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1.49
* * *
토벌을 출발할 땐 출정식이 없었다.
그러니 승전식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소피가 타 영지의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히히덕 거리는 것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을 땐 조금은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영지의 정규 병사였고, 한 가정의 아버지거나 아들이었으며 인원도 많았다.
출발하기 전엔 인원 점검을 반드시 해야 하며, 다수의 무장한 병사들이 발맞춰 걸어가면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끌리게 돼있다.
그리고 그 행렬에 가족이나 연인, 이웃이 포함돼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무리가 따라붙는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일단의 무리가 돌아오면 입소문이 빠르게 퍼져서 아는 사람이 무사히 돌아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전쟁의 결과에 따라 승전식과 그냥 귀환으로 갈릴 뿐이고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애초부터 소수 인원으로 출발한 데다, 영지에 친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는 소피와 리소테에겐 거리가 먼 이야기다.
의뢰를 받고 출발하는 모험가 신분이니 더더욱 그랬다.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파일 벙커의 시범 운용을 성공한 날에 난쟁이 집단과 벌였던 술판(소피와 리소테는 마시지 않았지만)이 환송이고, 출발하기 전 영주 아들이 짤막하게 '다 모였나? 그럼 출발하지.' 라고 했던 게 출정식의 전부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딱히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영지까지 복귀했을 때도 성문 경비들이 조금 떠들썩해졌지만, 어디까지나 먼 길을 떠났던 영주 아들이 돌아온 것을 성과 병사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소피, 리소테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일행은 본래 묵던 숙소에 다시 방을 잡고, 짐을 대충 던져놓은 뒤 공중 목욕탕부터 찾았다.
소피는 내 기능으로, 리소테는 스스로의 마법과 마도구의 힘으로 위생을 챙겼지만 사우나에서 땀을 빼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만이 줄 수 있는 정신적 안정감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소피는 승전식이고 토벌에 대한 보상이고 할 것 없이 세상만사를 잊은 채 온탕에서 몸을 녹였다.
이동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세 달 쯤은 잡아먹은 토벌 여정.
계속해서 긴장 상태를 유지하던 소피는 간만의 목욕에 손이 짜글짜글해지고 현기증이 느껴질 때까지 늘어져 있다가, 옆에서 작게 코를 골기 시작한 리소테를 깨운다.
아직 '제대로 된 휴식'의 단계가 남아있었기에 여기서 뻗으면 안 된다는 듯하다.
리소테는 쉰다고 해놓고 오히려 의욕에 가득 찬 소피를 이해하지 못하고 칭얼댔지만 소피는 리소테의 작은 몸을 번쩍 들어올려 탕에서 끄집어냈다.
리소테는 못내 아쉬워 탕으로 손을 뻗지만, 온탕은 이불처럼 잡는다고 끌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피의 발걸음엔 자비가 없었다.
"큰 일을 하나 해치우면 이걸 먹어야 해."
도착한 곳은 예의 꼬치 노점상이었다.
꼬치를 굽는 청년은 우리를 알아보더니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소피가 익숙한 동작으로 은화를 내려놓자 바구니 안에 담겨있던 꼬치가 불 위로 빽빽하게 올라간다.
그러고 보니 리소테는 여기에 들른 적이 없었지.
약간이나마 이 도시를 거점으로 활동을 했으니 지나가면서 노점상을 몇 번 보긴 했겠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면 의뢰를 처리한 후 노점상의 하루치 매상을 앉은 자리에서 위에 쑤셔넣는 소피의 루틴은 모를 것이다.
"이, 이걸 다!? 무슨 고기길래?"
"이것저것 섞여있어. 도축하고 남은 고기야."
"도축을 했는데 고기가 남아?"
"그런 게 있어. 일단 먹어봐."
베일에 싸여있던 꼬치 구이의 정체를 알게됐다.
내심 조금 더 충격적인 종류가 튀어나오길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평범했다.
어쩐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사먹더라니.
처음부터 무슨 고기인지 대충 알고 있던 거겠지.
도축이란 건 꽤나 힘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사람이 적은 집락촌민 출신이니 소피도 각종 짐승을 도축하는 데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직접 본적은 없어도 왠지 모르게 작은 토끼의 내장 정도는 치약 짜듯이 쭉 짜낼 것 같은 인상이다.
리소테는 '이것저것' 이라는 소피의 말이 조금 의심스러운지 눈을 가늘게 뜨고 꼬치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물고 우물거린다.
"음, 음. 별로 맛은 없……."
"어흠, 큼."
"아, 그게 아니, 아니라요."
"먹다 보면 나름의 맛이 있어."
우리 아가씨들은 솔직한 게 매력이다.
리소테는 가판대 앞쪽에 쌓인 꼬치의 양과 실시간으로 구워지고 있는 꼬치의 양, 그리고 소피가 낸 돈이나 바구니에 남은 꼬치 등을 살피고 한숨을 쉬었다가 또다시 청년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고기를 입에 쑤셔넣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배를 살살 잡아보는 리소테.
