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3화 (3/215)

〈 3화 〉 1­2. 소녀의 첫 만남.

* * *

1­2. 소녀의 첫 만남.

달리기 전에도 지쳐있었기에...

긴장이 풀어진 지금은 완전히 힘이 빠졌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길 지경이다.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반쯤 감긴 내 두 눈에

두 사람의 형체가 들어왔다.

“이 사람. 전혀 안 괜찮아 보입니다.”

“저도 확인차 물어보는 거예요. 아샤.”

차분하지만 축 늘어진 목소리.

방울처럼 울리는듯한 목소리.

두 목소리의 주인은 약간 어린 여자애인 듯 한데, 차분한 목소리의 아이가 존대를 쓰는 걸 보면 후자의 소녀가 훨씬 높은 사람인가보다.

차분한 목소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행색이 수상합니다. 타국의 범죄자일 수도 있는데, 기사단에 넘겨서 처리할까요?”

방금 그 마녀도 날 죽이는 게 낫니 어쩌니 했는데, 이 꼬맹이도 처리니 뭐니 말하고 있다.

죽고 싶은 건 맞는데 존엄성을 좀 고려하며 죽여주면 좋겠다. 굳이 산 채로 구워지거나, 범죄자로 몰린다거나, 늑대밥이 되고 싶지는 않다.

“일단 사정부터 듣는 것이 법도입니다. 여기 계신 이분은 왕성의 제 방으로 옮겨주세요.”

다행이다.

인도적인 처분을 약속 받았다.

“하아···. 귀찮게스리.”

“아샤, 적어도 그런 말은 속으로 해주세요.”

두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눈을 뜨기 무서웠다.

분명히 이불을 덮지 않아서 악몽을 꾼 게 아닐까. 산 채로 안쪽부터 익힌 로스트비프가 되는 경험은 분명 꿈이겠지?

거기다 타르에 덮인 늑대에게 쫓기다니. 여기가 게임 속 세계일 리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고급스러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지는 걸까.

…….

대사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낯익은 천장이다.”

반대로 말하면 내 집 천장이 아닐까.

그런 안일한 믿음은 곧장 배신당했다.

'… 더럽게 고급스럽네.'

엄청나게 높은 천장.

군데군데 칠해진 금색의 선.

여기저기 보이는 고풍스러운 장식.

“낯선 천장이다.”

나는 풀이 죽은 채 대사를 수정했다.

"후우…"

한 숨을 내쉰 나는, 헛차­ 소리를 내며 상체를 세웠다. 내 옷은 새 것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고,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밤이었다.

탁.

책을 덮는 소리.

그 소리의 진원지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 의자였다.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작은 소녀였다.

쭉쭉 내려오는 가느다란 은발과 연보라색 눈은 새하얀 얼굴과 더불어 신비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더해 눈이나 표정에 생기가 없어서 인형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왠지 모를 그리운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천장 이야기를 들은 거 같은데…

약간 고개를 갸우뚱 한 채로 날 보고 있다.

인형같이 생기 없는 표정으로.

“아···. 안녕하세요?”

그 빨간 마녀와의 첫 대면도 이랬었던 것 같은데... 로스트비프가 되던 그 기분이 스멀스멀 느껴져서 몸이 떨린다.

“일어나셨네요.”

“혹시 구해주신 분인가요?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소녀는 음, 하고 작게 목을 울렸다.

그리고 들뜬 듯이 말을 시작했다.

“신기한 복장을 하고 계시더군요. 옷의 차림새는 이곳에서 상식적이라고 하기엔 힘들고. 옷감은 기술적으로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옷은 내구성이 좋은데도 살갗에 거부감이 없었고, 내의는 신축성이 좋은데 방수성도 뛰어나더군요.”

이 아이는 본인이 무엇을 말하는지나 알까.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소녀가 태연하게 남자 옷과 팬티 재질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로.

의자를 당겨와 얼굴이 조금 가까워졌는데, 표정이 읽히지 않아 겉보기 나이에 맞지 않는 압력이 느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나 존재하지 않는 문자가 적힌 화폐도 있었습니다.”

은발의 소녀는 물에 다 젖은 내 지갑을 슥­ 하고 훑었다. 잠들 때 주머니에서 지갑도 안 꺼냈었나 보다.

“혹시 다른 세계에서라도 오신 건가요?”

이세계.

다른 세계.

계속 의심하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있던 단어.

나는 술을 마시고 잠을 잤을 뿐인데... 이세계로 끌려왔다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일까.

