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4화 (4/215)

〈 4화 〉 1­3. 소년의 첫 만남. 그리고 알현.

* * *

1­3. 소년의 첫 만남. 그리고 알현.

어느 초등학교 앞, 두 시 무렵.

거리로 학생들이 쏟아져나온다.

11세 소년 역시 길을 걷고 있었다.

모친과 단둘이 사는 집으로 가는 길.

학교 앞 문구점을 지나가는 건 필연.

그곳에서 게임을 파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포스터를 본 것 역시 필연일까.

포스터의 전면에는 후드를 둘러싼 캐릭터.

칠흑의 괴물들에 맞서는 금발 왕자.

그 뒤로 여러 인물이 그려져 있다.

흥행 중!

에우데미아 왕국에 닥친 재앙, 판타스매터.

사악한 마력의 힘은 너무나 강대합니다.

재앙으로부터 왕국 전체를 구해낼 순 없어요.

‘끝’은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

당신의 선택으로, 누군가를 구해주세요.

반 친구들의 대화에서 자주 언급되던 게임.

전투가 재밌다.

스토리가 감동적이다.

시스템이 매력적이다.

온갖 호평들이 들려오던 게임이었다.

소년은 그저 평범한 게임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흥행 중인 이 게임은 감히 ‘아포칼립스’라는 표제를 붙이고 ‘끝’을 말하고 있다.

이런 소재로도 흥행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포스터를 멍하니 보는 소년이었다.

“시하야, 무슨 일이니?”

소년을 부르는 친근한 목소리.

한때 소년의 이웃이었던 문구점의 주인아주머니. 소년이 당시 모친과 함께 살던 집은 이 사람이 소개해 줬기에 싸게 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소년은 그녀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어린이가 갖출 예의.

이걸 실천하면 상대하는 어른이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배웠다. 물론, 모르는 사람에게 남발하면 안된다는 주의점도 숙지하고 있다.

“그래, 이 포스터를 보고 있었니?”

“네.”

“흐음, 그러니?”

문구점 주인은 소년이 무언가에 흥미를 보이는 일이 적다는 걸 알기에 신기했다. 소년의 11년 짧은 삶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거 해볼래?”

“하지만 저 돈이 없는데요.”

“생일 선물이라 생각하고 줄게, 가져가렴.”

아이 주제에 남들보다 한 걸음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아이.

하지만 누구보다 밝은 척하는 아이.

그렇기에 더 걱정스러운 아이.

도와줄 수 없어 안타까웠던 아이.

“그게… 생일은 다음 달인데.”

“거절은 세 번까지.였지? 나는 알고 있으니까, 거절은 생략하고 가져가도 된단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문구점에서 취급하기엔 약간 비싼 게임이다. 하지만 주인은 흔쾌히 패키지 하나를 넘겼다.

이 호의는 그저 그녀의 마음속 미안함의 무게를 덜기 위한 ‘값싼’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년에게 이 게임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충분히 ‘값진’ 호의였다.

소년은 방금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친과 단둘이 사는 집을 향해 멀어졌다.

소년은 아직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은 집으로 돌아와서 언제나처럼 씻고, 옷을 갈아입고, 방을 청소한 뒤 게임을 켰다.

평소에도 게임을 자주 해온 소년이었다.

그렇기에 ‘올바른 선택지’로 불리우는 길만을 골라가며 끝을 향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게임 속의 세상인 에코니아의 ‘끝’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우와……”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여왕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몰락해가는 에우데미아 왕국의 여왕.

그녀는 이 게임의 악역으로 출현했다.

“멋있다...”

부서지기 쉬운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겨울을 깎은 듯이 고고하고 신비했다.

하지만 소년의 눈길을 끈 것은 단순히 그녀의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 이오니아 백작. 당신의 영지에서 주조가 흥행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는데… 자네도 연관이 되어있군.

­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 명백한 진실이다. 끌어내어 처형하라. 뒤처리는 재상에게 맡기겠다.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술을 주조한 범죄자들. 백작의 유착 의혹은 지나가는 대사 속에서 사실로 밝혀졌다. 영지민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은 굶주린 백성들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오히려 숙청 당한 백작의 여식에게 중점을 둬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탈바꿈시켰다.

­ 라리사 자작, 스스로 토벌하고도 남을 재앙을 이유도 없이 방치했군.

­ 그 재앙은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폐하, 부디 재고를!

