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1.57
* * *
까득. 꾸드득. 까가각.
'…….'
마그마 드레이크는 왜 줄 것처럼 굴면서 안 주냐는 듯 불만스럽게 '꾸아악!' 하고 울었다가 다시 내 손을 씹으려 들고 있다.
개껌에 달려들어 이렇게 씹어보고, 저렇게 씹어보며 음미하는 개 같아 보이기도 한다.
아주 긍정적으로 보자면, 말이다.
"요놈! 그만해!"
꿍!
"꾸이이익!!"
정신없이 내 손을 씹어먹던 놈에게 소피가 꿀밤을 한 대 먹이자, 놈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화들짝 놀라 떨어진다.
"꾸악! 꾸아악!!"
"이건 먹으면 안 돼! 맴매야, 맴매!"
"꽈아악!!"
"너 진짜 혼나 볼래?"
"꾸악!!"
소피는 마그마 드레이크와 잠시간 신경전을 벌인다.
놈이 보고 있는 건 아무런 표정 없이 눈 부분만 휑 하게 뚫려 있는 내 머리 파츠지만, 소피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도끼눈을 뜨고 녀석을 기로 찍어누르려 시도하고 있다.
녀석이 경계하면서도, 달려들거나 추가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는 걸 보면 어느 정도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썩어도 준치라고, 지능이 낮다곤 해도 아룡종인 녀석은 내 안에 있는 소피를 느낄 수 있는 걸까?
"자, 다시. 여기 양배──."
"꽈아아아악!!"
탁탁탁탁탁탁탁탁탁…….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내 동체와 맡은 적 없던 위협적인 냄새, 그리고 먹을 걸로 꾀어낸 후 공격한 흉악성에 잔뜩 쫄아있던 녀석은 소피가 동체를 움직이자마자 몸을 돌려 전력으로 달아났다.
덩치에 비해 발소리가 굉장히 가볍다.
빠르게 멀어지는 마그마 드레이크를 보며 리소테가 돌연 박수를 짝짝짝 친다.
"와, 소피! 대단해! 벌써 한 마리 쫓아냈다구!"
"으응?"
"처음부터 이럴려구 먹이를 사왔구나?"
"어, 어? 다, 당연하지! 괜히 그동안 책 들여다본 게 아니라니까? 하하! 하하하하!"
과연, 그런 거였군.
아무리 그래도 잡식성이란 말만 믿고 진짜 아무거나 주섬주섬 사와서, 거기다 동체에 몬스터를 쫓는 도료를 바른 채로 몬스터를 먹이로 테이밍하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파일럿이 다 계획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는데, 그걸 못 알아봐서 소피를 의심한 내가 천하의 아둔한 슬라임이었다.
오늘도 용사님 덕분에 한 층 개안(??)하고, 깨달음을 얻는구나.
"하…하하……."
***
먹이로 마그마 드레이크를 길들여보겠다는 소피의 생각이 실현 가능성이 낮기는 했지만, 그 이유가 오로지 소피의 안일함때문 만은 아니었다..
백과 사전엔 '돌도 씹어먹는 치악력'이라는 묘사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해당 항목을 작성한 사람은 놈들이 돌을 먹는 장면이나, 서식지 군데군데의 바위를 이빨로 씹어먹은 흔적을 분명히 봤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걸 보고도 '아, 이놈들이 먹이로 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돌을 선호하는구나.'가 아니라 '얼마나 잡식성이면 돌까지 씹어먹을까?'하는 생각을 떠올린 건지.
소피가 산 몬스터 백과 사전은 개정판이 주기적으로 출간되는 듯 하니, 단 한 사람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토대로 작성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나름대로 신뢰가 있는 목격담을 수집해 작성하거나 모험가에게 의뢰를 내서 생태 조사를 한다거나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몬스터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이나 생태 조사 의뢰를 수행하는 모험가들은 기초교육, 혹은 의무교육을 받지 않은 이세계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똑같은 현상을 관찰해도 배경 지식과 관심사에 따라 묘사하는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신력이 없는 사람의 보고를 토대로 백과 사전이 작성됐다면 담긴 내용의 대부분을 의심해야 할 수밖에 없다.
모험가의 등급이 나름의 공신력이 될지도 모르지만, 높은 등급의 모험가 중에도 일을 대충 처리하고 의뢰비를 받아먹는 사기꾼이 분명히 있었고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일자무식은 생각보다 많았다.
'책을 너무 믿어선 안 되겠어.'
통신이 발달하고 정보의 공유가 활발해 잘못된 내용이 사전으로 출간될 확률이 낮은 전생의 기억과, 막연하게 생각하던 이세계보다 의외로 번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던 이 세계의 생활상 때문에 간과하고 있었던 문제다.
비싼 돈을 주고 샀어도 사전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도움이 되는 것은 맞지만, 그 신뢰도는 사용자 위키 수준으로 낮춰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리소테도 이것저것 수행 일지에 적어서 나중에 실적으로 올린다고 했었지.
소피가 진심으로 몬스터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먹이를 준비했다고 믿고 있는 리소테가 어떤 내용을 기록했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검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에 하나라도, 육체적으로 지친 여성의 몸을 희롱하는 것을 즐기는 특이한 슬라임이 있다는 내용이라도 써있으면 가만히 넘어갈 일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개량 슬라임의 명예를 위한 일이다.