“좀 혼란스럽네요. 여기는 어디인가요?”

“여기는 에우데미아 왕국입니다. 연대는 해방력으로 196년입니다.”

아.

거짓말은 아닐까.

방금 늑대들은 그 게임 속 재앙은 아닐까, 내심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우데미아면 게임 속 배경이 되는 그 왕국. 소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꿈도 희망도 없는 똥망겜의 세계로 온 것이다.

어떤 루트를 타도 누군가는 불행해지는, 한결같이 쓰레기같은 엔딩뿐인 그 게임에.

“아….”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

내가 뭘 잘못 해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상황은 이해하지만 납득하기가 싫었다.

…….

그래도 질문에 대답은 해줘야겠지.

내가 만약 이세계 전이물의 철없는 주인공이라면, 이 상황에 들뜬 채, 온갖 기대를 하면서 정체를 숨기려 하겠지. 하지만 내 앞의 소녀는 물증을 들이밀며 나를 말로 몰아붙인다. 이런 상황에서 숨길 수 있을 리 없다.

거기에...

망할 예정인 나라에서 새로운 삶이라니. 원래의 세계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나다. 그런데 칙칙한 미래뿐인 에코니아에서 나만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

말하자.

그리고 되는대로 따르자.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

이렇게 생각하니 나쁘지 않다.

“아마 그런 것 같네요."

하지만 소녀의 반응은 내 예상 같지 않았다. 나름대로 놀라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상식적인 일인가요?"

본인이 추론해놓고도 믿지 못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아니면 에코니아... 그 망겜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일상적이려나?

“저희 세계에서는 ‘표류자’라 부릅니다. 사학이나 신학 논문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에요.”

“역사적인 인물 중에 표류자들이 계시거든요. 공식적인 발표 상으로는 50년에 한 명꼴로 오신다고들 하더군요.”

내 질문에 소녀는 약간은 들뜬 어조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 알려져 있어도 통계까지 아는 걸 보니 참 신기하다.

혹시나 자신의 관심 분야인 걸까. 그 이후로도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나는 적당히 소녀에게 맞장구를 치며 하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야기를 끝마친 소녀가 나에게 말했다.

“너무 저만 이야기하는 것 같네요. 혹시 다른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사실 궁금한 거야 정말 많다.

그런데 왜 뜬금없는 걸 물어보고 싶을까.

“정말 실례되는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대답할 수 없지만 않으면, 대답해드릴게요.”

초등학생 즘인데 질문에 조건을 붙인다니.

알고 보면 이 소녀는 마녀가 아닐까?

그 빨간색 여자처럼 말이야.

“나ㅇ···, 연ㅅ···, 춘추가 어떻게 됩니까?”

“음. 문화가 다른 게 체감이 오네요. 사교모임의 작업용 멘트로 실격입니다.”

작업용 멘트라니, 단단히 오해받았다. 난 아동·청소년 외모에 애착을 갖는 변태가 아니다.

그나저나 내 앞의 소녀는 저런 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저런 걸 보면 이 소녀의 육신에는 확실히 마녀가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그렇다면 춘추라니, 나이랑 연세도 방금 말씀하시려다 관두셨죠?”

팔짱을 끼며 나를 보는 소녀. 이 방 은근히 고급으로 보이는데… 초대면의 귀족 영애를 화나게 한 건 아닐까.

'그런데 나이, 연세, 춘추라는 단어를 명확히 이해한다니, 여기 한국아닐까?'

너무 말이 잘 통한다. 역시나 몰래카메라인 걸까. 그 게임을 너무나 잘 아는 아이가 분장한 건 아닐까 하는 희망마저 품는다.

“제가 몇 살로 보이시나요?”

내가 있는 침대로 다가와 한 편에 앉더니 나에게 상체를 들이미는 소녀.

나이에 관해 역질문이라니. 후배들에게 나이 퀴즈를 내는 무서운 여자 선배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대답해야하지. 방금까지의 대화로 깨달은 점이 하나 있긴 하다. 이 소녀는... 거짓말로 속이려 해도 금방 알아챌 것이다.

“겉보기엔 귀여운 10세 근처 소녀이신데, 말씀이 어른스러우셔서요.”

그러니 솔직하게 말했다.

소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창백한 듯 곱게 흰 얼굴에 도는 약간의 홍조.

그런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올해로 열한 살입니다….”

약간의 놀람과 약간의 부끄러움.

이제는 좀 아이답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유지되던 긴장감이 풀려간다.

