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65화 (65/65)

〈 65화 〉 1.63

* * *

단 하루.

평소에 묵던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공중목욕탕에서 묵은 때를 벗겨낸 후 침대에 지친 몸을 누이고 쉴 수 있었던 것은 복귀 당일 단 하루 뿐이었다.

다음 날은 해가 뜨자마자 경비대에게 호출당해, 한층 거대해진 내 동체를 다른 장소로 옮기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새로운 울타리는 경비대가 준비해주었고, 옮기는 장소도 이전에 동체를 놓던 자리에서 아주 조금 옆으로 이동했을 뿐이었지만, 주말에 잠에서 덜 깬 정신으로 차를 빼던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때엔 '이런 좁은 주거지에 꾸역꾸역 차를 주차시켜야 하는 우리네 사정'이라는 생각으로 넘기고 말았는데, 그야말로 죽었다 깨어나도 그놈의 사정은 변하질 않았다는 생각에 괜히 서럽기까지 했다.

지금이야 마땅히 주인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땅이나, 영주 소유의 아주 값싼 땅을 매입해 건물을 올리고 그곳에서 살 수 있는 자금이 있기 때문에 전생과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이 세계에서 그러한 자연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피곤한 일이다.

몬스터의 위협과 험악한 치안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성벽 안과 밖의 차이는 크다.

집은 성벽 안에.

그리고 내 동체는 성문 옆에.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벽의 증축 없이 도시 안에 격납창고를 짓고, 이동 동선까지 포함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네그맥의 주민에게 너무나 큰 민폐가 될 것이고, 넓은 의미에선 누군가를 성벽 밖으로 내쫓는 셈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성문에서 떨어진 곳에 격납 장소를 따로 마련하자니, 긴급시에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빠르게 이동해 동체에 탑승할 수단이 없었다.

오로지 주거지와 동체 보관 장소를 오가기 위해 말을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동체를 옮기고, 잠이 깬 김에 들른 모험가 사무소에선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젊은것들이 벌써부터 게으름일 피우고~, 하는 식의 핀잔 겸 인사를 건네던 그는 웬일로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영주가 호출한다는 말만을 전달하고 떠나갔다.

나름 용사 대접을 해주는 걸까.

타페모이에서 이미 의뢰 완료 확인을 받았기 때문에 네그맥의 모험가 사무소에선 서명된 의뢰서를 보여주는 정도의 절차만 밟았다.

사무실의 직원이 은근한 눈치를 주면서 앞으로도 힘내라고 하는 걸 보면 소피가 용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것 같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앞으로 귀족이나 모험가 길드 등의 단체에서 나름의 호의적인 태도를 기대해 봐도 좋을 듯 싶었다.

그 후엔 숙소로 돌아와 급하게 '눈곱 정도만 떼는 정도'로 치장을 마치고 영주성으로 직행.

이른 오전에 호출을 받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성에 도착했지만 한창 때 여성 두 명에 슬라임이 낀 조합의 리듬은 어쩔 수 없었다.

영주의 용무는 다름 아닌 푸념과 아쉬운 소리였다.

그래도 우리 영지민 중에 용사가 나왔는데 어떻게 기별 하나 없이 장기간 의뢰를 받고 가버릴 수가 있나, 내가 그 소식을 다른 사람한테 듣는 게 맞느냐, 평소에 내가 그렇게 섭섭하게 대했느냐…….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이야기의 대체적인 골자는 그런 잔소리였다.

우리 일행도 나름의 사정이 있긴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었다.

성녀라는 게 갑자기 와서 별다른 설명도 없이 용사 자리 떡 하나 쥐어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는데 뭘 어쩌겠는가.

소피는 억울해서 볼멘소리를 하는 영주에게 말대꾸를 하려 했지만 내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다.

내가 이 도시에 처음 흙 동체를 끌고 온 날부터 지금까지, 영주의 말대로 그가 우리에게 섭섭하게 대한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도움을 받을 일이 적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영주는 한동안 잔소리를 쏟아낸 뒤에 우리의 추후 일정을 물었고, 집을 구해서 한동안 자기 계발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거라고 답하자 그의 기분이 많이 누그러졌다.

우리에게 조금씩 정을 붙여보려고 하고 있는데, 적당히를 모르고 밖으로 나돌아다니기만 하니 약간 조바심이 난 거겠지.

영주는 후보지를 몇 개 추린 후, 내일 우리의 숙소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다.

소피는 갑자기 불러내서 잔소리를 쏟아내다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돌아가는지, 그 흐름을 잡지 못했지만 어쨌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말대꾸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젊은 그녀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외로움을 쉽게 느끼고 점점 손이 커지게 된다.

그래도 정 아니다 싶을 땐 들이받는 게 맞긴 해도, 늙은이의 푸념을 잠자코 듣는 대가로 민간에게 공개되지 않는 시설이나 부지를 소개받을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가 다른 법이다.

거기에,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영주는 우리에게 과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어쩌면 이 세계의 지배층이 '힘을 독점하는 방법' 중에 이런 식의 포섭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적어도 성 밖 집락촌에서 험한 삶을 살아온 소피가 성 안의 영주에게 앙심을 가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기 때문인 거겠지.

