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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1장 Prologue. 삶. 의지.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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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Prologue. 삶. 의지. 좌절.
“하아... 이 쓰레기 게임.”
나도 모르게 게임 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이 쓰레기가 맞으니, 욕을 하긴 해야겠다.
지옥같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찾는 것이 판타지 게임이다. 그렇다면 현실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는 게 정상 아닌가.
물론 세계관이야 어두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주인공이 어찌저찌해서 더 밝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지금까지 하고 있던 게임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완전한 해피 엔딩 따위는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하면 할수록 세상에 희망 따위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아예 이건 배드 엔딩 게임이라고 명시를 해두었으면 그러려니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루트가 찜찜한 엔딩이라는 것은, 스토리 작가의 변태 기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지금 16살이니까..."
나는 이 게임을 11살 부터 시작했었다.
5년. 그러고 보니 벌써 5년이었다.
남들은 DLC를 플레이하러 넘어가는 와중에도, 나는 멍청하게 본편만 플레이하고 있었다. 정말 부질없는 짓이었지.
나는 클릭 몇 번으로 유명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띄웠다. 그리고 내 글 보기를 눌렀다.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Ending. 98. (34)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Ending. 97. (32)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Ending. 96. (35)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Ending. 95. (38)
전부 다 내가 작성한 게임 루트 공략이다.
“이번 엔딩까지 99개…”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검과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 에코니아. 그곳은 검은 마력에 잠식된 괴수, 판타스매터에게 습격당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한 명 이방인으로서 아포칼립스를 이겨내야만 한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높은 자유도와 디테일, 그에 따른 여러개의 엔딩이다. 전투의 흐름, 정치, 인간 관계, 갈등의 해결 방식. 이 모든 것들이 스토리의 분기에 영향을 미친다.
대충 이런 게임이라면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어서 망하기 마련인데... 이 게임을 만든 개발사는 외계인을 고문이라도 한 걸까. 아니, 신을 잡아와서 고문했을 수도 있다. 전투, 일러스트, 개연성, 시네마틱 전부가 흠잡을 곳이 없다.
결국 이 게임은 사람들 사이에서 호평 일색. 하지만 남들은 다 칭찬하는 이 게임에서, 나에게만 불만인 요소가 딱 하나 있으니...
이 게임은 희망이 없다.
"그래도 이거까진 정리해야지..."
극한의 자유도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 게임은 루트 분기를 가르는 선택지가 크게 두 가지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대화문을 선택하거나 동료를 받아들이는 건 전자의 경우로, 매우 친절한 선택지다. 하지만 직업, 행동 패턴, 인연, 갈등의 해결방식... 이런 요소들도 게임의 엔딩에 영향을 준다.
분기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끊임없이 공격하는 적을 죽이지 않거나. 비선공인 적을 10분간 내버려두거나. 위선자를 동료로 받아 배신해 죽인다거나. 이 정도 했으면 결말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지금 정리하는 99번째 루트의 경우에는... 잠재적인 위협 요소를 전부 몰살시켜야 해금되었다. 그런데 엔딩이 참 가관이다. 복선도 없이 나타난 흑막이 모든 것을 망치고 도망쳐버렸다.
나는 그 결말을 보고 스토리 작가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혹시나 저 엔딩이 버그는 아닐까, 그런 생각에 한 번 더 플레이한 게 오늘이다.
물론 그 엔딩은 당연히 버그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열받네..."
이딴 개쓰레기 게임이 어떻게 히트한걸까.
이제는 따지고 싶어도 따질 곳도 없다.
왜냐. 그 잘난 게임사가 증발했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DLC 4개를 더 내놓고서 말이다.
* * *
99번째 공략글을 전부 작성하고 알트 탭을 누르자, 바탕화면에는 그 캐릭터가 있었다.
곱게 뻗어나가는 은발.
신비로운 연보라색 눈동자.
겨울을 깎은 듯 고고하고 신비하며.
부서지기 쉬운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사람.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이 게임의 악역 여왕이다.
나는 이 캐릭터의 해피 엔딩을 보고 싶었다.
악역으로 출현하긴 했지만... 그녀는 이상적인 여왕이다. 이미 세계관이 멸망 직전인지라 원흉으로 '당선'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내가 수많은 루트를 찾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캐릭터다. 모두가 행복한 그런 이상적인 엔딩이 있다면 여왕 역시 행복해지지 않을까. 이 생각이 내 미친 짓의 시작이었다.
도중에는 내 마음속 기대치를 하향 조정해서 여왕만이 살기라도 하는 엔딩을 바랬건만, 내 우상인 그녀의 생존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캐릭터보다 더한 악역이 살아남는 경우도 많지만...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그녀만큼은 언제나 19세의 겨울에 죽는다.
이 결말은 99번 내내 항상 유지되었다.
아무리 그녀가 현명한 판단을 하더라도, 게임 내 서사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하아..."
아무 이유 없이... 알트 탭을 한번 더 눌렀다.
하지만 이건 실수였다.
글을 쓴지 3분도 안 되었어도, 그 자식이 댓글을 달아두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ㅇㅇ (102.28) : 와, 미친 아셰리아 킬러. 또 찾았네? 진짜 이 정도면 여왕년을 존나 싫어해서 이러는 거 아니냐 ㅋㅋ
저 개년인지 개놈인지는, 항상 내가 글을 올리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와서 나를 놀린다.
