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1.54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세계의 모험가 길드엔 ERP같은 시스템이 구축돼있지 않아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 그곳의 모험가 사무소에서 재인증을 받아야 했다.
모험가 패에 해당 정보가 들어있다는데, 리소테의 말에 의하면 어떤 원리인지는 알 만한 사람들은 대충 알고 있지만 위조는 힘들다고 한다.
사람마다 마법을 사용할 때 버릇처럼 새겨지는 특유의 마나 흐름 패턴이 있는데, 모험가 패의 정보를 읽는 마도구에 모험가패 제작자의 마나 패턴을 읽는 기능까지 있어 모험가 길드의 기술팀(가칭)의 내부 정보를 입수해 그 패턴까지 흉내내는 게 아니라면 들키고 말 거라나.
물론 그것도 6급 이상의 모험가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 아래의 모험가 패엔 마법적 인증이고 뭐고 없는 진짜 목패라 해당 지역의 모험가 사무소에서만 쓸 수 있다.
"네, 소피 씨랑…리소테 씨……. 파티명 베르제스…. 네그맥에서 오셨고……. 확인되셨습니다. 탄광 복구 의뢰는 사람이 모이면 영주성에서 소집이 떨어질 거예요. 숙소 잡으시고 이쪽에 말씀해주시면 소집 나왔을 때 알려줄 사람이 찾아갈 거구요."
"아, 네. 네."
모험가 사무소의 직원은 설명을 하면서도 내 본체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아직 이곳의 사람들은 기능성 슬라임을 걸쳐 입음으로써 체온을 조절하며 외부 충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함과 동시에 패션에 독특한 포인트를 주는 유행을 모르는 것 같았다.
"……."
"무,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아뇨. 생각 좀 하느라."
반면에 소피의 멘탈은 갈수록 단단해지는 것 같아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하다.
***
절차를 마치고 숙소를 잡기 위해 이동하려는 일행의 앞길을 기사와 수행원이 막았다.
영주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마나나 오러를 다룰 수 있는 6등급 모험가와 그 위의 7등급 모험가는 일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이긴 하지만, 또 그런 실력자들 사이에서 줄을 세우다 보면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는 인상이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든든하지만, 그래도 막대한 거금을 들여 모셔가기엔 조금 모자란 그런 인력.
엄밀히 말하자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영주가 얼굴 좀 보자며 부를 인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내 동체를 조종하는 소피의 전투력은 분명히 규격 외고, 저번 토벌로 인해 서부 지역에선 인지도도 상당히 올랐을 테니 영주가 이렇게 나와도 이상하진 않았다.
모험가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10급을 제외하면 그녀는 최고 등급을 받을 것이 예정돼있는 유망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회만 닿으면 10급 모험가도 충분히 가능하다.
미리미리 얼굴을 터놔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대가 당대의 용사 소피요?"
"네, 네? 네? 아, 죄송, 송구합니다."
"고개를 드시오. 평민이라곤 하나 용사를 이렇게 대했다는 게 알려지면 내가 곤란을 겪게 되오."
"황송합…."
"말도 편하게 하셔도 좋소."
"아, 네……. 감사합니다."
확실히 돈을 많이 버는지, 백작인 우리 영주의 성보다 크고 화려한 성에서 기다리고 있던 타페모이 자작은 그런 나의 예상을 가볍게 깨주었다.
소피가 용사로 임명된 지 일주일이 될까말까 한 시점이다.
성녀가 소피에게 들른 다음날에 우리가 출발했고, 내 동체처럼 손쉽고 빠르게 산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이동 수단은 없으니 자작이 소피가 용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 해야 정상이었다.
성녀가 이미 네그맥 영지의 소피를 용사로 임명하겠다고 공문이라도 뿌린 건가?
하지만 그런 게 있었다면 우리 영주를 알현했을 때 용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장거리 통신 마법.
거대 거북 토벌 때 짧은 기간의 교육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거리 통신 마도구를 보았는데, 그 전엔 그런 물건을 시중에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엔 탐조등과 묶어서 그저 '이 세계의 지배층은 거북 토벌과 해양 방어에 진심이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그렇게 넘겨도 될 문제가 아니었다.
단거리 통신이 가능하니 장거리 통신이라고 불가능할 이유는 없다.
어쩐지 내 동체에 대한 정보가 너무 빠르게 퍼진다 했지.
개인의 무력으로 대지를 뒤엎고 하늘을 가를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마나도, 오러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이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기 위해선 단순히 처세술이나 영지 경영 능력, 혹은 모략질 따위를 잘 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무언가 실질적인 억제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민간에 공개되지 않은 기술.'
과연 어디까지 숨기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용사인 소피는 과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경솔한 생각이지만, 정말로 인류에 위기가 닥쳐 전력을 다하는 그들의 '진짜 실력'을 보고 싶어졌다.
