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1.51
* * *
쾅!
"아저씨! 오랜……."
"아, 드디어 왔구만."
기세 좋게 난쟁이 집단의 사무실 문을 뻥 걷어찬 소피는 선객의 존재에 얼어붙었다.
흰 망토를 두르고 있는 거한 둘이 사무실에 서있으니 작지 않은 사무실이 좁고 답답해 보였다.
"당신이 소피 양, 이신가요?"
"네? 저요?"
"아니면 옆에 꼭 붙어계신……. 아아, 말귀를 알아듣는 슬라임을 입고 다니신다고 하셨죠. '이렇게' 보니 신기하네요."
거한 둘 사이에 있던 의자.
그 의자에 파묻혀 있던 사람이 일어나 소피에게 인사를 한다.
얇고 부드러운, 아주 고급진 재질의 흰 옷을 걸치고 있는 여자.
리소테와 비견될 정도로 작은 몸집.
안이 희미하게 비치는 면사포 너머로 보이는 뾰족한 귀.
정갈한 몸짓과 나긋나긋하면서도 발음이 분명한 목소리.
금색(혹은 진짜 금) 장신구와, 빨갛고 파란 실로 그려낸 의복의 패턴.
온몸에 '나 요정 성녀요.' 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듯한 인물이다.
'강적이군.'
만만치 않은 여자다.
특히, 레이스로 눈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저런 천으로 가려봤자 어차피 눈 뜨고 자세히 보면 보일 건 다 보인다.
신비롭고 경건한 느낌을 내기 위해 일부러 가리고 다니는 게 틀림없다.
저런 모습이라면 갑자기 성녀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에 뚝 떨어져도 누구나 그녀의 정체성과 하는 일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그리고 나름의 철학이 들어간 패션이다.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어떠한 영감까지 받게 되는군.
거기에 입으로 하는 말임에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은 따옴표'를 인지하게 만드는 솜씨까지.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후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 베르제스가 하는 생각을 읽은 거, 예요?"
"변변치 않은 재주일 뿐입니다. 소피 양과 베르제스 씨. 그리고 옆에 계신 분이 리소테 양이겠군요. 오늘도 어제와 같이 평안하셨기를. 주소교(??)의 성녀를 맡고 있는 세라피마 쿠즈미나 리샤흐 마티시노 호마니 그레트밀라비 코스탄……."
만만치 않은 여자다.
***
다니엘라는 말로만 듣던 대신전의 성녀였다.
성녀라는 게 있다는 건 몰랐지만, 어쨌든 이 세계에 유일하게 뿌리내린 종교이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를 육성하고 파견하는 종교의 얼굴 마담인 것이다.
아니, 신탁을 직접 듣는 역할이라고 하니 교단 내에서 위치는 대주교와 동등할지도.
그녀의 말에 따르면 조금 더 신과 가까운 것은 자신이지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대주교의 역할이니 사람이 만든 직위 체계에서 더 높은 것은 결국 대주교인 듯했지만 말하는 어조나 뉘앙스에서 겸손을 떨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요정은 다른 종족보다 미색이 뛰어나고 수명이 길어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종족우월주의에 빠진 자들이 있다는데…….
아, 대주교가 소인족인 건 맞다고.
그렇다면 그녀가 종족우월주의자인 것도 맞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굳이 부정을 안 하는 걸 보면 확정이다.
그녀는 조건이 갖춰지면 신탁을 받고,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각을 잃은 대신 마음의 눈을 얻어 진실만을 볼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듯.
확실히 내 생각을 소피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해내는 걸 보면 아예 거짓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의 아니라 몬스터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읽을 수 있다고?
코에 걸어놓고 코걸이라고 우기는 느낌이 아주 약간 들긴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녀에게선 어쩐지 나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 그것에 가까워지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자가 풍기는 분위기.
그런 그녀가 그렇다고 한다면, 한 두 번 정도는 넘어가줘도 될 것이다.
"소피 양. 당신은 이번 대의 용사입니다."
"용, 뭐요?"
"용사입니다. 마왕의 모태인 '혐오스러운 것'을 상대하기 위해선 그와 같은 힘을 부릴 수 있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마왕이 있다고 하니까 용사도 있을 수 있겠지.
고대의 전쟁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는 모르겠다.
서부 공작의 반응으로 봤을 땐 별 것도 아닌 일로 주소교가 유난을 떨며 마왕이란 존재를 지정하고 공통의 적으로 삼는 행위를 통해 종교를 존속시킬 명분을 세우는 것 같지만, 지금 성녀가 이 시기에 이곳에서 우리와 이야기를 하고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아주 허투로 들을 건 아닐 것 같았다.
제국과 통하는 길목은 산지키미라는 드래곤이 막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경유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방금 들은 참이다.
그런 상황에서 성녀가 우리 영지에 도착하기 위해선 적어도 내가 동족과 조우하기 전에 이미 대신전에서 출발을 했어야 했겠지.
어쩌면 토벌을 떠난 시점이나,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동을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에, 나와 놈의 정확한 상관 관계를 알고 있는 건 내 동체의 메커니즘을 직접 몸으로 느낀 소피와 우리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리소테 뿐.
