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1.46
* * *
"하아, 하. 하아."
사방을 뒤덮은 모래 폭풍 속에서 소피는 어깨로 숨을 쉬며 다시 한번 주먹을 들어올렸다.
부정.
"베르제스? 왜 막는 거야."
끝났다.
"응? 끝이라고?"
긍정.
방금 전 거대한 한 방으로 놈의 반응은 사라졌다.
거대한 크레이터 안에 있는 건 모래 뿐이었다.
"소피! 이긴 거야? 우리가 이긴 거야?"
"이겼다고? 해치운 거 맞아?"
긍정.
"하. 하하. 그렇구나. 다행이네......."
소피가 콕피트 등받이에 몸을 파묻는다.
긴장했던 근육이 풀어지고 그녀의 호흡이 천천히 안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마나의 소비가 컸다.
버스트 모드를 해제하니 봇물 터진 듯 흘러나오던 그녀의 마나가 잠긴 수도꼭지에서 새어나오는 물방울 정도로 줄어들고 말았다.
부나따쉬토라는 체질에 대해서 아는 건 적지만, 그녀의 몸이 생명에 위협이 가지 않는 수준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마나 방출을 줄인 듯했다.
확실히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적을 마무리지을 때 그런 식으로, 사라지라고 외쳐선 안 된다.
녀석이 최후의 발악을 하며 소피를 길동무 삼으려 했다면 소피는 정신이 붕괴해서 폐인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피가 희생당한 기사들의 힘을 빌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앞으로 상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속박할 땐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자.
"소피? 소피, 자? 자는 거야?"
긍정.
"아, 그렇구나."
리소테가 자신의 입을 막으며 작은 목소리로 '베르제스. 수고했어'라며 웅얼거린다.
그녀로서는 할 말이 많겠지.
지금까지 흉내도 못 냈던 마법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성공 시켰는지.
하지만 이전에도 그랬듯이, 리소테가 원하는 것을 얻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메카가 위기를 극복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고차원적인 대화를 할 수단도 없고.
적당히 꾸물거리다보면 적당히 납득하거나 포기할 것이다.
"어, 어이! 저기 봐!"
"누구야! 저거 어느 쪽이야!"
자욱한 모래먼지가 조금은 가라앉으며 가까이 있는 기사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저쪽도 아직 우리를 제대로 식별할 순 없겠지.
소피 대신 천천히 동체를 일으킨다.
최후의 일격이 어찌나 강했는지 성벽이 보이질 않는다.
수분을 머금었을 모래가 이렇게 먼지를 날리는 것은 내 이미지 탓일 것이다.
강력한 일격엔 폭발과 연기, 후폭풍이 있어야 한다.
때문에 사출 마법을 만들 때에도 마법의 실제 기능과는 무관한 사격의 반동과 흙먼지를 구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 그렇게 한 번 만들어놓으니 버스트 모드에도 영향을 미친 듯했다.
소피가 수면 상태인 게 아쉽군.
조금 더 원활한 소통이 가능해졌으니, 그녀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게 참 많다.
소피는 아직 젊고 성격이 불 같아서 불필요한 것의 미학과 기다림의 미학을 모른다.
전자는 눈으로 보여줄 기회가 있으면 쉽게 이해시킬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엔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면 알려주기가 쉽지 않다.
먼저 행동하는 자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확률은 높지만, 때로는 상대가 먼저 행동하길 기다려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기다린다.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들이 우리를 확인할 때까지.
의문을 담은 채 내 눈치를 보는 리소테를 납득시킬 순간이 올 때까지.
"저건……골렘이다!"
"영창 중지! 영창 중지!"
'놈은, '혐오스러운 것'은 어디냐!"
시야가 조금 더 확보되며 내 동체를 식별한 기사들이 저마다 바쁘게 외친다.
'혐오스러운 것'인가.
놈에게 딱 들어맞는 명칭이다.
하지만, 초진부터 이명이 붙었다는 사실엔 조금은 부러움을 느낀다.
소피의 '슬라임 입고 다니는 애'보다 나은 별명이기도 하다.
성벽의 탐조등 불빛이 점점 약해진다 싶었더니, 수평선에서 해가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하늘에 붉은빛이 감돌며 새벽이 밝아오고 온다.
딱 좋은 때다.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올린다.
"설마……."
"……이겼다고?"
완전히 맑게 갠 모래사장에서 등 뒤로 태양 빛을 받으며, 나는 기다린다.
무거운 기쁨의 감정.
성취감, 달성감의 배합이 저들에게 퍼질 때까지.
"해냈어! 해냈다고!"
"골렘팀이 '혐오스러운 것'을 무찔렀다!!"
가을이 끝나가는 어느 날.
환호성이 울려퍼지는 해안가에서.
인형 병기.
이세계에 서다.
***
주둔지까지 걸어가 콕피트를 열자 병사들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와 소피를 찾았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곤 잠깐 소란이 일었지만, 입 앞에 손가락을 세우며 '쉿, 쉿!!' 하는 리소테 덕분에 소피가 잠에서 깨진 않았다.
병사들은 신속히 사제를 납치해왔고, 사제는 당황하면서도 소피를 이리저리 살핀 후 많이 지쳤으니 요양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곤 다시 환자를 보러 돌아갔다.
소피는 병사에게 업혀 병상에 누웠지만, 잠시 후 지휘관과 영주 아들이 포함된 무리가 찾아와 그녀를 주변의 거점 도시로 옮겼다.
결국 도착한 곳은 도시의 숙박 시설이었다.
그렇게 난리가 나고, 이리저리 옮겨질 때까지 소피는 세상 모르고 잠을 잤다.
리소테는 하루 종일 소피의 곁에서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상태를 살폈다.
