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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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업은 모두 끝났지만 행군 도중 만났던 영지군과 돌아가는 길에도 함께 복귀하기로 협의가 되어 하루의 휴식이 추가로 주어졌다.
소피는 그들의 작업도 도우려 했지만 영주 아들과 젊은 기사가 만류했다.
예정대로 진행되면 이른 오후에 정리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듯하다.
날이 밝은 후 소피는 리소테의 손을 잡고 거점 도시를 돌아다녔다.
같은 도시로 분류된다곤 하지만, 별 다른 특산물도 없고 지리적 위치가 좋지 않아 물류 사정도 열악하며 주민들의 생업도 군사와 관련된 경우가 많은 거점 도시는 우리 영지의 도시보다 구경 거리는 없으면서 물가는 비쌌다.
하지만 내가 바다로 입수했을 때 가방의 일부분이 물에 젖어 못 쓰게 된 생필품이 있었기에 기회가 있을 때 이것저것 사두려는 것 같았다.
정말 필요한 것은 함께 행동하는 영지군에게서 나눠받을 수 있겠지만, 돈 좀 아끼겠다고 남에게 손을 벌릴 이유도 없었다.
내 동체를 모두 강철로 바꾸려던 계획하고 있었지만 결국 파일 벙커 두 자루에 그치고 말았던 소피에겐 돈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한창 때 여자 두 명이 작심하고 쇼핑을 시작하자 하루가 정신 없이 지나갔다.
뭐가 그리 신기하고 궁금한 게 많은지.
낙엽이 굴러가도 웃을 때라고는 하지만 소피와 리소테가 서로 상승 효과를 일으키며 뿜어내는 에너지에 상인들의 기가 눌리는 게 눈에 보였다.
실제 가격이 귀금속에 가까운, 자그마한 조개 껍데기나 소라 껍질로 만든 장신구를 대단한 보물이라는 듯이 대하며 살까 말까 고민할 때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굳이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일행이 언제 다시 바다로 올 지 몰랐고, 함부로 바다에 들어갈 수 없는 이 세계에선 저런 것들이 정말 귀한 물건에 속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패류로 만든 장신구 가게가 장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도시 주민들에겐 어떠한 공급 라인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런 걸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다.
관광지에서 타지인에게 눈탱이를 때리는 건 어디든 똑같은 것이다.
사람의 인생은 한번뿐이고 시간은 유한하니 다 알면서도 적당히 넘어갈 뿐.
이럴 줄 알았으면 바다에 들어갔을 때 동체에 해양 생물의 시체 따위를 붙여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건 좀 구질구질한 짓 같았다.
기억해뒀다가 소피가 특수한 채집 의뢰를 맡았을 때 시도해 보도록 하자.
리소테는 파티에 합류한 후 이번이 첫 의뢰였기 때문에 소피만큼 돈이 많지는 않았다.
마법사인 특혜로 모험가 급수는 높았지만 이전에도 돈이 되는 의뢰보다는 개인적으로 흥미가 가는 연구나 조사를 주로 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뢰를 위해 원정을 나갈 때부터 마법적인 물품을 준비해야 하는 마법사는 비교적 쓰는 돈이 많기도 하고.
소피는 그런 리소테를 위해 옷을 몇 벌 사줬다.
리소테는 거절하려 했지만 목숨을 살려준 대가라며 억지로 그녀의 품에 로브니, 평상복이니 하는 것들을 안겨줬다.
나름 값이 나가는 옷을 받아든 리소테는 미안해하는 눈치였지만, 어차피 이번 토벌의 의뢰비가 정산되면 이 정도 옷값은 신경도 쓰지 않을 만큼의 돈이 들어올 것이다.
소피는 고깔 모자까지 사주려 했는데 지금 리소테가 쓰고 있는 녹색 모자는 스승이 물려준 모자고, 수련을 마칠 때까지 함부로 바꿔선 안 된다며 딱 잘라냈다.
마법사끼리의 문화거나 단카프루그의 학풍인 것 같았다.
그 외에 특기할 점은, 소피가 책을 샀다는 것이다.
내 요청으로 글 공부를 했을 때에도 나와 가정 교사만 같은 공간에 방치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참여한 감이 있었고, 실제로 학업 성취도가 아주 높진 않았는데 그녀가 나서서 책을 산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판형이 아주 크고 삽화가 잔뜩 들어간 몬스터 백과 사전.
손 때가 잔뜩 묻어서 너덜너덜해진 중고 서적이었지만 이 세상엔 아직 인쇄 마법 같은 건 없는 탓에 책이란 건 기본적으로 비쌌고, 내용도 내용인데 두껍고 질긴 종이에 작은 밥상으로 써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크게 만들어진 백과 사전의 가격은 쩍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책을 이리저리 들춰본 리소테의 말에 따르면 소피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구판이라는 것 같은데도 서점 주인의 표정엔 미동도 없었다.
이곳은 군사 도시니 저런 몬스터와 관련된 전문 서적의 최신판은 분명히 이 도시 안에 몇 권인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지휘 본부 같은 곳에서 오랜 기간 보관하다 새 책으로 교환하는 김에 이곳에 처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서점 주인은 그걸 받아 반쯤은 한 놈만 걸리라는 심보로, 반쯤은 장식품으로 진열해 둔 거겠지.
책장에 꽂혀있지 않은 거대한 책은 확실히 눈길을 끈다.
우리 영지 방어구점의 마법 갑옷과 비슷한 상품일 것이다.
