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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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도시 타페모이는 영지로부터 한 달은 족히 걸린다고 들었는데, 12m 동체로 산을 가로질러 신나게 달리니 이동 시간을 5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
대장장이보단 사업가에 가까운 난쟁이가 말한 기간은 커다란 마차로 무거운 짐을 싣고 최대한 넓고 평탄한 길을 골라 쉴 거 다 쉬면서 이동하는 화물을 기준으로 잡은 것 같았다.
본래는 4일 안으로 끊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전보다 훨씬 거대해진 동체에 신이 난 소피가 버스트 모드로 전력 질주를 시도한 결과 하루가 늦춰지고 말았다.
그래도, 하루를 투자할 만한 가치는 있었다.
125km/h.
눈대중으로 측정한 속력이지만, 얼추 맞을 것이다.
경이로운 성능이었다.
100m를 10초에 주파하는 운동 선수의 속도가 36km/h고 내 동체의 체고는 인간의 6배가 넘으니 느리다고 할 수 있겠지만, 거대하고 둔중한 흙 동체와 인간의 운동 능력을 비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의 내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울퉁불퉁한 지형을 짓밟으며 고속으로 이동하는 경험은 이제껏 느끼지 못한 해방감을 선사해주었다.
고대의 인간들이 비상하는 드래곤과 악마를 조금이나마 쫓아갈 수 있도록 조금 높게 점프하는 강화 마법을 걸어주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쾌감이었다.
물론 한계를 초월한 출력의 대가는 처참해서, 버스트 모드가 해제되자마자 내 장악력이 낮아짐에 따라 동체에 전해지는 충격을 감당해내지 못해 각 파츠의 형태가 무너졌고, 소피는 제 때 발을 내딛는데 실패해 발이 꼬였으며, 극심한 멀미를 느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던 리소테는 마침내 토사물을 흩뿌리곤 졸도하고 말았다.
꿍─, 우르르르르르르르르릉.
한 층 거대한 동체가 넘어지는 충격은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국소적인 지진이 일어났다고 착각할 정도로 땅울림이 십 초가 넘게 지속됐으며, 유일하게 석재로 남아 있던 몸통 파츠는 균열이 전체로 퍼져 더 이상의 내구력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특히 리소테가 문제였다.
출발 전에 점검하고 추가로 보강한 안전 로프 덕분에 그녀의 몸이 튕겨나가 콕피트 내벽에 충돌하는 일은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전신을 조이는 압박에 리소테의 얼굴이 퍼래졌다 붉어졌다 하얘졌다를 반복하며 입에 거품까지 물었다.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에 따라 소피가 급하게 안전 로프를 풀어낸 후 하임리히법으로 토사물과 거품을 토해내게 하고 호흡과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정말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소테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입으로 내뱉은 체액 따위는 내가 미리 처리해놨기에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구체적으로 알진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정신적 충격과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가누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그날 하루는 무너진 흙동체가 이룬 동산에 파묻혀 리소테를 간병했다.
소피가 연신 사과했고, 리소테는 받아들였다.
대신, 리소테는 앞으로 리미터 해제 마법진이든 콕피트 강화든 전부 제쳐두고 멀미약 제조부터 하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이 세계의 멀미약은 비행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소수의 마법사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들기 때문에 수배도 힘들고 가격도 엿장수 마음이라고 한다.
지금까진 내 동체의 크기에 비해 소피의 조종 실력이 뛰어났고 내 콕피트의 탑승감이 안정적인 축에 속했기 때문에 약간만 참으면 되는 수준이었다지만, 동체의 크기를 가능한 키울 예정이었기에 언젠가는 필요한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천천히 이동하며 리소테가 메스꺼움을 느끼지 않고, 마법을 영창할 수 있는 한계 속도를 알아내는 데 주력했고 그 속도를 평시 이동 속도로 정했다.
문득, 우리를 따라다니며 내 동체의 변천사나 성능 등을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버스트 모드를 사용한 동안 그렇게 빨리 달렸으니 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겠지?
꼴사납게 넘어지는 모습은 못 봤겠지?
소피도 내 생각을 읽고 잠깐 몸을 굳혔지만, 전력 질주 건으로 어색해진 콕피트 분위기를 무시하고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
전생의 재벌이 1초에 얼마를 번다, 같은 일화를 들은 기억은 많다.
