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1.50
* * *
일행은 무스파날라 거북 토벌 소집에 따른 성과금을 받아들고 영주 성을 나섰다.
소피의 팔에 힘이 빡 들어갈 정도로 묵직한 주머니다.
금액을 자세하게 확인하진 않았지만, 설마 영주라는 사람이 저 주머니를 은화나 동화로 채워놓고 생색을 내진 않았겠지.
완전 균등 분배를 원칙으로 삼는 우리 파티 사정상, 각자에게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의 돈이 돌아갈 것이다.
영주가 자신의 영지군을 움직이지 않고 우리를 보낸 이유 중에 하나는 비용 절감도 있었을 테니 제대로 주머니를 열어서 계산하기 전까진 알 수 없지만, 타 영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이 주머니에는 일개 대대의 3개월치 월급에 파병 수당까지 더한 금액이 들어있는 셈이다.
설마 이만한 크기의 주머니 안에 금화가 꽉 차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에주머니를 안고 대놓고 거리를 돌아다녀도 걱정이 없을 정도다.
"좀이 쑤셔서 못 참을 때까지 쉴 거야."
영주성에서 받은 돈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소피가 말했다.
"토벌이 너무 길었어. 아주 진이 다 빠져버렸다니까. 베르제스의 새로운 골……몸도 만들고, 리소테도 마법진을 완성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그러니까 한동안 놀고먹으면서 지내려고 해."
"엑. 나만 일 시키고 소피는 논다구!?"
"완전히 노는 건 아니야. 몬스터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난 몬스터가 그냥 고블린이나 오크같은 놈들만 있는 줄 알았거든. 그 녀석들을 전부 해치워버리면 다 같이 행복해질 줄 알았고. 그런데 아니더라. 몬스터를 죽이면 다른 문제가 나타나고, 무스파날라 거북이처럼 사람들이 일부러 알을 남기는 몬스터도 있었어. 베르제스처럼 착한 슬라임도 있는걸. '그 녀석'같은 나쁜 놈도 있지만."
"그럼 산지키미는?"
"산지키미는……산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제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나쁜 용이라고 들었어. 지금까지 몇 번씩 퇴치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그래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지. 용은 똑똑하다니까 어쩌면, 서로 잘 이야기 해보면 길을 비켜줄지도 모르잖아?"
"소피……."
"모험가가 될 거야. 남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심부름꾼이 아니라, 미지와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개척자가 될 거야."
소피는 구태여 선언했다.
방법도 모르고 기반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그녀의 목표를 자신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 과정에서 도중에 좌절하거나 다른 것에 흥미가 생겨 목표를 수정할 가능성이 있다 해도, 어쨌든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생긴 것은 좋았다.
"그러려면 글도 제대로 배워야 하고 몬스터 백과 사전도 끝까지 읽어야겠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싸울 일도 많은 거고……. 나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도와줄래? 베르제스. 그리고 리소테."
긍정.
"응! 당연히 도와줘야지!"
***
세계란 무엇인가.
마나란 무엇인가.
신과 신성력, 오러란 무엇인가.
몬스터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나는 이 세계에 큰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이세계 전생을 이뤄냈지만, 누군가에겐 열망의 대상이었고 누군가에겐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았던 세계는 직접 살아보니 엄청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이 통해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거나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도 없었고 매일이 전투와 이동의 연속이었으며, 신나고 재밌는 일이라곤 가끔씩 주어지는 마석 가루가 전부.
인간들의 신비로운 능력과 저마다 특징적인 형태와 습성을 가진 몬스터는 흥미로웠지만, 그도 얼마 가지 못 했다.
아무리 신비하고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여러 번 보다 보면 결국은 자극의 역치가 높아져 익숙해지고 만다.
마법이고 오러에 대한 인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뭉뚱그려졌으며, 몬스터는 '주무기'와 '약점'으로 구성된 신체를 가진 적성 생물체로 전락해버렸다.
마치 전생에서 어떤 게임을 깊게 파고들다가, 온갖 화려한 이펙트와 아름다운 그래픽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각종 숫자나 좌표만이 유의미한 정보로 다가오는 순간과도 같았다.
내게 이 세계는 재미는 없어도 어쩔 수 없이 붙잡고 있는 게임이었다.
