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1.62
* * *
"소피 경. 고생하셨소."
타페모이 자작은 의뢰서에 서명한 후 소피에게 돌려주었다.
"손이 떨리는군. 몸은 괜찮으시오? 광산에서 오래 있다 보면 기가 허해지는 자들이 많소."
"아, 아니요! 자작님이 빌려주신 마도구 때문에 괜찮아요!"
"그렇소? 소피 경이 그렇다니, 내 더는 말하지 않겠소만. 혹여나 회복 포션이 다 떨어졌으면 신전에 들러보시오. 대금은 내게 달아놔도 좋소."
"괜찮습니다. 마음, 이 아니라, 염려해주신 것만으로도…. 기, 기운이……."
"허허. 굳이 어렵게 말할 필요는 없소. 마그마 드레이크의 손질을 맡기셨다고? 네그맥에 오가던 상단이 일거리가 없어 놀고 있게 된 지 꽤 됐소. 가죽은 준비가 되는대로 보내 드리리다."
"아, 네. 감사합니다. 네……."
지금까지 만난 귀족 중에선 비교적 내추럴한 편인 타페모이 자작의 앞에선 나름 익숙하게 '창피하지 않은 화법'을 쓰던 소피는, 상황이 달라지자 예전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을 보였다.
켕기는 게 있다고 광고를 하는 수준이다.
우리 영주였으면 또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면서 소피를 놀렸을 텐데, 소피가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낌새를 느끼고 적당히 눈치만 주면서 화제를 피해가는 걸 보면 자작도 사람이 됐군.
"엑. 그런 거였어?"
"뭐가?"
"리소테, 나 자작님 앞에서 숨기는 거 있는 티 냈어?"
"응! 아까 엄청 이상했어!"
응접실에서 나왔다고, 민감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소피와 리소테.
애초에어디에 듣는 귀가 있을지 모를 영주성 안에서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부터 글러 먹은 것이다.
뭘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 되는 집락촌에서 살아와서일까.
소피는 비밀을 만들 수 있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은 단지 익숙하지 않을 뿐이고 앞으로 점점 더 나아질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미 성인인 나이에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는 없을 테니 한동안은 이런 식이겠군.
하지만 자작의 반응을 보면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
이 세계의 지배층은 지들끼리 몰래 해먹는 데 익숙해서인지, 소피가 지하 시설에서 뭔가를 얻어온 게 분명함에도 전혀 추궁하지 않았다.
내 궤도 소리가 변한 것을 캐치한 몇몇 기사들의 감정이 꿈틀거렸는데, 이미 내 동체의 출력이 상승했다는 보고가 들어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떤 보물, 혹은 마도구를 얻었는진 알 수 없지만 그 효과가 짐작이 되기 때문에 일단 지켜보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닌 것은 똑같은데.
소피는 나쁜 짓을 처음 저지르는 아이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고, 그에 가담하는 리소테도 가슴을 졸이고 있지만 굳이 우리가 이러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용사가 지하 던전에서 전설의 장비(낡았음)를 획득하는 건 당연한 섭리다.
***
고심 끝에 궤도 동체는 폐기하기로 했다.
그대로 영지까지 끌고 가서 난쟁이 집단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지하 활동이 끝나면 궤도도 끝' 이라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던 소피의 저항이 있었다.
말을 집적적으로 꺼내진 않아도 단순히 감정을 느끼던 시절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거부감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메카에 회전 운동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아예 배제시킬 순 없지만, 지금 단계에선 인간의 신체 구조와 너무 다른 동체를 만드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 같았다.
회전체를 적용시킨다면 기껏해야 무장 수준이 마지노선.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도 어쩔 수 없다.
마침 궤도의 효율성이 지나쳐서 나도 걱정하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이 세상의 주력 병기가 인형 병기로 발전하려면 궤도의 존재는 말로만 모호하게 전해지는 형태가 좋았다.
타페모이의 난쟁이들이 궤도를 완벽하게 복원해내고, 그 제어 기관으로 인간의 상체가 아닌 전차의 포탑을 달아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내 궤도 동체의 목적이 전투가 아닌 작업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말을 하면 전차가 아닌 크레인을 만들어낼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 부분은, 난쟁이들의 생각을 옭아맬 만큼 내 동체의 임팩트가 충분히 인상적이었기를 바라자.
자동화라는 게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이 세계는 아직 사람이 직접 손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갈고리가 달린 외팔이보단 진짜 손이 달린 사람 형태가 쓸모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도시의 성벽 바깥에 차곡차곡 늘어놓은 원래 동체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콕피트 안에 숨겨놓은 수확물을 감추기 위해 약간의 쇼를 벌어야 했다.
먼저 원래 동체의 몸통 파츠만을 장악한 뒤에 쩍 갈라내고, 내부를 비워 공간을 확보한 뒤에 궤도 동체의 상체만을 안으로 삽입.
마트료시카처럼 꼭 맞춰 자리를 잡은 뒤에 몸통 파츠를 밀폐하고 팔과 다리 파츠를 차례대로 끌어온다.
파츠의 무게가 늘었기에 이전처럼 쾅쾅 소리를 내지도 못 했고 속도도 느린 편이었지만, 반대로 거대한 덩어리가 비교적 조용히 움직이며 제자리를 착착 잡아가는 모습에서도 사람들은 나름의 감흥을 느끼는 듯했다.