­ …. 변명은 듣지 않겠다. 재앙을 방치하는 것은 중죄, 자네를 파문하고 자네의 동생을 가주직에 앉히겠네.

재앙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던 세계, 각자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게임은 파문당한 당주가 주인공에게 털어놓는 어려움만을 서술했다.

파문당한 당주는 주인공에게 빌붙고 나서야 제 실력을 발휘했다. 소년은 그를 파티원으로 받아들였는데… 더럽게 쎘다.

그녀는 과연 어떤 근거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소년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단 하나하나는 결국에 옳았다.

하지만 소년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게임을 하는동안 끝없이. 게임내 서술은 아셰리아 에우데미아라는 여왕을 악역으로 몰아갔다.

여왕의 선택은 다른 인물들에게는 그저 잔인하게 비칠 수 있으나, 엄연히 게임 속 세상이 그런 선택을 하게끔 종용하고 있었을 뿐이다.

소년에게 아셰리아 에우데미아라는 여왕은...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소년에게 있어 이상적인 인간상.

운명이라는 큰 적에 저항하려는 자.

현실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던 현인.

그녀는 소년의 동경 그 자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게임의 악역으로 출연한 캐릭터일 뿐. 결국 소년이 선택한 루트에서는 끝내 타도되어 사망했다.

그것도 오라버니의 검에 찔려서.

“기운 빠져…”

게임의 엔딩을 봐버린 소년은 의자 뒤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설마 정말로 죽일까, 그런 막연한 기대를 했지만... 기대는 배신당했다.

이내 소년은 생각했다.

"거기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이 게임의 분기는 여러 개 존재한다고 전해들었다. 그 정보가 옳다면 다른 엔딩도 있다는 것.

종이를 한 장 꺼낸 소년은 표를 그려냈다.

그리고 다시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그저 끝을 확인하기 위해 시작한 게임.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게임 속 그녀의 끝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소년은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언제나 합리를 추구하고만 있었다. 여왕은 소년의 이상이 되었고, 소년은 그 죽음은 인정할 수 없었다.

물론, 12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어린 여왕을 만난다는 미래는...꿈에도 모르던 소년이었다.

* * *

나는 눈을 뜨자마자 천장부터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익숙한 우리 집 천장이 아니었다.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잠을 자다가 12년 전 발매된 망겜에 납치당하고, 그 게임의 몬스터인 늑대들에게 쫓기고, 언제나 죽기만 하는 개복치 여왕에게 구해졌다니.

거기다 그 여왕은 아직 공주고, 현재 11살.

"이걸 어떻게 믿어..."

나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두 손은 내 눈 앞의 현실을 잠시동안 가려주었지만... 그래도 내가 처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흔한 가정에서 태어나, 흔한 일을 겪고, 흔한 대학생이 된 흔한 인간일 뿐이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거야...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노크의 주인은 어제의 공주님이었다. 아셰리아 공주는 어제 그 메이드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잠은 편히 주무셨나요?”

“네, 잠자리가 편해서 잘 잤습니다.”

일상적인 인사 이후, 소녀는 특유의 무표정과는 맞지 않게 약간 쭈뼛쭈뼛하며 말했다.

“사실 그게, 아바마마… 국왕 폐하와 알현을 하셔야 합니다.”

갑자기?

내 표정이 적지 않게 이상했나보다. 내 얼굴을 살피던 공주님이 내 의문에 답을 해주었다.

“정신을 잃으셨던 게 외성 근처였었죠. 제가 우연히 외성에 업무가 있어 나갔다가 구해드릴 수 있었습니다만, 그 뒤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귀족들이 저와 아샤가 손님을 모시는 걸 봐버려서요. 제1 왕녀가 정신을 잃은 남자를 방에 데려간다고 조사 탄원을 넣었습니다.“

아샤라면, 지금 공주 옆의 시녀겠지.

정신을 잃은 신원 불명의 남성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는 공주와 시녀. 이렇게만 말하면 무언가 불미스럽다.

하지만 공주와 시녀가 이렇게나 어린데 그런 일이 벌어질까. 탄원을 넣은 귀족들의 머릿속에 약간 돌아버린 것 아닐까.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 속 말을 꺼내버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탄원을….”

"제가 폐를 끼친 것 같네요."

내 말에 공주는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 오히려 내 존재가 아닐까. 거기다 사과를 한다면 그 귀족이라는 인간들이 나와 공주 두 사람에게 해야할 일이다.

공주는 상황설명을 이어나갔다.