진짜 게임과 다른 점은 몬스터를 잡아도 금화나 경험치를 얻을 수 없었고 내가 실시간으로 강해지지 않아 그저 하루하루가 흘러갈 뿐이라는 것.
내가 고등 생물로 전생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감상을 가지고, 이세계에 실망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등 생물의 삶 역시 그들 나름의 고충과 슬픔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고대의 인간들은 드래곤과 전쟁을 벌이고 악마와 전쟁을 벌였는가.
승리하고 승리했지만 어째서 적들은 끊임없이 나타났고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는가.
그것은 오롯이 그들의 삶이었고, 개량 슬라임의 시선으론 이해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순 없었다.
기껏 전생한 이세계는 지루해서, 외로워서, 슬퍼서 죽고 싶을 정도였다.
아직까지 개량 슬라임으로서의 자아와 전생의 기억을 제대로 융합시키지 못했기도 했고 나날이 무뎌지는 감정 탓에 당시엔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나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내일은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없었고,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나를 관리하는 인간들에게 언해피 신호를 보냈다.
내가 만들어낸 콕피트.
유인 인형 병기라는 목표.
그것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형태를 띤 고독이었다.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내민 손길이었다.
하지만 나의 발버둥은 무참히 무시되었고, 나는 마음이 꺾였다.
물론, 그 시작이 잘못돼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 콕피트에 넙죽 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것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최선이었다.
나무를 그리는 심리테스트와 같은 것이다.
아무런 참고자료 없이 내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던 콕피트는 당시 내 심리 상태가 적나라하게 반영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무너진 나의 마음은 전쟁이 끝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어쩌면 생명 활동이 정지될 때까지 지고 가야할 장애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지능이 없는 슬라임이 인간에 준하는 사고능력이 주어진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드웨어의 성능이 소화하지 못 하는 운영 체제는 필연적으로 기계적이든 논리적이든 무언가 문제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무관심.
의지박약.
나는 아직 이세계 전생과 인간의 정신이 슬라임의 육신에 깃들며 일어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전생에도 그런 성향이 있었고, 슬라임의 습성에 영향도 받은 것 같긴 하지만 아무리 각오를 다져도 나아지질 않는다.
나는 소피 외의 인물에 무관심하고, 예상하고 있던 문제가 결국 발생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먼저 나서서 행동하지 않는다.
사실은 모든 게 핑계고 그저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한심한 쓰레기이기 때문에, 구제 불능의 얼간이인 연유로 이러한 상태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
'나는 메카가 될 수 없다.'
세상에 한 두 번 거절당했다며 자신의 껍질 안으로 숨어버리는 겁쟁이는 메카가 될 수 없다.
약간의 성과를 냈다고 우쭐거리며 거기에 만족하고 현실에 안주해버리는 흉내쟁이는 메카가 될 수 없다.
항상 누군가가 보듬어주길 원하고, 외부 요인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기다리며, 고난과 역경을 상대로 맞서 싸우지 않는 어리광쟁이는 메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메카가 될 수 있는가.
오직 나만이 유인 인형 병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서, 내가 만들지 않는다면 그 누가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신념을 넘어선 아집으로 강철의 성을 대지에 우뚝 세우고 우주에서 떨어지는 거주구를 밀어낼 수 있겠는가.
'하는 수밖에 없어.'
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해야만 한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나밖에 없다.
때문에 나는 게임 감각을 벗어나, 이 세계에서 진짜로 살아가야 한다.
이 세계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소피가 자신만의 목표를 찾았듯이.
되는 대로 행동했던 지금까지의 방침을 버리고 명확한 방향성과 실현 가능한 진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의문과 다시 마주해야 한다.
세계란 무엇인가.
마나란 무엇인가.
신과 신성력, 오러란 무엇인가.
몬스터란 무엇인가.
"이 세계는 말하자면 하나의 거대한 호수입니다. 그 호수엔 '최초의 거북'이 헤엄치고 있고, 저희는 그 위에 올려진 세상에 문명을 이룩하며 살고 있죠. 호수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물이 어디서 흘러들어와서 어디로 나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호수를 호수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어떠한 법칙과 억제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의 힘을 빌려 있어야 할 것을 있어야 할 형태로 고치는 행위를 '신성력'을 행사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저 소리를 진지하게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