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1.61
* * *
영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하인이 두고 간 와인을 직접 잔에 붓는다.
잠시간의 정적.
가라앉은 분위기.
"말이 너무 과했군. 내 소피 경을 겁박하려던 것은 아니오. 세상을 위기에서 구해낼 용사에게 그런 짓을 해봤자 무에 쓰겠소. 그저, 이번에 소피 경이 발견한 유적은 덮어두고 싶다는 뜻을 전하려 했던 것이오."
"그것도 숨기신다고요?"
"그렇소. 물론 추후에 탐색은 진행할 것이오. 하지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광산의 정상화고, 철광석을 우리 왕국 곳곳에 공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외다."
그리고 '기품있고 교양있는 존귀한 지배층'끼리 몰래 지하 시설에 들어가 잊혀진 과실을 사이좋게 나눠 먹겠지.
"내 소피 경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소. 몬스터에게 가족을 잃은 그대의 입장에선 우리가 그런 힘과 무기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게 불합리하게 느껴질 것이오. 화도 나겠지."
"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오. 이전엔 힘이 없는 사람은 사람과 몬스터 양쪽에게 죽어갔소. 베를 곯고 병에 걸려 죽는 자들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고. 지난 시간 동안 우리는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고 이제 우리 인류의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는 단계요."
그는 선언했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고,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제국이 세워지고 600년이라고 했나?
내가 봤을 땐 절대 짧지는 않은 시간이다.
오히려 너무 길다.
전생에선 각종 이유로 황폐화된 국가가 다시 일어서는 데까지 50년 내외면 충분했다.
저마다 '무슨무슨 기적'같은 명칭이 붙긴 했지만, 진짜 기적같은 일이라기엔 지역별로 바리에이션이 몇 개 있었다.
그 정도로 사례가 있으면, 그냥 국가 하나가 다시 일어서는 데 걸리는 시간이 50년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곳은 이세계다.'
이 세계는 내 전생과는 다르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지 못 했으며, 산업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각지에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은 도시에서 하루 정도 떨어지면 이미 목숨을 보장 받지 못 하는 수준이다.
작은 마을이라면 적극적으로 쳐들어오는 몬스터와 사투를 벌여야 하고, 소피가 살던 집락촌 처럼 그대로 전멸하는 곳도 심심찮게 있었겠지.
600년.
제국이 세워지기 전엔 사람들의 생활상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력 1400년대와 2000년대를 생각할 게 아니라 기원전 수 세기의 600년 변화상에 바다를 없애고, 몬스터라는 끔찍한 악재를 대입하면 '정말로 노력 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그리고, 모험가 두 명 운운한 것은 잊어주시오. 내 실언을 했소이다. 용사로 지정된 소피 경은 앞으로 빠르게 강해질 것이오. 그렇게 강해질 사람이기에 용사가 되는 거라고 보는 자들도 있소. 조만간 만인이 우러러보고, 인류에 큰 진일보를 가져올 사람이 될 '운명'을 가진 사람이 소피 경이오. 또한 경이 필요를 느껴 지원을 요청한다면 우리가 숨겨온 힘을 기꺼이 제공할 것이니 혹시 모를 염려는 접어두어도 좋소."
"그럼 지금 당장…!"
"때가 도래해 용사의 책무를 이행할 순간에 말이오."
***
의뢰의 나머지 일정을 채우기 위해 보급품을 점검하고 광산으로 돌아가는 소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영주가 알려준 진실은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소피를 설득했지만, 그녀 입장에선 솔직히 600년이나 전에 있었던 사정보단 지금 당장 고블린에게 목숨을 잃은 가족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소피는 사람이고, 그것도 사회에 진출한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다.
갑자기 용사의 책무를 지운다고 해서 온갖 번뇌와 괴로움을 벗어던지고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성인(成人)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지금까지 성과를 내왔다고는 해도, 지금 이 세계의 지배층이 택한 방법이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도 없고.
사람끼리의 전쟁을 막기 위해 무력을 통제하고 힘을 독점한다.
아무리 포장해봤자, 그런 정책은 힘없고 소외된 자들을 몬스터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길로 이어진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곤 하지만, 가족을 희생당한 사람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하고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힘차게 살아가라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말이다.
"소피……."
영주의 말에 따르면 리소테는 수행 마법사의 신분으로써 '이쪽에 발을 담근 수준'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짤막하게 주워듣기로는 그녀가 소속된 학파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마법이나 마도구 따위가 새로 발견되었을 때 그것의 규명과 복원 및 개량을 주로 연구한다고 했으니, 아무리 수행 마법사 신분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게 있었겠지.
때문에 리소테는 소피에게 어떠한 죄책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지만, 소피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아주 약간이라도 연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소피의 가족이 죽은 것은 리소테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고, 소피도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막연하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실체화되어 그녀의 앞에 나타났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에 생각이 복잡해진 거겠지.
내 입장에서는, 이 세계의 방식이 아주 틀리진 않은 것 같았다.
정부 차원에서 총기와 도검류, 폭발물 따위를 모두 통제하는 전생의 기억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은 사람들간의 다툼과 국가 전복을 노리는 무장 단체 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함이고, 지금 당장 몬스터에게서 몸을 지켜야 하는 이 세계의 사정은 또 다르겠지만 이 세계의 무력 통제는 내 전생보다 많이 널널한 수준이다.
모험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돈만 있으면 각종 병장기를 사서 훈련할 수 있고, 전문적인 모험가 쯤 되면 공성 병기 수준의 발리스타를 운용하는 것도 직접 보았으며, 모험가 파티의 인원 제한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
열병기까지 갈 것도 없이, 장전에 힘이 덜 드는 석궁 정도만 나와도 오크 무리정도는 시골 마을 수준에서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모험가 파티 몇을 추가로 고용하면 아예 영토 밖으로 내쫓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환경인 것이다.