"폐하께서는 손님께서 기운을 차리시면 즉시 알현을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국왕이라... 부담스럽지만 공주에게 빚을 지기만 하는 건 싫다. 조사 탄원의 내용이 공주에게 해가 될 내용이긴 하니까.

적어도 내가 증언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왕가 예절 같은 건 딱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있던 곳에선 그런 게 없어서요.”

“괜찮습니다. 그런 걸 신경 쓰시는 분은 아니셔서. 아 귀족들은 좀 신경질적일 수 있습니다.”

"귀족들은... 신경 쓸 필요 없겠죠. 그럼 언제 출발하면 되나요?"

"오랫동안 주무셔서... 벌써 오후입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시고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 * *

하루의 일과가 한창 진행되는 오후. 나는 은발에 무표정인 귀여운 인형과 걷고 있다.

사실 공주님이다.

하하... 에코니아에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바로 그 다음 날 아침부터 탄원 출석이라니. 그것도 악역 여왕님의 8년 전 모습을 한 소녀와 함께.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왜 그러시나요?”

“아, 아뇨. 혹시 탄원에 어떤 분들이 오실지 알 수 있을까요?”

“음….”

공주님이 내 한숨에 반응해버렸다.

이 상황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기에, 궁금하지도 않은 탄원 참석자를 물어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샤가 더 설명을 잘 해줄 것 같아요."

내 뒤통수를 뚫어버릴 듯이 레이저를 발사하던 메이드였다. 대면한 지 겨우 이틀 된 메이드 소녀가 저렇게 나를 보고 있으니, 정말이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메이드가 설명을 시작했다.

"탄원의 발원자는 발람 프라시스와 카를 임페리아입니다."

"역시나 그분들이네요. 요즘 왜 이렇게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시는지."

"그리고 국왕 폐하께서는 사대 장관을 전부 호출하신 상태입니다."

사대 장관이라니.

그저 중역이라는 말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장관이란 단어로 들으니 부담감이 확 늘었다.

"발람 프라시스 공작. 탄원을 넣으신 당사자이자 원수부의 제 2군 장군이십니다."

"재상이신 제드로 프로네시스 공작님도 참가하실 예정이십니다."

"아론 미모스 공작. 사법부의 수장이시자 대법관님께서도 출석하신다 하셨고요."

"기사단장이신 어거스트 라코니아님께서는 원정 중이시기에 불참이십니다."

국왕, 공작, 장군, 재상, 대법관.

안오긴 한다해도 기사단장.

한명 한명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온다.

"당신의 아버지께서도 오시지 않나요, 아샤?"

"아버지께서는 폐하의 전속 비서시니까요."

"설명드리자면... 아샤의 아버지는 왕가업무와 행사를 보조하는 왕궁부 장관이세요."

"저흰 백작가라 다른 장관분들에 비하면 약간 격이 떨어지긴 하죠."

"누가 티오리아의 격이 떨어진다고 해요..."

공주님과 메이드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왕궁부 장관.

게임에서도 나온 적 있는 직책이다.

공식적으로는 청와대 수석 대변인 비슷한 직책이지만, 티오리아 가문은 왕실의 일원들을 호위하는 그림자들을 키우는 곳이기도 하다.

잘 생각해보니... 저 메이드는 게임에서 언제나 악역 여왕의 등을 지키던 그림자와 닮았다.

내 뒷통수를 뚫어버리려는 메이드는 유력 백작가의 영애이자 암살자 집단의 일원....

권력. 무섭다.

* * *

왕성은 크게 네 건물로 구분되어 있다.

국왕의 알현실과 집무실, 국정을 담당하는 부서들이 위치한 본관. 그 본관에는 국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공간인 후궁이 붙어있다.

그런 본관과 후궁에서 약간 먼 거리에. 왕실 구성원들과 귀빈들이 지내는 동관과 기사단이나 병사들이 생활하는 서관이 존재한다.

공주와 메이드의 말을 들으면서 걷다보니, 내가 있던 동관에서 본관까지는 금방이었다.

도착한 본관에는 문이 세 개.

비교적 사람들이 출입이 없는 중앙문.

관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좌우의 문.

좌우의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곤에 절여져 있었다. 공주가 말하길 왼문은 재상부, 오른문은 왕궁부로 통하는 문이라 한다.

여기서도 공무원 일은 꽤나 힘든가보다.