그리고 소피는 불합리하게 보이는 가격에 개의치 않고 그 책을 샀다.
토벌 중 기사들이 보였던 공략법 중심의 전투에 무언가 자극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일행은 이미 손에 짐을 어느 정도 들고 있는 상태라 책은 내 본체에 붙여 소피의 등에 고정시켰다.
크기도 그렇고 가격도 그렇고, 방패를 지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됐다.
두께도 상당히 두꺼워 일반인이 휘두른 칼 정도는 한 두번 막을 수 있어보였다.
리소테와 소피는 마지막으로 해가 지는 해안가를 눈에 담아둔 뒤 영주 아들이 식사를 샀던 고급 음식점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소피가 드물게 술을 먹고 싶어 했기에, 큰 고비도 무사히 넘긴 참에 이전보다 그녀를 존중하기 위해 긍정의 사념파를 보내고 그녀의 몸에서 잠깐 떨어졌다.
내 예상대로 소피는 술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체력이 좋은 사람은 그만큼 술이 강한 인상이 있었지만 어디든지 예외는 있는 법이다.
몇 잔을 마셔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리소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소인족도, 난쟁이만큼은 아닐지라도 술이 제법 강한 편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다.
리소테는 혼혈이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보다는 술이 강한 편일 것이다.
알딸딸하게 취한 소피는 자기 혼자 취했다는 게 마음에 안들었는지, 따로 의자 위에 올라탄 내 본체에 술을 쪼르르 부었지만 별다른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알코올에 영향을 받는 몸이라면 평소 소피의 노폐물이나 분비물을 처리했을 때에도 내 감각에 걸리는 게 있었을 것이다.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은 술에 취한 소피의 마나다.
따끈하게 달아오르고, 어딘가 말랑말랑해지고 끈적해진 느낌이 드는 소피의 피부도 조금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적당히 취했을 때, 그런 소피의 피부를 자꾸 꾹꾹 누르거나 쓸어보고 싶은 욕구가 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몰랐던 내 은밀한 취향이다.
꾸물대는 내 움직임에 맞춰 몸을 꼼지락대는 소피를 보던 리소테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우리와 방을 따로 잡았다.
***
날이 밝아 복귀 행군이 시작됐다.
소피의 요청으로, 동체는 이전의 형태를 버리고 제대로 된 직립 보행을 하는 동체로 고정하기로 했다.
그녀가 조종에 익숙해질수록 인간의 몸과 비율과 구조가 다른 동체를 움직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소피와 내가 만났을 때부터 사족 보행을 기본으로 한 동체만 구성했다보니 동체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한 것 같았다.
소피는 성격이 밝고 명랑하면서 동체 조종엔 겁이 없고 거침이 없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해선 은근히 눈치를 살피는 면이 있었다.
전생에도 사회성이 밝은 사람들이 눈치껏 말을 아끼거나 불만이 있어도 적당히 쉬쉬하는 면이 있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을 따박따박 하고 다니는 건 나나 리소테 같은 타입이 많았지.
하지만 그런 소피라도 할 말은 했다.
올 때엔 군말 없이(그녀 기준으로) 성실하게 동체를 조종했던 소피였지만 갈 때에는 나더러 동체를 움직이라고 '명령'했다.
확실히 소피는 필요하다면 끔찍하게 지루하고 피곤한 전술 기동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
한 번 한 것을 두 번을 못 하랴.
소피도 나 혼자서 동체를 일정 수준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도 끝끝내 행군을 끝마쳤으니, 정말 최악의 상황이 닥쳐서 장기간 쉬지 않고 동체를 움직여야 할 때가 오면 행군 때보다 더욱 끈기 있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내가 긍정의 사념파를 보내자 소피는 '그럼. 그래야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거대한 백과 사전을 턱 펼쳤다.
정말 하기 싫었나보다.
설마 큰 돈을 들여 책을 산 게 행군 중에 조종을 하기 싫어서 명분을 만든 건 아니겠지?
올 때도 그랬지만, 돌아갈 때에는 행군 중에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드보어가 평야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것은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인 듯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몬스터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게 아니라 행군 계획 단계부터 무언가 대책을 세워놓고 상황 발생과 함께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겠지.
덕분에 소피는 소피대로 리소테의 도움을 받으며 백과사전을 순조롭게 읽어나갔고, 나는 나대로 동체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정리할 수 있었다.
흙과 바위와 강철.
가시권 안으로 들어온 동체들은 모두 제각각 장단점이 있다.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손쉽게 구성할 수 있으며 원하는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지만 내구도가 한참 떨어지고 동체를 유지하는 데 추가적인 마나를 소비하는 흙.
싼 값에 구할 수 있고 내구도와 질량을 챙길 수 있으며 동체 기동에 드는 마나를 절약할 수 있지만, 내 숙련도가 떨어져 가공 및 변형과 유지보수에 한계가 있고 파괴당하면 채석장까지 가야 제대로 된 대체품을 구할 수 있는 바위.
가장 오래 사용했기에 석재보단 유지보수가 용이하고 내구성과 동체의 기동성이 가장 뛰어나지만, 분위기 상 모든 파츠를 구성하기엔 사회적 여건이 받쳐주지 못하는 강철.
'하지만 당면한 문제는 탑승자 보호장치다.'
지금까지 미뤄왔지만, 내 본체 급은 아니더라도 콕피트 내부의 온도 변화나 마법에 대한 내성을 높일 방안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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