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1.47
* * *
"마왕이요?"
"음? 아아. 그래. 마왕이다."
기운을 찾아 이제 병상에서 일어나려는 소피에게 찾아온 공작이라는 작자가 언급한 말이었다.
"매번 하는 협박이지. 신경 쓸 필요 없다. 잊을 만 하면 뜬 구름 잡는 소리나 하면서 헌금을 뜯는 게 그네들 하는 일이거든. 별것도 아닌 걸로 겁을 주면서 영지민들의 피와 땀을 갈취해가는 자들이 버젓이 버티고 있으니 골치가 아파."
공작은 '그놈의 신성력만 아니었어도.' 어쩌고 하며 구시렁대다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떠나갔다.
왕국 서부를 주름잡는 공작이라고 하더니 나이도 영주 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말을 꺼냈을 때 반응이 좋은 젊은 아가씨들과 용건 외의 수다를 한바탕 떨고 갈 정도면 그렇게 바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작위가 세습제라 그냥 목에 힘만 주고 '에헴' 하고 있으면 주변에서 일을 알아서 해결을 해주는 건지.
이미 컨디션을 회복한 소피를 위해 이런저런 포션이나 귀한 과일,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금화 주머니 따위를 들고 온 데다 토벌의 공로를 인정해서 후한 보상을 내릴 것까지 약속한 걸 보면 생각보다 정이 많거나 외로움을 타는 타입일지도 몰랐다.
"응? 베르제스, 진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소피의 인상은 달랐나보다.
"공작님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던 거야."
소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게 그거 아닌가?
"뭐어어!? 그런 거였어?"
리소테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입을 가린다.
"공작님이 소피를 눈독들이고 있다구!?"
"아니, 그게 아니라……."
"공작님은 소피의 성향을 판단하신 거다."
슬슬 리소테의 취급에 감을 잡은 영주 아들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배가 산으로 가기 전에 방향을 되돌린다.
나였으면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 시작했을 텐데.
"아무래도 개인이 너무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 특히 소피는 집락촌에서 살다가 갑자기 본 적도 없는 골렘을 끌고 나타났으니, 남들 입장에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그동안 내가 여러 차례 말씀도 드리고, 네가 병사들과 지내며 생긴 평판도 있어서 지금까진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혐오스러운 것'을 직접 퇴치한 뒤론 상황이 조금 바뀐 거지. 남의 말만 듣고 덮어둘 수만은 없게 된 거다."
사람들에게 소피는 마법도 통하지 않고 오러 내성도 강한 상대를 단시간에 해치운 실력자다.
능력의 특수성을 따지면 고대 병기 조금 아랫줄로 분류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뒷조사에 멈추지 않고 직접 만나러 올 것은 나도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공작의 화법이 두서가 없었고 소피에게 어떠한 대답을 끌어내기보다는 자기 하소연이 많았던 것 같은데…….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다 귀찮아져서 포기한다.
소피와 영주 아들이 저렇게 말을 하니, 상식이 있고 눈치가 있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의지가 박약한 슬라임에게 고등생물간의 은근한 줄다리기나 미묘한 신경전 같은 건 진지하게 고찰하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다.
영주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래도 소피가 공작님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다'라고 한 말에 리소테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해서 맥이 빠지기도 하고.
그것보단 마왕 이야기에 흥미가 간다.
그 녀석, 초진부터 나보다 멋지고 강해 보이는 이명을 얻는다 싶었더니 무려 등장하기 전부터 신탁으로 지명된 마왕의……뭐라고 했지?
어쨌든 임팩트에서도, 존재감에서도 완벽하게 패배했다.
물론 시체와 뼈를 통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등장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그래도 아쉬울 따름이군.
놈이 마왕으로서 제대로 각성해서 활동하게 되는 게 언제일진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도 지명도를 차근차근 쌓아올려야겠다.
"친구 생각하고 있구나. 그렇게 죽이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베르제스. 그놈은 살려둬선 안 됐어."
소피가 여느때처럼 내 본체를 쓰다듬는다.
이 새로 생긴, 생각을 공유한다는 능력은 정말 간단하거나 강한 의지를 담지 않은 경우엔 정밀도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내가 놈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호의나 그리움 따위가 아니다.
낮은 지능과 터무니없는 내구도 탓에 개량 슬라임은 번식 본능이나 동족의식이랄 게 전혀 없는 족속이다.
가끔은 자기보존 본능도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나만 해도 나보단 소피가 중요하고, 내가 만약 죽게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살다 죽으면 죽는 거지' 정도의 감상밖에 느끼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 전쟁 중 가사 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그랬고.
애초에 그런 추잡한 놈이랑은 친구 먹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놈은 죽지 않았다.
버스트 모드의 타격으로 놈의 본체에 피해를 입히는 덴 성공했지만 최후의 순간에 놈은 본체의 일부분을 흩뿌리며 바다로 도망쳤다.
그런 식으로 동체에서 긴급 탈출하는 건 나도 처음 봤다.