소인족은 대체적으로 살이 찌면 똥배가 불룩 튀어나오는 경향이 강하던데.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니 약간 턱선이 둥그러진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단 모험가를 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살에 대한 걱정이 없었겠지만, 소피와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먹는 양은 늘은 데 반해 내 동체를 타고 이동하는 생활 탓에 운동량이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줄었을 것이다.
마법사에다 소인족인 그녀가 과연 살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열성적으로 몸을 움직일까?
"살 빼는 마법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조만간 리소테가 늘어난 뱃살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를 날이 올 것 같았다.
***
"베르제스, 어때?"
아침 일찍 일어난 소피는 영주 성에 찾아갈 용도로 거점 도시에서 산 옷을 곱게 차려입고 내게 물었다.
평소 입는 옷보다 주름 장식이 들어가고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진 옷이다.
평민이 나름의 양식을 차리기 위해 입는 의복으로서 적합했다.
처음 살 때에도 좋아보였고, 가방 깊숙이 넣어 가지고 온 만큼 튿어지거나 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게 굳이 질문을 던지는 건 방에 거울이 없기 때문이겠지.
설마 하니 소피에게 조현병이 있어 자신이 보지 않은 사이에 누군가 옷에 흠집을 냈을 거라는 상상을 했거나, 젊은 나이에 치매가 와서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에휴.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
소피는 옆방으로 쳐들어가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자고 있는 리소테의 번데기를 무참히 해체해버리고 그녀를 무장시켰다.
산발이 된 머리와 땡땡 부은 얼굴로 영락 없는 백조 꼴을 하고 있던 리소테가 정신이 또렷하고 실력 있어 보이는 마법사로 탈바꿈 했으니 무장이 맞았다.
만족한 소피가 등을 돌리자마자 얼굴이 녹아내리며 자는 숨소리를 냈지만 비틀비틀 거리긴 해도 따라오고는 있으니 비밀로 하기로 했다.
영주는 예상대로 사람 좋아보이는 늙은이였다.
이따금 보이는 강렬한 눈빛이 왕년엔 나름 한 끗발 날렸을 거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왜소해진 몸에선 상대를 압박하는 통치자의 기운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주 아들도 이미 적지 않은 나이다.
마나나 오러에 성취를 보이면 수명이 어느정도 늘어나는 것 같지만, 영주나 영주 아들이나 무력 계열로 보이진 않으니 은퇴할 시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보는 게 맞겠지.
덕분에 일행은 백작위의 영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황에서도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영주는 이런 경험이 많은지, 청산유수같은 말로 스무스하게 전공을 치하하고 추가 보수에 대해선 정산이 조금 걸릴 것 같으니 미리 정해둔 소집 보수만 주겠다는 말을 귀족적으로 표현했다.
소피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고개를 슬쩍 들 때마다 집사가 영주의 말을 알기 쉽게 번역해주었다.
하지만 고개를 드는 빈도가 잦아지자 영주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감돌며 하는 말이 점점 직설적이고 편하게 바뀌었고, 소피의 얼굴도 그에 비례해 발갛게 달아올랐다.
고작 한 달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몬스터 백과를 읽으며 벼락 치기를 했지만 크게 도움은 안 된 것 같다.
"그래. 우리 아들은 어떻더냐?"
"네? 아, 죄, 송구합니다. 자작님께선……마, 맛있는 음식을 사주셨습니다. 바다에서 나는 음식이었는데 맛있었습니다."
"허허. 아들이 벌써부터 영지민을 배불리 먹이고 있었구나."
"송구합니다……!"
완전히 놀림감이 된 소피는 눈을 질끈 감고 연신 '송구합니다.' 만 반복하는 기계가 돼버렸다.
평민이 영주성에 찾아오는 이유는 대체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이렇게 편안한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나 할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 제대로 걸린 소피는 그저 영주가 이리저리 찌르는 대로 참신하고 소박한 대답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공작과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하지 않아서 역시 담력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 당황하고 나니 영락 없이 딱 그 나이대 처녀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공작이 소피에게 병문안을 와서 자기 이야기만 신나게 하다 간 이유가 이것인 것 같았다.
눈치가 빠른 소피는 객관식엔 강했지만 주관식과 서술형에 취약했다.
영주는 소피의 명백한 비언어적 신호를 보고 알았다고 쳐도, 공작은 어떻게 안 거지?
공작 쯤 되면 뱃속에 키우는 능구렁이가 사인을 주기라도 하는 건가?
소피의 얼굴이 완전히 빨개져서 슬슬 제발 살려달라며 사념파를 발하게 될 지경이 돼서야 영주는 리소테에게 관심을 돌렸고, 젊고 나름의 능력이 있는 수련 마법사와 할 법한 안부를 몇 마디 나눈 후에야 일행을 해방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