 충격파가 발산된다.
마치 구멍이 뚫린 것처럼 소피의 몸에서 내게 마나가 콸콸 쏟아진다.
아니, 내 본체가 그녀에게서 뽑아내는 걸지도 모른다.
사지로 뻗은 본체를 따라 흐르는 마나를 주체하지 못 하고 놈에게 달려들어 마운트 자세로 상체를 짓누르며 주먹을 내뻗는다.
쾅!
분명히 모래사장인데, 이상한 소리가 난다.
쾅!
모래와 모래 사이에 샌드위치된 놈의 본체를 때리는데, 손끝에 느낌이 온다.
쾅! 쾅! 쾅! 쾅!쾅!쾅!쾅!
버스트 모드.
할 수 있다.
이거라면, 터무니없는 내구력을 지닌 개량 슬라임에게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이 땅에서, 사라져버려!!!!"
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