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5화 (5/215)

〈 5화 〉 1­4. 탄원.

* * *

1­4. 탄원.

"제1왕녀,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필레몬 에우데미아 국왕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드레스 양 끝을 손으로 잡고 오른 발을 뒤로 한채 올리는 인사. 한 나라의 공주님다운 고아함이 흘러넘친다.

국왕은 딸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에 나는 상황에 맞는 예법을 몰라 15도 정도 목례만 했다.

"청원의 내용을 다시 말해보라."

"공주님께서 신원 불명의 남성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국왕이 묻자 오른편에 서있던 외알안경의 뚱뚱한 군인, 발람 프라시스가 답했다. 얼굴이 약간 어두었는데 체형이나 자세가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문득 의아함이 올라왔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게임에서 사대 가문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저 사람이 사대 가문의 일원이자 원수부 장군이라는 건데... 내가 아는 프라시스는 용병 하나 말고는 모른다.

국왕은 공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말이 사실인가?"

"정신을 잃으신 분을 데려가 제가 간호한 것이라면, 맞습니다."

아셰리아 공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의 방에 데려갔다는 것이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네놈은 도대체 무슨 흑심을 품고 아셰리아 공주에게 접근한 것이냐?"

공주와 대화하던 국왕은 갑자기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나에게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외성 밖 마을의 연못이었고, 재앙의 습격을 받아 도망치다보니 공주님께 구해졌습니다. 그 뒤론 기억이 없습니다."

"되도 않는 거짓말을! 카일!"

고문이라도 하는걸까. 국왕의 앞에 서있던 집사가 들고 온 것은 내 우려와는 다르게 하나의 수정구였다. 게임에 빠져 산 나도 모르는 게 있었다. 이 마도구는 내가 모르는 것이다.

집사는 내 손을 수정구에 올리고 돌아갔다.

"아바마마, 사실 이 분은 표류…"

"공주는 가만히 있어라. 공주에게 흑심을 품었던 것이 맞느냐?"

말을 끊다니, 정말 위압적인 국왕님일세.

공주는 잠시 얼어붙었다가 고개를 숙여버렸다.

보기가 불편하다.

공주님은 대답하기 힘든 상황.

이제 내가 스스로 대답해야겠지.

"전혀 없었습니다."

수정구가 갑자기 터지기라도 할까 내심 불안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수정구는 색조차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다.

그 수정구를 바라보던 발람 프라시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공주 전하와 어떤 신체접촉도 없었나?"

"제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내 결백을 증명하는 듯, 수정구는 아직도 잠잠하다. 이 정도면 탄원이 끝나지 않을까...

하지만 내 기대는 자주 배신당하는 것 같다. 흑돼지는 수정구를 보고도 또다시 발언했다.

"폐하, 공주 전하께도 불경한 신체접촉이 없었는가 묻고 싶습니다. 이것만으론 저 수상한 자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의심을 당한 공주는 아직도 고개를 숙인채다. 방금 자신의 말이 끊긴 후에 계속 이렇다.

아직은 아이인거구나. 아니면 아버지란 존재가 불편한 건가. 마치 어린 시절의 나처럼…

국왕은 발람의 발언에 당황한 듯 했다. 딸을 심문하자는데 당연한 반응이겠지.

약간의 침묵이 알현실에 감도는 와중에… 법복에 법관모를 쓴 노인이 말했다.

"먼저 피고인의 말을 차분히 들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소? 수정구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추궁만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나."

국왕은 노인의 말에 도움이라도 받은듯 '그래, 들어보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노인의 이름은 아론 미모스. 애쉬그레이의 머리칼과 잘 관리된 수염, 건장한 풍채가 돋보인다. 내가 아는 그 미모스 가문이라면, 저 노인의 발언력은 이 자리에서 상당히 클 것이다.

지금이 찬스아닐까.

"국왕 폐하, 저도 이 심문의 당사자로서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네 놈에게 발언권은 없다!"