“흐응. 이제는 좀 나이다우시네요.”

방심해서 쓸데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나이엔 어린애 취급하는 걸 싫어할 건데.'

내심 걱정했지만 고개를 든 소녀는… 의외로 입꼬리가 아주 약간 올라가 있었다. 그래, 아이들은 조금이나마 웃어야 옳다.

“다른 궁금한 점은 있으십니까?”

“나중에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니면 직접 책 같은 걸 찾아보고 싶네요.”

궁금한 것은 많다. 하지만 지금 다른 정보를 습득하면 나는 이 세계에 대한 불안감에 미치지 않을까. 지금은 참기로 했다.

“그럼 이것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녀는 끄덕이더니 다시 표정을 되돌렸다.

그리고 내 왼팔에 두 손을 뻗더니 옷의 아랫단을 걷어 올렸다. 드러난 내 팔뚝에는 내가 모르는 흉터가 있었다.

손등에서 팔꿈치로 향하는 작은 불길. 불길은 점점 커지고 내 팔뚝에서 이르러서는 늑대의 옆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무엇인지 아시겠나요?”

“아...”

꿈 속의 그 새빨간 여자의 짓이 분명하다.

“짐작하는 부분이 있으신 거 같네요.”

소녀는 다시 내 옷소매를 고쳐주었다.

“이 문양은 어떤 마녀의 문장입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는 마세요. 사회에서는 영웅으로서 추앙받고 계신 분의 문장이니까요.”

그 강압적인 빨간 마녀가 영웅이라니.

그 빨간 마녀가 영웅이라면 이 세계는 미쳐있을 거다. 물론 미친 세상이 맞긴 하지만.

“일단 숨겨두시는 게 좋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확인하시고 정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글을 읽으실 수 있다면 도서관에 안내해드리죠.”

... 정말 아이답지 않다.

자신의 말만으론 신빙성이 없으니, 직접 찾아볼 기회를 주겠다는 뜻 아닐까. 친절하네.

“말씀대로 할게요.”

“그 문양에 대해서는 일단 저만 알고 있으니, 언제나 상담해주세요.”

소녀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성함을 못 들었네요.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이시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중세 귀족의 인사법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

“제 이름은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에우데미아 왕국의 제1 왕녀입니다. 반갑습니다.”

순간 굳어버렸다.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게임,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악역 여왕.

그 여왕님의 이름이 이 소녀의 이름이다.

내 어릴 적 동경의 대상.

내가 그리던 삶의 형태.

내 삶에서 눈을 돌릴 도피처.

게임 속 여왕의 얼굴이 소녀와 겹친다. 이 소녀가 자라난다면, 훗날 그 여왕이 될 것만 같다.

설마 그 여왕에게 구해진 거야?

매번 죽기만 하는 그 여왕님?

“그... 표류자님?”

“네?”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게. 여긴 제 방이라서요. 손님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표류자님께서도 그곳에 옮겨서 쉬시는 게 편하시지 않을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방이 어쩐지 고급스럽더라니...

내 눈 앞의 어린 여왕은 바닥을 보며 말했다. 자기 방 침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불편할만도 하다.

“아샤, 이분에게 방을 안내해줘요.”

문이 열리더니 갈색 머리를 단발로 자른 메이드 한 명이 들어왔다. 공주보다는 약간 나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중학생 정도로 보인다.

낯익은 실루엣이다. 이 아이가 내가 쓰러졌을때 처리하니 뭐니 했던 그 메이드인가보다. 나는 메이드를 따라 어린 여왕의 방을 뒤로 했다.

* * *

시하가 나가고 난 뒤.

아셰리아 공주 혼자만이 남은 방.

공주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시하가 남기고 간 지갑을 한참동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후우..."

그녀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비치지 못했던 자신의 들뜬 마음을 삭히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드디어... 만났어."

소녀의 짧은 11년 짧은 삶.

그녀는 철이 든 순간부터 지금껏, 언젠가 이 세상에 찾아올 표류자를 기다려왔다. 그리고 4년 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만남은... 자신이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찍 찾아왔다.

그녀가 표류자를 기다려온 이유.

"과연, 나를 그곳에 데려가주실 능력이 있는 분일까..."

그녀는 어딘가로 향하고 싶었다.

"저를.... 이곳에서 꺼내주세요. 표류자님..."

그녀는...

이 세상을 탈출하고 싶었다.

짧은 11년의 삶 속에서, 평생의 소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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