어렸을 때야 그저 대단하다는 감상밖에는 없었지만 나이를 먹어 사회에 참여하고 나니 그것을 위해 얼마나 커다랗고 정교한 시스템이 필요한지, 그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톱니바퀴 중 하나라도 망가져 기능을 잃었을 때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지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앉아서 돈이 굴러들어오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성공의 과실은 달지만, 실패의 출혈은 숨통을 조인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일을 해야 한다.
실물이든 시스템이든,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물새듯 줄줄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기꺼이 유지 비용을 감당할 만한 것은 전쟁 병기 뿐이다.
규모와 디테일한 구조는 달라도, 이 세계의 사업 역시 그러한 면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업이 영지를 먹여살리는 주력 사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때문에 타페모이 자작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주변 영지의 오러 깨나 쓴다는 기사나 각종 모험가, 용병까지 가리지 않고 돈을 뿌려대며 광산을 정상화시킬 원정대를 꾸리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좁은 광산에서 강력한 몬스터와 싸울 수 있는 강자들은 돈을 퍼준다고 바로바로 끌어올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는 것.
일정 자체가 맞지 않는 자들도 있었고, 얼마 전에 있었던 거대 거북 토벌로 배가 부른 실력자들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누가 봐도 급박한 상황에 처한 타페모이 자작이 보상을 조금 더 올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고 쉬운 길이 안 되면 먼 길로 돌아가면 되듯, 시간을 들여 작전을 세우고 마도구를 모아 영지군을 투입시킨다면 서서히 회복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영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각지의 모험가 사무로소 의뢰서를 뿌리고 나날이 갱신하는 걸 보아하니 영주는 얌전히 기다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영지에 돈이 점점 마르며 그에 따른 치안 문제가 늘어가는 모습을 보고, 큰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린 것 같다.
"나도 원래는 좀 더 쉬려고 했는데……."
소피가 아쉬운 소리를 하지만, 솔직히 어림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상황을 살피고 살살 간을 볼 수 있는 건 그야말로 어디 영지 소속 기사나 용병단의 단장같은, 속칭 '슈퍼 을'에 속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우리는 전투력 면에선 그들을 앞설지 몰라도 사회적 지위로 말하자면, 연줄도 없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없는 한낱 7급 모험가(토벌의 성과로 승급했다)나부랭이에 '을 중의 을'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사였다.
용사라는 게 말은 번지르르해 보일 수 있겠지만 실상을 파고들면 저 어디 촌동네 꼬맹이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몬스터의 서식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녀야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용사는 그랬다.
***
아니나 다를까, 성문에선 약간의 소동이 일었다.
내 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긴 했는지, 성벽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은 도망치지 않았고 경비를 서는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렇기에, 조금 방심을 하고 말았다.
병사 중 하나가 손나팔을 만들어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는데, 전혀 들리지 않아 몇 걸음 다가섰더니 경보용 종소리가 울리며 병사들이 성벽에 배치됐다.
약간의 대치 후 콕피트를 개방하자 토벌에 참여했던 병사가 소피와 리소테를 알아봐 오해가 풀렸지만, 자칫하면 정체불명의 거수골렘이 될 뻔했다.
동체의 덩치를 키운 부작용이었다.
첫째로는 멀리 있는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감지하는 것 자체는 내 본체가 동체 전역에 뻗쳐있기 때문에 발아래에서 말을 하든 머리 높이에서 말을 하든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동체 파츠 자체가 두꺼워졌기 때문에 공기의 진동을 타고 전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가 짧아지고 말았다.
내 새로운 동체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나온 드워프 집단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을 땐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도 평소보다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타이밍이 빨라진 것도 같았다.
급격히 2배로 커진 동체의 거리 감각에 익숙해지지 않았었고, 나 역시도 소피만큼 크기를 키운 동체에 신이 나 있었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두 번째 부작용은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할 수단이 한정돼 있다는 것이다.
우리 영지에서 활동할 때나 거대 거북 토벌 때처럼 태연하게 돌아다니는 거대 골렘이 나밖에 없고 모습을 바꾸는 장면을 많은 사람이 목격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 외의 경우는 콕피트를 열고 소피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내가 알 수 없는 마법사가 창조해낸 새로운 골렘이나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몬스터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인식 마크라도 만들어서 각인하고 다니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야 있다 쳐도, 그 마크를 정하기까지가 문제다.
그러한 표식은 사람들에게 인식을 남기기 위한 것이고, 한 번 정하면 쉽게 바꿀 수 없다.
만일 인식 마크를 만들어 동체에 새겨넣거나 식별기 따위를 사용하게 된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