중앙문으로 들어가면 있는 긴 복도를 똑바로 걷다 보니, 다른 방들보다 유독 큰 문이 하나 보인다. 그 앞에는 남자기사와 여자기사가 한 명씩 서서 경계를 서고 있다.

공주와 그들은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기사는 스무 살 근처의 내 또래의 나이. 여기사는 공주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친하게 대했다.

"레온, 이제 알현실에 기별을 넣어주세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공주에게 대답한 남기사는 알현실 옆에 마련된 쪽문으로 들어갔다. 이내 다시 나온 그는 여기사와 함께 큰 문을 한쪽씩 밀어서 열었다.

앞뒤로 길게 뻗은 구조의 방.

홀의 중앙에는 권위를 상징하듯 금색 드래곤이 그려진 붉은 양탄자가 있다.

그 끝에는 넓은 계단이 세 단 정도 있었고, 그 위에는 크고 작은 왕좌가 하나씩 있다.

큰 왕좌에는 금발이 돋보이는 미중년 남성.

왼눈 아래위로 얕게 나있는 세 줄기 흉터.

햇빛을 꽤 많이 받은 듯한 구릿빛 피부.

옷으로 숨길 수 없는 근육.

그는 머리에 왕관을 올린 채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저 사람이 국왕이겠지.

작은 왕좌에는 적발의 여성이 앉아있다.

옆에 앉은 남성과는 약간 키차이가 있다.

표정은 호기심을 가지고 날 관찰하는 느낌?

그런데 얼굴이 너무나 낯이 익다.

왕좌로 이어지는 계단 바로 밑에는 방금의 메이드를 떠올리게 하는 갈색 머리 집사.

그 밑의 양탄자 좌우로 두 명씩,

총 네 명의 남성이 서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 알현실의 구도.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화면과 일러스트로 지겹게 보아왔던 그곳이다.

다시 한번 왕비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 역시 일러스트로 보았다.

약간 더 젊어진 것 같지만 확실하다.

아셰리아의 전임 여왕, 루시아.

지금 큰 왕좌에 앉아 있는 국왕은 게임 시간대에서 사망한 상태이며, 루시아는 그런 남편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나에겐 너무나 익숙한 이 풍경을 보니... 더 이상 진실에서 도망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에우데미아 왕국」

에코니아 대륙의 역사를 함께한 국가.

세계의 중심이며 가장 강성한 국가.

재앙의 첫 번째 표적.

어떤 나라보다도 피해가 막심했던 나라.

그 나라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이다.

나는 잠시 멍해져버렸다.

수없이 많이 왔던 알현의 홀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게임 속이었다.

그 망겜 속으로 끌려와버리다니...

망연히 알현의 홀 끝을 보고 있던 내 시선을 틀자... 바로 내 앞에 은발의 공주님이 보였다.

게임 내의 왕족이나 귀족 중 유일하게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인물. 내가 지키고 싶었던 사람.

어떤 죽음에도 표정 변화 하나 없었던 여왕.

이런 그녀는 여러 의미로 외면받는다.

인간미가 부족해 매력이 없다던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많이 죽여서 싫다던가,

결말이 추악하다 보니 눈을 돌리게 된다던가.

게임 속 최후에 그녀는 19세. 그러나 지금 그녀는 열한 살 어린아이. 어제의 소녀가 침실에서 보인 아이다운 모습이 떠오른다.

결국, 그녀는 몇 년 뒤 그 모습이 되겠지.

멍하니 내 앞을 걷고 있는 소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 내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챈 소녀가 돌아보았다.

무표정하던 인형의 어색한 눈웃음.

이내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붉은 양탄자를 밟으며 옥좌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

정신차리자.

이 곳이 게임 속 세계인 건 중요하지 않다. 소녀가 게임 속 여왕인 것도 중요치 않다.

나를 구해주고, 나를 변호해주겠다는 사람. 그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수많은 원칙들 중 하나이다.

‘아셰리아 여왕’의 존재는 잠시 잊자.

나는 그녀를 따라 붉은 양탄자를 걸었다.

그렇게.

나에게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소녀와 함께 걷다가 동시에 멈추었다.

홀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법한 크기의 알현실.

그 가운데. 자그마한 소녀와 나만이 서있다.

­ 쿵

내 뒤에 있던 출입문은 닫혔다.

마치 마왕성에 들어온 용사가 된 느낌.

물론 나는 용사따위가 아닌 일반인이다.

나와 공주의 앞에는…

마왕이 아닌 국왕.

사천왕이 아닌 국가의 수뇌부가 모여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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