***
리소테의 의견에 따라 궤도에 도료를 듬뿍 묻히고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한다.
내 움직임에 따라 생기는 도료 자국은 영역 표시가 됨과 동시에 지도가 없는 마그마 드레이크 서식지에서 나름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면을 보면 머리 회전이 느린 것 같지는 않은데…….
"꾸악."
"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그마 드레이크 두 마리와 조우한다.
크기로 봐선 어미, 혹은 아비와 새끼의 조합이다.
그러고 보니 암수 구별법은 사전에 적혀있지 않았다.
죽인 후에 배를 뒤집어 까보면 알 수 있을까?
"소피, 이번에도 할 거야?"
"아니. 저 녀석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걸."
소피의 말대로 마그마 드레이크는 벌써부터 적개심을 띠며 고개를 짓쳐들고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새끼 보호 본능이 강하거나, 몬스터를 쫓는 도료가 본격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거겠지.
"꾸이이이이이이이……."
"온다!"
탁탁탁탁탁탁탁!!
녀석은 귀엽게만 들리던 울음 소리에 점점 긁는 소리와 쉿쉿 소리를 섞더니, 빠르게 발을 놀리며 이쪽을 향해 돌진해온다.
다시 봐도, 크기에 비해 빠르다.
공격 방법은? 몸통 박치기냐!
"베르제스!"
콰앙!!
2미터 가까이 되는 놈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머리로 내 하체를 들이받는다.
아룡종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터무니없는 순발력과 내구도를 활용한 신뢰의 박치기.
녀석이 만났던 상대들 중엔 이걸 맞고 제대로 버틴 녀석이 없던 거겠지.
숙련된 박치기는 망설임이 없고 실제로 위력도 상당하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동체 중에 가장 무게 중심이 낮고 안정적인 동체가 밀려나며 기우뚱 한다.
하지만,
우르르르르
출력은 이쪽이 위다.
르르르르르르르
소피가 상체를 낮추며 균형을 맞추고, 나는 전력으로 궤도를 굴린다.
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가가가가가가가가각.
감속기가 내지르는 비명에 맞춰 놈의 몸뚱이가 서서히 뒤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단단한 발톱이 바위를 갈아내며 불꽃을 퉁긴다.
당황하고 있군.
지금까지 힘 싸움에서 밀려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나 보지?
그렇다면 그대로 버티고 있어도 된다.
이대로 벽까지 밀어붙혀서 찌부려트려주마!
"좋아, 베르제스! 밀어붙혀!!"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꾸아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놈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창처럼 길고 뾰족하게 깎으면 좁은 갱도에서 움직이는 데 제한이 많을 것 같아, 전생의 궤도 차량을 떠올리며 경사지게 구성한 내 하체 파츠의 전면부.
마그마 드레이크가 그 경사면에 머리를 맞대고 나와 제대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금만 머리의 각도가 틀어져도 몸이 들려 뒤집어지거나, 궤도 아래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리고 녀석의 체고는 충분히 크지 못 했다.
"어, 어?"
우드드드드드드드드득.
힘이 달린 녀석이 고개를 조금 숙이자마자 내 동체는 무자비하게 녀석의 몸을 깔아뭉갰다.
반발력이 사라진 궤도가 갑작스럽게 속도를 내며 마그마 드레이크의 몸을 타넘는 짧은 시간.
패드가 몸에 닿고 내 무게가 실릴 때마다 녀석의 사지와 척추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이 동체를 타고 흐른다.
르르르르, 릉.
내가 벽에 부딪치기 전에 감속 및 정지.
지나온 녀석의 몸을 돌아보니, 검은색 궤도 흔적을 완전히 짓눌린 팔다리에 새긴 채 사지를 움찔거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아직 살아 있는 건가.
몬스터들은 대부분 육체의 회복력이 준수하다지만, 저 정도 부상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건 트롤 뿐이다.
쿵! 쿵!
소피는 놈의 허리 한가운데와 목에 주먹을 꽂아넣어 확인 사살을 마친다.
전체적으로 납작해진 놈의 몸 중에서도 주먹을 맞은 곳은 거의 바닥에 압착된 수준이다.
열에 대한 내성은 뛰어나지만, 물리적인 방어력이 강한 녀석은 아니군.
규격 외로 단단한 건 머리뼈 정도인가 보다.
새끼는 녀석이 내 동체 아래 깔리는 순간 패배를 직감했는지 줄행랑을 쳤다.
궤도를 달고 있는 지금의 내가 따라가지 못할 속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가벼운 새끼는 소형 도마뱀처럼 천장을 타고 달리고 있었기에 포기했다.
저걸 따라가서 잡으려고 버둥대면 마그마 드레이크 몇 마리의 주의를 끌지 모른다.
"처, 처음부터 이럴려고 만들었구나."
당연하지. 괜히 그동안 대장간에 들락날락 한 게 아니다.
그나마 해볼 만 했던 고블린은 거리 자체를 주지 않았기에, 상대를 짓밟고 지나가는 것 만으로 살상력을 발휘하는 진짜 충격 전술을 처음 접한 소피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부대 단위의 기마 돌격은 커녕, 마차에 깔린 사람도 보지 못했기에 다소 생소하게 다가올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독하게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공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주먹으로 치고 받거나 무언가를 쏴서 맞추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지.
하지만 그녀는 금세 적응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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