그녀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은 이상한 행동을 하지만, 소피가 그녀를 동료로 받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리소테가 없었다면 토벌의 행군 단계부터 온갖 문제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고, 내 동족에게 결국은 패배했을지도 몰랐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리소테가 무언가를 부탁했을 때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했다.
소피가 잠에서 깬 것은 그날 한밤중이었다.
꼬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으, 음? 으응?"
"……파."
"응? 소피? 소피, 정신이 들어?"
"배고파!!!"
소피는복통을 동반한공복감을 호소하며 잠이 덜 깬 리소테를 닦달했다.
평소엔 배려심이 있는 소피였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떼를 쓰는 걸 보면 정말 상태가 심각한 듯했다.
한밤중에 들리는 소란에 옆 방에서 대기하던 기사가(그냥 투숙객인 줄 알았는데 무려 불침번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야참으로 챙겨둔 육포를 빼앗겼다.
하지만 소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침대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 하는 그녀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연신 '배고파…….' 하며 신음했고, 보호 본능에 불이 붙은 리소테는 소리를 빽빽 지르며 자신이 소피에게 당했던 짓을 기사와 여관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소피는 꾀병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의 연기가 너무 실감나서 몸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던 나 역시 깜빡 속아넘어갈 뻔했지만, 기사가 아마도 전투 지휘소에서 당직을 서는 동료들에게서 얻어왔을 각종 야식들을 입에 넣을 땐 평상시의 운동 능력을 보여줬다.
그렇게 멀쩡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게 눈 감추듯 먹고 난 뒤엔 또다시 침대에 푹 쓰러지며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면 얼굴이 꽤나 두꺼운 면이 있었다.
기사가 바깥을 한 바퀴 더 돌며 동료와 병사들에게서 징발해온 음식을 먹고, 여관 주인이 급하게 데운 스프를 대접으로 후루룩 마신 뒤에는 자기 스스로도 우스운지 실실 웃음이 섞였지만 병자 행세를 멈추지 않았다.
해가 뜰 때가 되어 교대로 온 불침번이 더는 음식을 구해올 방법이 없다며 항복하고, 여관 주인은 아침을 준비해야 한다며 주방에 틀어박히고 나니 침대에서 일어나 배식을 받으러 임시 막사로 가려고 하기까지 했다.
자리의 모든 인원이 한 마음으로 말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리소테의 부축을 받으며 터덜터덜 도시를 떠나 걸어가는 꼴을 볼 뻔했다.
기사가 한숨을 쉬며 식사를 여관 방으로 조달할 수 있도록 전달해두겠다고 한 후 복귀했다.
소피가 많이 먹는 건 이미 어느 정도 소문이 난 모양이지만, 버스트 모드로 마나를 쥐어짜낸데다 개량 슬라임과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회식 때 먹은 음식을 전부 게워낸 상태라는 사실은 모를 수밖에 없으니 기사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음식을 몇 인분 준비하면 되겠냐는 물음에 굳은 의지가 담긴 '많이요. 됐다고 할 때까지. 최대한 많이.' 라는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소피는 아침 배식과 배식 후 남은 음식, 그리고 점심 배식까지 먹고 나서 다시 잠에 빠졌다.
중간에 영주 아들이 소식을 들었는지 잠깐 얼굴을 비추러 왔지만, 눈을 마주친 리소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아무 말 없이 스프와 함께 빵을 마셔버리는 소피를 잠깐 구경한 후 돌아갔다.
분명히 소피가 지금 앉은 자리에서 해치운 음식들이 그녀의 체중의 절반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그게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소피는 그렇게 먹고 배가 아주 약간 불룩해졌을 뿐,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대체 소화 과정이 어떻게 되는 거지.
그야말로 이세계의 신비였고 여성의 불가사의였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양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소피의 마나는 언제 음미해도 달콤하고 청량했다.
***
"베르제스."
저녁 쯤에 잠에서 깬 소피가 몸을 꼼지락 거리다 소근소근 말을 걸었다.
"나 마사지해줘."
마사지인가.
파일럿의 신체와 정신을 케어하기 위해 시작했던 행동이지만, 소피가 점점 마사지에 심하게 빠져드는 것 같아 최근 자제하던 중이었다.
처음엔 그저 오감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종류가 한정된 이세계이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다.
이곳은 음식의 맛을 살릴 조미료도 부족하고, 영상은 커녕 아름다운 그림이나 건축물도 아무때나 손쉽게 접할 수 없으며, 감동을 주는 음악이나 부드러운 옷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공기는 신선하고 맑지만, 원래부터 그런 세상에서 태어난 소피가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진 않을 것 같았다.
전생에 비하면 유흥거리 자체가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부족한 세상인 것이다.
사람이 무인도에 갇히면 배변 활동에서 오는 쾌감마저도 소중한 오락으로 다가온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기 때문에, 소피가 내 마사지를 좋아하는 것도 그냥 비슷한 맥락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소피와 조금 더 정신적으로 연결된 지금 보니까 조금…….
"그, 그런 거 아니거든!"
이젠 강한 부정까지 한다.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해서. 나 너무 힘들었어. 요새 너무 안 해줬잖아."
애원 작전인가.
확실히 매일 같이 그녀의 몸을 풀어주던 때에 비하면 최근 빈도수가 많이 줄기는 했다.
나도 한 때 인간이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얻었을 때의 기쁨이 큰 만큼 잃었을 때의 슬픔 역시 크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줬다 뺏는 건 너무하지.
격전으로 몸을 축내기도 했으니, 그녀에게 일종의 포상을 주는 것도 필요한 수순이다.
"해, 해주는 거지? 그럼 지금 리소테 자니까……."
"언니 안 잔다."
"꺅!"
……다음에 적당한 기회가 생기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