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1.58
* * *
우리는 마그마 드레이크의 시체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몬스터가 막연히 '인류의 적'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정체와 습성을 규명하고 싸움 외의 방법으로 관계를 맺는 길을 찾으려는 소피.
수행 마법사로서의 실적과 지식을 쌓고 전공을 제대로 정하려는 리소테.
놈의 가죽을 소재로 내열성을 강화하려는 나.
일행이 원하는 것은 각각 다르지만, 지금 이 마그마 드레이크의 사체를 해체한다면 모두가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도 놈의 사체를 깔끔하게 해체할 방법이 없었다.
"힘으로 잡아당기면 팔다리나 머리 정도는 떼어낼 수 있지 않을까? 운이 좋으면 머리를 뽑을 때 척추랑 꼬리뼈까지 딸려나올 지도 몰라. 이렇게 좍──."
"끄, 끔찍한 건 둘째치고 그런 건 해체가 아니라 훼손이라구."
거대한 날붙이라도 있었으면 배를 갈라보든가, 토막내서 단면도라도 그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군.
"아! 이건 어때? 베르제스 친구가 했던 것처럼 저 마그마 드레이크의 시체를 움직이는 거야! 그리고 그 상태에서 평소같이 부위별로 분리시키면 되잖아."
"베르제스, 할 수 있겠니?"
부정.
내가 파츠를 퍼지시킬 수 있는 건 처음부터 분리돼 있는 파츠를 내 본체로 잡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동체나 장악해서 부위별로 분해할 수 있었다면, 이 산의 일부분을 장악하고 광산과 마그마 드레이크 서식지의 경계를 파악해 통로를 완전히 무너트리는 방식으로 이번 의뢰를 해결했겠지.
그리고, 애초에 저런 사체에 파고들어 움직이는 건 내 미학에 어긋난다.
지금도 메카라 부를 수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 있는데, 저런 시체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잘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안 되나 봐. 이럴 때 적당한 마법은 없어?"
"해체 마법 같은 건 당연히 없구, 바람으로 베는 마법은 있는데 저만한 크기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겠어. 내 마력이 약해서 아룡종 시체에 통할지도 모르겠구……."
큰일이군.
시체야 지금부터 토벌을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겠지만 그걸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넓지 않은 지저 통로에 커다란 시체를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내 기동에도 문제가 생기고, 살덩이가 부패하며 악취와 가스를 유발할 것이다.
영주가 공기를 정화하는 마도구를 지원해주긴 했지만, 효과가 얼마나 강한지 판명되지 않은 상황에선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에잇! 고민해 봐야 어쩌겠어? 일단 가져가자."
"가져가? 도시로?"
"아니. 앞으로. 덩치가 큰 놈들이 사는 데니까 여기보다 커다란 공간이 있을 거야."
소피와 리소테는 동체에서 내려 챙겨온 밧줄을 마그마 드레이크 앞발의 겨드랑이 부분과 내 허리 부분에 묶었다.
광산 도시답게 산업용 밧줄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일단 챙겨는 왔는데, 바로 쓰게 될 줄은 몰랐군.
길이가 넉넉하지 않아 기동 중에 궤도가 드레이크의 사체를 훼손시키겠지만 그냥 방치하고 전진하는 것보다야 나아 보였다.
***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베르제스. 괜찮아?"
부정.
어제 두어 번의 전투륻 더 치른 후, 뒤에 매달린 사체가 여섯 개로 늘었다.
한 두 개일 때야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역시 숫자가 늘어나니 출력이 점점 딸리는 게 느껴진다.
아직까진 조금 버거운 정도지만, 여기서 더 늘어난다면 기습당했을 때 시체의 무게에 휘둘려 대처가 늦어질 게 뻔하다.
이제 밧줄도 모자라고, 다음에 만나는 녀석은 진짜 그냥 버리고가야 될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이렇게 시체를 끌고 다니는 행동이 주는 이점도 있었다.
내 뒤로 생기는 거대한 피의 길과, 그 아래 두 줄로 나 있는 궤도 자국.
감각이 좋은 몬스터가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흔적이다.
조만간 피 냄새에 이끌린 놈들이 몰려오기 시작할 테지만, 그런 무리를 한두 차례 격퇴하다 보면 이 통로를 죽음을 부르는 악마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되겠지.
일일이 도료를 뿌리며 마그마 드레이크를 찾아 죽이는 것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될 것 같다.
"앗, 앞에!"
내 투영 마법으로 표시되는 광경을 보고 리소테가 손짓을 한다.
길었던 외길의 끝.
소피의 예상대로 대공동(大??)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우와……."
높지 않은 천장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소피가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럴 만하다.
공동의 크기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땅속에 있는 공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넓이다.
이 세계에서의 건물 중에 이곳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건축물이 있을까?
전생의 경험과 비교해 봐도, 대부분의 건물에 층이 나눠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곳에 비할 곳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구불구불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다 보니 여기가 산의 어느 지점인지 감이 오질 않는군.
어떻게 이런 공간이 만들어진 거지?
땅을 파고 사는 동물의 생태라고는 개미굴밖에 모르지만, 이런 공동은 부화장이나 먹이 저장고, 혹은 여왕 개미의 방처럼 특수한 목적이 있는 공간이라는 인상이 있는데 이곳은 그런 낌새도 없다.
시체를 이끌고 공동의 중앙까지 이동해 본다.
드넓은 공동의 벽엔 우리가 지나온 통로 외에도 대여섯 개 정도의 통로가 뚫려 있다.