"우리 영지의 위기에 이렇게나 빨리 달려와줄 줄은 미처 몰랐소. 그대의 명성과 무용담은 익히 들어, 네그맥으로 지명 의뢰를 내려 했는데 먼저 찾아와주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구려. "
"치,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겸손하기까지. 다른 자들은 스스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돈에 눈이 멀어 움직이지 않는 와중에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서니 어찌 용사의 귀감이라 하지 않겠는가. 용사 소피. 그대의 일행을 의뢰가 끝날 때까지 영주성에 서 대접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소?"
맛있는 식사!
공짜 밥!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감사합니다."
벌써 두 번째라고, 영주를 상대하는 소피의 모습은 이전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머릿속에선 환호를 내지르면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자세도 일품이다.
개인적으론 일면식도 없는 귀족이 저렇게 얼굴에 금칠을 해주고 대접해주는 것 자체가 아주 단단하게 뽑아먹겠다는 신호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소피는 어차피 일은 해야 하니 받을 건 받자는 생각인 듯했다.
영주는 우리를 데려온 기사를 시켜 방으로 안내하게 하고, 나중에 사람을 보낼 때까지 편히 쉬라고 했다.
그의 호의에 리소테는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소피는 맛있는 밥과 푹신한 침대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타입이었기에 그저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가 영주성으로 안내할 때에도 자기는 토벌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느니, 이렇게 만나볼 수 있어서 영광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했었지.
그것도 평민인 소피에게 존대말을 쓰면서.
처음엔 그냥 이 사람이 존대말 캐릭터인가 보다 했지만 사실은 그게 복선이었던 것 같다.
리소테에게 들은 역대 용사들은 하나 같이 쟁쟁한 인물들이었으니 소피도 조만간 역사에 남을 위인이 될지도 몰랐다.
사소할지라도, 그런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겐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되곤 한다.
"소피 양.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세요."
"소피 양의 골렘이 거대한 크기에서 오는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높이가 한정된 광산에 들어가서 싸울 수 있을지……."
"아, 아아. 그거요. 아쉽지만, 괜찮아요. 베르제스는 크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신기합니다."
"……정말 신기한 아이긴 해요. 너무 신기해서 가끔은…응? 베르제스, 왜 그래?"
마침 이야기가 나왔기에 대화를 끊고 소피에게 강력하게 의사를 보낸다.
비좁은 광산.
물론 적당히 크기를 줄여서 진입하면 전투엔 문제가 없지만, 그래서는 재미가 없다.
내게 생각이 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울퉁불퉁하고 경사진 지형에 알맞는 동체를 만들 거니까.
***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의 광산에서 반듯하게 고른 지면에 레일을 깔고 광차를 운용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광산은 광산이고 취급하는 물품은 부피도 큰 편에 사람이 직접 옮기기엔 무거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광석이다.
어느 정도 경사를 완만하게 하는 작업을 안 할 리가 없고, 최소한 수레차 정도는 사용할 것이다.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가 여럿 있을 거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영주에게 요청해, 가장 최근에 열린 제련 대회에서 우승한 공방을 소개 받았다.
제련과 단조, 혹은 주조는 분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영주가 소개해줬으니 종합적인 실력을 따지면 영지에서 손꼽히는 대장간이겠지.
철광석 생산이 중단되었기에 대장간에는 노는 손이 많았고, 마침 만들어놓았다가 주문자가 대금을 치르지 못해 창고에 쌓여있던 수레용 쇠바퀴를 여럿 구할 수 있었다.
바퀴는 튼튼하고 모양이 일정했다.
거대한 무장을 만들어봐야 알겠지만, 바퀴만 봤을 땐 우리 영지 난쟁이들보다 실력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특주품으로 제작한 파일 벙커는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긴 했어도, 내가 난쟁이에게 가지고 있던 환상을 약간은 깨는 품질이었다.
표면이 밀링한 것처럼 일정하고 매끈하지도 않았으며 끄트머리가 바늘만큼 날카롭지도 않았다.
전용 거품집을 만들기엔 손해같아서 아무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더니 어떻게든 만들어냈다는 건 확실히 프로의 자세였고, 대단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적같은 정밀도를 챙기면서 세련된 디자인까지 뽑아내는 게 난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바퀴로 하는 모양새에 흥미를 느낀 타페모이의 난쟁이들과 바디랭귀지로 어찌어찌 소통하며 동체를 만들고 테스트하기를 3일.
나는 마침내 만들어내고 말았다.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이……이게 뭐야."
아아, 이것은 무한궤도라는 것이다.
험지를 안정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
"베르제스? 다리, 다리는 어디 갔어? 여기 아래 숨어있는 거지?"
오, 이런.
소피가 용사가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높으신 분이 다 됐나보군.
모르겠나? 다리는 그저 장──,
"이거, 어떻게 움직여야돼?"
'……아.'
뭘 모르는 건 나였다.
소피에게 다리는 겉치레가 아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