지금이 밤이었다면 자작에게 받은 마법 랜턴을 두부 파츠로 옮겨 눈에 불을 밝힐 수 있었겠지만,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 오전에도 시선을 끌 만큼 광도가 높진 않았기에 포기했다.
하지만 동체가 제대로 기동했을 때 특정 파츠에 불이 들어오거나, 빛깔이 달라지는 기믹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기에 다음 동체를 만들 때 채택하기로 했다.
동체가 완전히 기동했음을 느낀 소피는 잠시동안 타페모이를 돌아본다.
갑작스럽게 방문한 도시에선 얻은 것도 있었지만 얻지 못한 것도 있었다.
소피는 사람들의 곤란을 해결하고 싶어 했고, 몬스터와 전투가 아닌 방법으로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전자는 해결했지만, 후자는 결국 방법을 찾지 못 했고 뜻하지 않게 용사의 역할에 대한 고민까지 안게 되었다.
솔직히 몬스터를 길들이려고 한 건 시도는 좋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온몸에 적대감을 유발하는 도료를 칠해놓고 흙과 돌을 주식으로 삼는 놈들에게 대체 음식으로 다가갔으니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준비 부실.
딱히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나름 큰 포부를 가지고 자신 있게 도전했던 소피가 낙담한 것도 사실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을 감안하고 다음 기회엔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내면 되는 일이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4급 모험가 두 명으로 소피를 처리할 수 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라 오히려 경계하게 된다.
내 본체의 방어 능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핀포인트로 그녀를 향해 맹인이 되는 저주를 거는 마도구 같은 게 있다면 내 마법 방어력을 우회해 소피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에 만약을 겹친, 그런 가정이라 크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짧지 않은 기간에 걸쳐 막강한 힘을 독점한 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해결할 수 없는 위기란 무엇이며 그걸 소피가 어떻게 해결하게 될 건지가 문제다.
리소테는 이번 의뢰엔 별 볼일이 없는 듯 보이지만, 처음부터 그녀의 목표는 수행 실적이었다.
광산에서도 열심히 수행 일지를 끼적이던 그녀는 이번 여정에서도 나름대로 얻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마그마 드레이크와 정신없이 싸울 때에도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그녀 덕에 몬스터 백과의 항목에 몇 줄이 추가된다든가.
하지만 우리와 합류한 목적이었던 리미터 해제 마법진의 간략화 및 발동 간소화는 당장 중지되고, 멀미약의 개발을 우선하게 됐다.
바지런한 리소테는 이미 멀미약의 바리에이션을 몇 개 만들어 밑준비를 끝내놨고, 영지로 돌아가면 레시피에 따라 실제로 조합해서 스스로의 몸에 실험할 예정인 듯하다.
희미하게 뒤섞인 내 생각의 흐름을 음미하는 소피는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
잠시 우두커니 서있는 우리를 구경하는 사람들.
도시의 성벽에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린 소피의 뇌리에 짧은 개념이 스쳐지나간다.
집.
쉬는 날이 있긴 하지만, 숙소에서 생활하는 모험가나 일용직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한가하지 않다.
당장 벌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어중간한 시간에 우리를 구경나온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각자 집이 있는 도시민들이겠지.
위험한 산속 집락촌에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사람들은 진정 부르주아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피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여든 사람들이 보내는 관심과 두려움, 호의, 경외 따위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을 삶이었고, 그녀가 느끼는 것은 약간의 시기, 그리고 커다란 동경이었다.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삶.
그녀가 잃은 것.
"집을 사야겠어."
"집? 네그맥에 눌러앉으려고?"
"응.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영지에서 나고 자란 거니까. 그리고 돈도 많잖아. 원래도 많았는데 이번에도 잔뜩 받았는걸."
소피가 웃음을 띠며 어깨를 으쓱 한다.
돈.
돈이야 정말 많이 받았지.
내열재로 사용할 마그마 드레이크의 가죽에, 타페모이 자작이 공짜로 주기로 한 철광석으로 돈이 꽤나 굳을 예정이었기에 집 하나 사는 건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는다.
의뢰를 성공적으로, 신속하게 마쳐 기분이 좋아진 자작이 이것저것 퍼주려는 걸 소피가 자꾸 거절한 게 오히려 적절한 방향으로 도움이 됐다.
집을 사겠다는 그녀의 결정엔 대찬성이다.
우리에겐 이번에야말로 긴 시간 동안 휴식이 필요하다.
소피는 백과사전부터 제대로 독파해야 하고, 그것을 넘어 몬스터에 대해 스스로 체득화시킬 기간이 필요하다.
하는 김에 역대 용사의 업적과 인생을 담은 책 같은 게 있으면 그것도 읽어봐야 할 것이고.
사실 그쪽은 용사 임명을 받았을 때 바로 찾아봤어야 했는데, 성녀가 휙 와서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가버리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무시하고 말았다.
자작의 이야기로 보아 용사들은 용사 나름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 듯하니, 소피가 앞으로 헤쳐나가야할 길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리소테가 멀미약을 배합하거나 마법진에 대한 연구같은 걸 하기 위해서도 여관 방보단 제대로 된 자신의 방이 있는 게 나을 것이고, 나 역시 이번 동체는 시간을 길게 잡고 꼼꼼하게 만들 생각이라 집을 구할 시기는 지금이 딱 좋은 것 같다.
어떤 집에 살 건지는 또 고르고 골라봐야겠지만,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사서 내 동체를 놓아둘 것도 아니니 금방 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