내가 싫어하는 건 아셰리아가 아니다.
... 더럽게 부조리한 이 게임 그 자체지.
ㅇㅇ (210.96) : ㄹㅇ 참신하게 미친 새끼.
ㅇㅇ (222.22) : 본편 매드 사이언티스트.
ㅇㅇ (114.32) : DLC에서 본편 루트 파훼법을 적용해서 잘 써먹고 있습니다. 덕분에 루트 몇 개 더 열었네요. 감사합니다.
이젠 화도 안난다.
난 이 짓을 그만둘거니까.
이 게임을 더 잡고 있어봐야 쓸 데가 없다.
나는 이제 내 삶을 일단 살아보려고 한다.
…….
산다는 것.
11살의 나는 전혀 하지 못했을 발상.
그 시절의 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와 어머니를 하루가 멀다하고 괴롭히는 괴물 새끼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도 어쩔수없는 괴물의 씨앗이었다. 생각하는 것부터, 행동하는 것까지. 나 자신에게 토가 나올 정도였다.
... 참 죽고 싶었다.
그런 내 앞에 나타난 아셰리아 에우데미아라는 여왕님은... 외형도 아름답긴 했지만, 그 성정은 내가 바라던 삶의 형태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이성.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한 직관. 그 두 가지로 올바른 선택지를 고르는 자. 내가 되고 싶었던 인간상 그 자체가 있었다.
한 명 위정자로서 올바른 선택지만을 골라 행하던 여왕이었다. 그 선택지들은 하나같이 이치에 올바른 길이었다. 얼핏 보기엔 잔혹해보이는 판단도 있었지만, 이 게임의 세계관이 그 이상으로 어두웠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선택했던 루트에서... 오라버니의 검에 찔려 죽었다.현명한 여왕이 죽게 된다니. 어린 나는 그녀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했다. 게임 속 세상에 지는 기분이 들어 미친 짓을 시작해버렸다.
그리고 5년이 흘러 지금...
나는 게임 속 세상에 결국 져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결국 게임일 뿐이니까.
내가 욕을 하긴 해도... 내가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해준 게임이고, 어두운 시절의 등불이 되어준 그녀다. 덕분에 난 지금도 살아있다.
게임에 과몰입한 인간일 수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하찮은 이유로 나는 살아갈 의지를 얻었다. 그러니 한 번 살아보려 한다.
물론 실패하거나 꺾일 수도 있겠지.
뭐...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하련다.
* * *
라고 감히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
살아가기로 결심했던 과거의 내가, 겨우 7년도 버티지 못한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떤 말을 할까.
... 따지듯이 말하긴 하겠지. 그래도 지금 내 주변의 상황을 본다면 내심 이해는 해줄 것이다.
나름대로 명문이라 불리는 대학, 적당한 인간관계, 사회적인 인정.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랍면 충분히 행복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유감스럽게도.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인간일 뿐이다. 나는 지금 이 삶을 살아갈 의지가 사라졌다.
"... 그 뒤로 너무 힘들어하네."
"그럴만도 하죠."
친구 녀석들의 대화소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
술을 따르는 소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잠에서 깬 나는 지금 어딘가에 볼을 대고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내 볼에는 주점 특유의 플라스틱 테이블의 감촉이 느껴진다.
술에 취해서 잠들었나 보다.
"아주머니는... 좋은 분이셨으니까요."
"후우..."
잠은 깼지만... 일어날 분위기는 영 아니었다. 저 이야기가 하필이면 내 이야기니까.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버리면, 나에게 미안해 할 책임이 없는 저 녀석들이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나에게 사과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것 따위 바라지 않는다.
"하늘은 정말… 좋은 분만 먼저 데려가네요."
"그 뺑소니범. 빨리 잡아야 하는데..."
"잡아도 뭐가 달라지지는 않잖아요."
"... 그건 그래.
…….
분명 이해는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욕구와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감정을 휘두르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서로 다른 말이다.
저 단순한 명제를 하나가 인간이 덜된 쓰레기들의 패악질을 용납하게 해주지는 못 한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다.
...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너무나 미력한 존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 이제 쟤 깨워서 집에 보내자. 늦었어."
"그래야겠죠…"
그래도 다행이다. 일어날 타이밍을 애써 잡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 녀석들이 날 깨우려 한다.
한 녀석이 내 어깨를 흔들기 시작했다.
“괜찮냐. 너 오늘 너무 마셨어. 집에 가자.”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오빠”
최대한 잠에 들었던 척을 하며 일어났다.
내 앞에는 김지후과 이아인. 대학에 입학한 후로 알게 된 동기와 1년 차이 후배님이 계셨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로 집 안에서만 지내는데... 이 녀석들은 그런 날 집 밖으로 끌어내려고 술자리를 만드는 좋은 녀석들이다.
“너희들이 돌아가는 게 더 오래 걸리잖아. 항상 술 약속은 내 집 근처로 잡으면서... 내 집은 내가 알아서 갈게.”
“또 센 척은...”
“무슨 일 생기시면 말해야 해요”
내가 녀석들의 호의를 마다하니, 오히려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이다.
다른 운은 더럽게 없어도... 친구 복은 있구만.
“나 안 취했다, 이것들아.”
나는 술 취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다는 말을 하며 일어났다. 어차피 집까지는 멀지도 않으니, 걸어가면 금방일 것이다.
주점 앞에서 친구 녀석들과 간단한 인사를 한 후, 나는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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