이 세계에 필요한 것은 산속에 집락촌을 펴지 않고도 먹고살기 충분할 만큼 식량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는 기계식 병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요는, 과학의 발전.
만일 지배층이 숨기고 있는 힘이 바닷가에 설치된 고대 병기나 초월적인 마법, 오러사용자 같은 특수하고 재해에 가까운 종류라면 몬스터 재해와는 큰 관련이 없어 보였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런 힘을 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왕국 철광석 생산의 대부분을 맡고 있는 타페모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넘어갔겠지.
그들이 막고 있는 것은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강자에게 힘 없는 백성이 휘둘리는 상황일 뿐이다.
일반인이 마나를 다룰 수 없는 모험가의 마지노선인 5급에 준하는 힘을 얻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장병기에 대한 규제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 하면 오히려 장려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지.
***
중간 보고를 위해 도시로 돌아갈 땐 싱글벙글했지만, 다시 광산으로 향하는 중엔 연유를 알 수 없는 숨 막히는 분위기에 수레 위를 가시 방석처럼 여기던 현장 지휘관을 주둔지에 복귀시킨 후 마그마 드레이크의 토벌을 재개한다.
도시로 가져간 다섯 마리의 드레이크 사체는 모험가 길드에 도축과 무두질을 의뢰해놨다.
평상시 같았으면 리소테의 수행과 소피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드레이크의 고기를 먹어 봤겠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에 드레이크의 가죽은 중요했기 때문에 소피를 보채서 사무소 직원에게 가죽이 얼마나 나올 것 같냐고 물어 봤지만, 역시나 직원은 아는 게 없었다.
무두질 의뢰를 맡을 무두장이에게 직접 가서 물어보면 대략적으로 가죽의 면적을 알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없었고 일행의 의욕이 없었기에 포기했다.
한 마리만 벗겨도 소피나 리소테의 몸을 감싸기엔 충분할 정도의 가죽이 나온다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지만, 나는 드레이크의 가죽을 콕피트 내부에 단열재처럼 내장시킬 예정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가죽이 모자랄 가능성이 있었다.
비상시에 사출 마법으로 이탈시킬 수 있는 콕피트.
의뢰를 마치고 영지로 돌아가 석재 동체를 다시 만들어내면서 개선할 콕피트는 적재 공간과 완전히 분리시킬 예정이었기 때문에 리소테와 소피의 몸에 딱 맞는 크기로 만들어도 문제가 없었지만, 자동으로 펼쳐지는 낙하산과 완충용 쿠션이 될 소재에 지금까지 고민해왔던 파일럿 보호 장치들을 모두 때려박으면 전체 크기는 콕피트 내부보다 한참 커질 것 같았다.
지하 시설을 영주가 묻어둘 거라고 단언한 상황에서 단열재로 두 겹을 넣을 마그마 드레이크의 가죽이 모자라게 되면 큰일이다.
구불구불하고 경사진 땅굴이 아니라면, 드레이크의 시체를 어떻게든 10마리 분량은 끌고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지군의 주둔지에 있는 거대한 수레를 몇 대 빌려서 내 동체에 줄줄이 매달아 옮기는 방법도 있었다.
이번에 돌아갈 땐 마그마 드레이크를 최대한 많이 가져다도록 해 보자.
"드레이크를, 많이? 이 녀석들 겁먹어서 이젠 도망가기 바쁜데?"
내 생각을 읽은 소피가 묻는다.
상관없다.
꼭 생생하게 살아 있는 놈을 죽여서 가져갈 필요는 없다.
처음에 가져간 것들을 자세히 보았는데, 며칠 지난 정도로는 심각하게 부패가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물론 고기야 상하겠지만, 가죽은 근육보다는 오래 가겠지.
대공동에 쌓아놓은 시체들 중에 상태가 좋은 놈을 고르면 수량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시쳇더미를 뒤지자구? 윽, 진짜 하기 싫다."
"'내가 하지, 니가 하냐?' 라는데?"
"그, 그렇긴 해두!"
서먹해질 원인이 명확하지 않던 소피와 리소테는 하루 종일 붙어있다 보니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가 많이 돌아왔다.
하지만 마그마 드레이크가 찾아보기도 힘들게 된 건 전혀 다행이 아니군.
며칠 자리를 비운 우리가 막 서식지로 돌아왔을 땐 그래도 몇 마리가 돌아다니긴 했는데, 이젠 진짜로 씨가 마르기라도 한 것처럼 아예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내 동체를 궤도 한 칸도 움직이지 않은 채 하루 동안 대기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녀석들이 광산으로 통하는 구멍 주변을 이젠 완전히 내 영역으로 인식하고, 다가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들려고 행동하긴 했는데, 타이밍이 썩 좋지 않군.
확보한 마그마 드레이크의 시체는 겨우 네 마리 분량이다.
이대로 가면 대공동에서 보물찾기를 꽤 오랫동안 해야겠는걸.
"리소테. 우리 이제 며칠 남았지? 4일인가?"
"오늘까지 4일. 내일이랑 내일 모레, 글피까지만 있으면 의뢰 기간은 끝이야."
"사흘……. 시체 쌓아둔 데까지 왕복 이틀 잡으면 하루가 남네."
"여기 사람들 때문에 며칠씩 잡아먹었는데 하루빨리 올라가도 되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해 보고 싶은 게 있어."
소피의 감정이 일렁인다.
결국은 가려는 건가.
물론, 말리진 않는다.
오히려 나도 가보고 싶던 참에 이런저런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네들만 숨기라는 법 있어?"
"공동 반대편으로 가보려구?"
"응. 딱 하루 만.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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