나와 놈이 동체를 구성하는 것을 모두 본 사람이 있다면 약간은 의심을 해볼 법 하지만, 동체의 소재와 구조의 차이가 너무 커 저렇게까지 확신을 담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다니엘라는 성녀를 자칭하고 다닐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우리를 납득시켰다.
그녀는 나와 소피, 그리고 리소테의 생각을 읽어 필요한 설명을 약간씩 한 뒤에 소피에게 작은 브로치 하나를 건넸다.
금테두리에 엄지손가락만한 붉은 보석이 박힌 브로치는 무려 '용사의 증표'라고 했다.
그것을 직접 전해주러 바쁜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다고.
황송한 줄 알라는 의도가 말의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조금 나빠질 뻔했지만, 남의 집에 들어가 보물 상자를 털고 옷장과 책장을 마음대로 뒤져도 처벌받지 않는 범죄허가서를 가슴에 달고 다닐 수 있는 셈이니 저 정도 생색은 내도 괜찮겠지.
"큰일 날 말씀을. 용사에게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그 브로치는 소피 양이 용사임을 증명할 수 있고, 마나를 저장할 수 있는 마도구일 뿐이예요."
아쉽게도 용사의 면책특권은 차원 공통이 아닌가 보다.
***
"……갔냐? 갔지? 파하~.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지 뭐냐."
"아저씨. 지금 하는 말도 다 듣는 거 아니에요?"
"듣고 싶으면 들으라고 해라. 갑자기 쳐들어오는데 높으신 분이라니 쫓아낼 수도 없고, 일단 앉혀는 놨는데 누가 귀쟁이 아니랄까봐 어떻게 말도 없이 재수 없는 티를 그렇게 팍팍 내는지……."
"나두 그 사람 좀 그렇더라."
아마도 성기사였을 거한과 함께 성녀가 떠나가자마자 사무실에 원성이 자자하다.
저런 사람을 얼굴 마담으로 쓰고 있으니 세계 유일의 종교라는 주소교 취급이 그 모양 그 꼴이지.
신탁과 자신의 능력의 설득력에 대해선 그렇게 직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증명해냈으면서, 결국 마지막엔 '대비하라. 운명이 이끌 것이다.' 로 끝내는 게 어디 있나?
정말 세세하게 '몇 날 며칠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하는 식으로 짚어줬으면 그것 나름대로 마음에 안 들었겠지만, 중간부터 마왕의 힘이 강해지면서 미래를 자세하게 볼 수 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니 김이 새고 너무 제멋대로라는 인상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신탁이라는 게 그렇게 제멋대로인 건지, 제멋대로인 사람이 신탁을 받아서 그렇게 된 건지.
"그래, 소피야. 그동안 잘 지냈냐? 별 일은 없었고?"
"네, 덕분에요. 별 일은 많았지만……. 참, 아저씨 소개로 산 바위 다 부숴먹었어요."
"보아하니 그런 것 같더라. 몸통밖에 안 남은 게지? 어떤 놈이랑 붙었길래 그리 된 게냐."
일행은 그동안 있었던 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도시에선 평소처럼 단기간 토벌에 나간 줄 알았던 소피가 돌아오지 않자 사람들이 난쟁이를 찾아왔다고 한다.
내 동체를 배경으로 삼아 그리던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사람, 타지 손님들이 행방을 자꾸 물어 알아보러 왔다는 숙박업자, 순수하게 슬라임을 입고 다니던 당돌한 여자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는지 걱정하는 사람들.
소피는 실감하지 못 했지만, 그녀는 이미 도시에서 유명 인사였다.
영업맨이 눈치를 보다 평소에 마시던 뜨거운 차 대신 냉수를 내오자, 모두가 벌컥벌컥 들이킨다.
일행은 아직까지 성녀를 영접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나 보다.
"크으. 그래도 그 성녀라는 귀쟁이가 쓸 만한 걸 하나 던져주고 갔구나. 용사의 증표라고? 어디 한 번 보자."
"이런 걸 어디다 쓰겠어요. 마나를 저장한다고 해도, 제가 마법사도 아닌데. 리소테, 니가 쓸래?"
"한 번 보구. 아저씨. 좀 줘봐요."
"아, 있어 봐라. 요만한 데다 인공적으로 마나를 넣어봤자 얼마나 들어가겠냐. 마석이 귀한 건 오랜 기간 자연적으로 마나가 쌓이면서 압축됐기 때문에 귀한 게야. 하루 이틀만에 주입된 마나랑은 차원이 다르지. 이건 마나 저장보다 소피, 니가 용사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된다."
난쟁이는 브로치의 금장식에 흥미가 있었는지 앞뒤로 훑어보다가 '별거 없구만.'하면서 리소테에게 넘겼다.
"내가 잘은 몰라도 옛날부터 용사라는 양반들이 하나씩 큰 일을 하긴 했어. 뭐라더라? '위대한 아무개'라는 마법사도 용사였다더만. 마왕이니 뭐니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몰라도, 그 놈을 상대할 용사로 발탁이 됐으니 이것저것 끌어다 쓸 명분이 있는 게지."
"명분이요? 그럼, 베르제스의 몸을 강철로!"
"만들 수가! 없다."
"아니, 아저씨. 지금 사람 놀려요?"
"어흠. 글쎄, 들어 봐라. 지금 안 그래도 철광석을 못 캐서 아주 난리가 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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