일종의 교차로 같은 지점인 듯하다.
"어떻게 이런 걸 다 만들었을까?"
"……그러게."
마냥 들뜬 소피와 다르게, 리소테의 목소리는 조금 낮게 떨린다.
그녀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지금까지 만난 마그마 드레이크는 적극적으로 내 동체를 씹어먹으려 들었기에, 그것들은 흙이나 돌을 주식으로 삼고 우리가 지나온 정도의 통로는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드레이크의 성체는 거대한 몸집 탓에 유체처럼 천장에 붙어서 이동하진 못했지만, 잠시간 벽을 타고 이동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기에 자신의 체고보다 3~4배 정도 되는 굴을 파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이 대공동은 명백히 수상하다.
연령대에 불문하고 이곳을 교차로로 사용하며 흙과 돌을 파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간이 넓어지고 깊어졌다기엔, 천장 부근에 있어야 할 초기 통로가 보이지 않는다.
지저 생물의 신비한 본능으로 일정한 크기의 굴을 파고 서식지를 구축할 수는 있어도, 이런 크기라면 드레이크 유체가 수 세대동안 교대해가면서 천장을 넓혀야 한다는 건데, 그게 과연 합리적인 추론일까?
그렇게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보다는, 어떠한 존재가 만든 공간이 모종의 이유로 방치되어 마그마 드레이크의 서식지로 변했다는 흐름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소피……. 다른 데로 들어가려구?"
곳곳에 뚫려 있는 통로에 흥미를 보이는 소피와 불안해 보이는 리소테.
이전에 소피가 말한, '진짜 모험가'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런 공간의 존재는 대발견의 전조라 할 수 있었다.
이곳은 엄청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단체가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든 지하 시설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몬스터든, 악마든, 천사든.
영지군이 이곳을 먼저 찾아냈을 가능성도 없었다.
인류 사업으로 추정되는 거북 토벌의 여파로, 충분한 전력을 운용할 수 없던 영지군은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광산 내부까지 흘러들어온 마그마 드레이크를 쫓아내는 게 최선이었겠지.
궤도 동체로 하루 가량 들어와야 하는 범위까지 탐색할 여력까진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런 공간을 발견했다면 영주와 지휘관이 2주 동안이나 드레이크의 서식지를 탐색해야 하는 우리에게 언급을 안 할 이유가 없다.
"글쎄……. 어떻게 할까."
소피는 뺨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한다.
크기를 알 수 없는 시설의 탐색.
의뢰 내용에 중간 보고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자는 일주일치 식량 밖에 없었고, 오늘까지 이틀치를 소비할 예정이다.
물론 돌아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니, 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우리가 탐색할 수 있는 범위는 약 하루 하고 반 나절 정도 떨어진 영역까지다.
식량 절약은 대식가인 소피의 정신적 피로 증대와 전투력 하락이 의미 있을 정도로 나타나기에, 지금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신중해야 하는 상황에선 고려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돼지인 줄 알아!"
"어, 무슨…? 혹시 베르제스가 그랬어? 나빴다, 정말."
부정.
나는 그런 생각 안 했다.
사람이 밥을 잘 먹고 다녀야 된다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가.
생각을 전달하는 능력의 정확도 탓이다.
억울하군.
그러고 보니 소피가 마그마 드레이크를 꾀어내기 위한 식재료가 있었다.
빵은 당연하게도 방부제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온도가 높은 지저에선 상했을 확률이 높지만, 육포는 식량으로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지긴 했어도 리소테의 마법이 있다면 문제없다.
그녀가 몸을 씻을 때 쓰는 마법을 이용한다면 맛이 조금 맹맹해지더라도, 먹어서 탈이 나지 않을 정도로 청결하게 만들 수 있다.
"아니. 지금은 의뢰가 우선이야. 철광석이 없어서 곤란해진 사람들이 많을 거야."
하지만 소피는 시설 탐색보단 광산 정상화를 우선했다.
리소테가 안도의 한숨을 쉰다.
마그마 드레이크가 버젓이 돌아다니니, 말도 안 되게 위험한 몬스터가 튀어나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나 보다.
"이 동굴이 어디로 도망가는 건 아니잖아? 나중에 다시 오면 되겠지."
"나중에? 광산이랑 이어진 통로가 막히면 여기 어떻게 오게?"
"저기는 원래 없던 입구가 뚫린 거니까, 어딘가에 진짜 입구가 있을 거야. 그걸 찾아보자."
진짜 입구라…….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지 못한 세계라곤 해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지하 시설의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을까?
타페모이 영지의 광산은 동네 뒷산에 뚫린 작은 굴이 아니라 거대한 산맥의 일부분에 자리잡은 몬스터의 둥지다.
경사진 광산과 굴엔 꺾어지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직선 거리로 따지자면 영지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위치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깊은 땅속에 이만한 공동을 가진 시설의 입구는 다른 영지에서 찾아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경우에 따라선 아예 다른 나라에 있을지도.
"그, 그래도 일단 지금?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그래."
내 생각을 읽은 소피가 자신 없다는 듯 말한다.
'그냥 괜히 그렇다.'
중요한 일을 처리하거나, 무언가를 탐구함에 있어서 가장 멀리해야 하는 자세다.
하지만, 그녀의 직감에 도움을 받은 것이 최근의 일이니 일단 따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지금은 무려 용사의 직감이다.
기회가 있다면 언제고 다시 올 수 있겠지.
지금은 우리가 지나온 통로를 도료와 피로 물들이는 데 집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