평소대로 꼬치집을 탈탈 털어서 배를 채운 우리는 난쟁이 집단의 사무소로 찾아갔다.

난쟁이는 마그마 드레이크 서식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지만, 일행에게 있어 좋은 기억은 아니었는지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느끼지 못했고, 마도구로 어느 정도 대비까지 세웠지만 공기가 탁하고 습하며 후끈후끈한 지하에서의 생활은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대신 소피는 난쟁이에게 새로운 동체 제작에 대한 의사를 내비쳤고, 난쟁이는 눈을 빛냈다.

"기본적으론 저번 골렘이랑 비슷해요. 다른 점은……."

소피는 가방에서 약간의 그림과 함께 동체에 대한 구상을 담은 종이를 꺼내 설명을 시작한다.

복귀 중에 끈기를 가지고 사념 대화를 나누며 더듬더듬 내용을 정리한, 일종의 아이디어 노트다.

파일럿 보호를 우선한 콕피트.

긴급 탈출 장치와 낙하산.

철근 뼈대와 윤활제로 관리하는 관절.

파일 벙커와 더불어 추가시킬 배틀 체인소.

갑옷과 같은 디자인.

그리고 고대의 마나 도란스.

"도, 뭐라고?"

"어쨌든 그런 게 있대요. 의뢰하다 주워서 챙겨 왔어요."

고대 전쟁에서 나는 소피의 도움 없이도 대기 중에서 흡수하는 마나만으로 거대한 강철 갑옷을 움직이며 격렬한 전투를 수행해왔다.

지금처럼 사출 마법을 사용하거나 버스트 모드 같은 걸 쓰진 못 했지만, 그래도 전장에선 나름 한 끗발 날렸다고 자부할 정도의 퍼포먼스는 낼 수 있었다.

커다란 몸집으로 말도 안 되는 점프를 하거나 순식간에 짧은 거리를 좁히고, 덩치끼리 치고 받는 끈적하고 느릿한 전투에서 상대적으로 민첩한 움직임을 통해 수싸움에서 우위를 가져가거나.

당시에는 그냥 내가 잘나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직접 동체를 만들고 굴려보니 그때 실력의 7할은 내가 아니라 동체가 잘났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대 인간들이 가진 기술의 정수를 쏟아부은 새끈한 강철 동체는 수없이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설계 철학과 메인터넌스에 대한 배려가 들어가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최적의 성능을 펼쳐낼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것이 내 실력의, 소위 '동체빨'이라 할 수 있는 7할 중에서 절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당시 동체에 설치돼있던 '마나 변압기'라고 할 수 있는 마도구에서 나왔다.

대기 중의 마나를 내가 흡수하기 쉬운 상태로 변환시키는, 말로는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어렵고 복잡한 마도구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은 나처럼 대기 중의 마나를 자신의 신체에 맞게 변환시킨 후 원하는 형태로 재구성해 마법을 발현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그 변환 과정을 인간이 아닌 개량 슬라임에 맞춰 진행시키는 마도구를 만든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하지만 우리의 고대인들은 그것을 실제로 해냈고, 기나긴 시간이 지나 정체 모를 지하시설의 잡동사니 창고에 쳐박혀있는 상태에서도 문제 없이 가동할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심지어 전쟁 중 내가 사용하던 변압기는 천사의 공격과 함께 소멸한 듯하니, 이번에 발견한 것은 그 스페어 파츠인 셈이다.

얼마나 꼼꼼한 사람들인지.

이 세상 어딘가엔 그 시절 강철 동체의 스페어도 원형을 유지한 채로 잠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래. 그렇다 치자고. 말만 들어도 대단한 골렘인 건 알겠네."

소피의 설명을 다 들은 난쟁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할 수밖에 없지.

당장 생각나는 기능을 다 집어넣은 꿈의 기체니까.

"그런데. 그래서. 이걸 어떻게, 어느 세월에 다 만들 거냐?"

"그, 그건……. 지금부터 같이 알아봐야죠."

"같이?"

"부탁드립니다."

"허, 참. 돈도 안 될 일을 가지고……. 용사만 아니었어도……."

난쟁이는 혼자서 궁시렁 궁시렁 대더니, 생각을 해본다며 아이디어 노트만 받고 우리를 돌려보냈다.

돈이 안 되는 일인 것은 나도 인정한다.

우리 입장에선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을 박박 긁어모아 들이 부을 생각이지만, 커다란 단체의 의뢰를 받아 각종 특수한 기구나 설비를 제작하는 난쟁이 집단으로선 보수는 그냥저냥인데 시간과 공수는 어마어마하게 투자될 계륵같은 프로젝트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 그런 거였어? 그럼 아저씨가 안 한다 그러면 우린 어떡해?"

"맞아! 수전노 난쟁이가 얼마나 째째하고 깐깐한데."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들은 의뢰를 받게 돼있다.

"지금 저것도 나이 들어서 괜히 그러는 거라고?"

긍정.

그런 셈이지.

거대 메카 제작을 하자는데 그걸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난쟁이도 마음속으론 하고는 싶은데 일단 괜히 한 번 뻗대 보는 것이다.

"못말려, 정말."

진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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