드래곤과 악마에게 당해서 기능이 정지되거나 반 병신이 된 동족의 케이스를 떠올려봐도 비슷한 사례조차 없다.
그 정도는 해야 마왕의 뭐시기로 인정받는 건가.
산산조각이 난 본체로 뭘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봤자 수면에 떠다니며 흡수하는 마나로 천천히 회복하는 게 고작일 뿐.
그마저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예상할 수 없다.
놈이 나보다 본체를 회복시키는 능력이 좋은 것 같긴 하지만, 오랜 시간 대형 몬스터에게 먹혔다가 소화되지 않고 배출되기를 반복하는 와중에 생각을 멈추고 단순한 점액질 덩어리가 될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공작이 제국의 대신전에서 내려온 신탁을 개풀 뜯어먹는 소리로 치부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우연에 우연이 겹쳐 놈이 다시 육지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때쯤이면 단분자 커터나 대구경 입자포를 맛보게 되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
토벌이 종료된 후 삼일 째 되는 날에 임시 막사로 나가보자 이미 막사의 철거가 상당 부분 진행되어 있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일정이고, 각자 갈 길도 머니 하루빨리 해산하는 게 맞는 거겠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제 병사들을 모아놓고 정식으로 토벌 종료를 선언했다고 한다.
남은 건 각자 할당 된 구역을 정리하고 복귀하는 것 뿐이다.
"하아. 정말 다 망가졌네."
우리 일행에게 맡겨진 임무는 내 동체 주변과 모래사장에 나뒹굴고 있는 석재 동체 및 파일 벙커 잔해의 처리였다.
전투가 끝난 직후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콕피트 구석구석에 금이 가거나 갈라진 흔적이 눈에 띄었다.
충격을 받을 때나, 화염 마법을 뒤집어 쓴 뒤에 바닷물에 뛰어들었을 때 조금씩 데미지가 쌓여간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손상된 건 버스트 모드의 탓일 것이다.
마나가 콸콸 쏟아지니 신나서 출력을 높인 대가를 결국은 치르게 되는구나.
리소테의 마법을 걸고 전투를 치러본 적은 없지만, 시범 기동을 했을 때엔 분명히 이런 현상을 보이지 않았다.
버스트 모드는 정말로 긴급한 상황에서만 사용하고, 전투력 강화는 리소테의 마법을 기본으로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콕피트의 흠집은 모래와 흙으로 때운 뒤에 동체를 재구성하고, 지금까지 흙 동체를 일으켜 세웠던 장소로 찾아가 푹 꺼진 땅을 대충 평탄화 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나 많이 잡아먹혔다.
거대 거북 토벌은 50년 간격으로 한다지만 그동안 도시 주변의 땅을 놀려놓을 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토벌 전에 했던 보수 작업 외에도 이곳에 주둔하는 병력들이 수시로 보수 작업을 하거나 군사 훈련 같은 걸 할 수도 있다.
싸웠던 몬스터 중에선 다리가 달린 놈도 꽤나 있었으니 바다의 몬스터가 육지로 상륙하려 드는 일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고 봐야 하니, 이런 큰 구덩이를 방치하고 떠나가는 건 아무리 고용된 모험가라고 해도 확실히 싹수가 없는 짓이겠지.
하지만 작업은 즐거운 편이었다.
먼저 콕피트를 겨우 지탱할 수 있는 작은 동체를 구성해 뒤뚱뒤뚱 걸어가서, 다른 곳에 비해 지대가 높은 동산에서 거대한 동체를 구성한 후 구덩이를 메우는 과정을 넋놓고 쳐다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 중엔 소피와 이야기를 나눴던 병사들도 있었고, 그들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할 때마다 소피도 외부 스피커를 통해 인사했다.
스피커는 소리를 내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나와 소피 사이에 아직 작동 신호를 정한 게 없어 외부로 흘릴 음성을 고르는 건 순전히 내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개선해야 할 점이었다.
버튼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결국 모래사장으로 나가 석재 동체(였던 것)를 처리하는 도중에 해가 지고 말았다.
석양을 바라보며 돌덩이를 바다 멀리 던지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이게 얼마 짜리였는데.
급해서 버리고 갔더니 귀하게 쓰는 것도 아니고 대충 막 굴리다가 그냥 다 부숴먹어?
다음에 놈이 육지로 돌아오게 되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이기로 결심했다.
개량 슬라임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 자체가 많지 않지만, 시간이 많으니 한 두개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간중간 섞여 있는 파일 벙커의 잔해는 도로 챙겨가서 재활용 해보려고도 했지만, 오러에 절삭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상한 빛깔로 변질된 것들이 많아 죄다 바다로 던져버렸다.
대체 무슨 마법을 맞았길래 쇠가 저렇게 기분 나쁘게 영롱한 빛을 내는 건지.
하지만 덕분에 내 동체 소재별 약점을 알게 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영지로 돌아가는 도중에 소피와 상의하고, 도착하면 난쟁이에게 조언을 받아 새 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동체를 만들지는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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