흑돼지가 말하는 것은 무시한다.

공주는 초대면의 사람인 나를 구해준 사람이다. 비록 왕족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해도 그 뒤에 날 간호까지 해줬었다. 나는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배운 참된 시민이다. 거기다, 풀죽은 공주에게 맡기는 것이 거부감이 든다.

옆에 있는 소녀가 걱정스러운 듯 올려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기력했던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불안한가 보다. 그 마음, 이해할 수 있다.

'괜찮을거야.'

최대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눈을 한번 맞춘다. 그리고 국왕과 아론 미모스를 보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 나라는 죄가 확정되지 않았더라도 피고인은 발언할 수 없는 법이 있는지요? 탄원인 분의 말씀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나를 지그시 보는 노인. 그 눈빛은 약간의 의아함을 담고 있다. 애초에 내가 말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었나보다.

"그런 정의롭지 못한 법은 없다."

"그렇다면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대법관으로서 발언을 허가한다."

미모스 가문.

그들은 대대로 법관을 지내며 사법을 담당한다. 애쉬그레이 머리색은 중간자로서 판결을 내리겠다는 상징. 그들에게 걸렸다간 왕족조차 눈치를 봐야한다는 것이 게임내 설정이었다.

"저는 탄원인께서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 뿐만 아니라 공주 전하마저도 의심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국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약간씩 새어나오는 화가 보인다. 저 노기는 이제 나로 인한 것이 아니겠지. 자기 딸을 고위 귀족이 멋대로 모함하는데 화가 더 나는 게 정상이다.

"공주님은 올해로 11세인 것으로 압니다. 제 고향에서는 지당히 보호받아야 할 소녀. 헌데 탄원인께서는 왜 제가 소녀에게 흑심을 품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혹여 이 곳은 11세의 소녀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는 게 당연한 곳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왕녀되시는 분의 순수한 마음을 왜곡하시려는 겁니까?"

소아성애자라는 프레임을 발람에게 씌웠다. 프레임 싸움은 선공이 유리하다. 상대에게 악한 프레임을 씌우면 상대하는 난 선한 사람이 되는 법.

물론 왕녀에게 손을 뻗는 자는 언제나 있을 수 있다. 거기다 내 발언은 이 왕국 전체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난 거리낄 것이 없는 인간.

내심 '될대로 되라'라는 생각이다.

알현실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침묵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깨졌다.

"푸흡"

비웃음에 가까운, 누군가의 실소. 그 웃음의 발원지는 국왕 앞으로 돌아간 집사였다.

겉보기엔 과묵하게 생겼었는데…

좀 깬다.

"푸흐흡. 크큭."

저 집사님 많이 깬다.

오른편의 흑돼지는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화를 참던 그는, 이내 자기 허리춤의 칼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이이익!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저런 걸 돼지 멱따는 소리라 하는건가. 왜 갑자기 화를 내면서 발광을 하는거야.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알현실에서는 국왕 내외와 재상, 집사 네 명이 전부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다. 그런 상황에서 흑돼지 반대편의 노인이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발언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거기다 폐하의 앞에서 검에 손을 대는 것이냐?"

내 발언은 노인에게 인정되었나 보다. 하지만 노인의 말에도 발람은 검을 놓지 않는다.

"프라시스 꼬맹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품에 손을 넣는 노인. 품 안에서 나온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다.

나무로 된 판사봉이었다.

피어오르는 잿빛. 판사봉에 잿빛이 스며들자 이내 크고 아름다운 망치로 변했다.

그가 망치를 치켜세우자 보이는 망치바닥. ­ 그곳에는 '정의(??)'라는 한자가 보인다.

쿵 ­

바닥을 내려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바닥은 멀쩡했다.

"내가 우습게 보이는게냐?"

노인의 팔은 근육이 울끈불끈 솟아있다.

"칼을 뽑기만 해보아라. 지난 번의 그것까지 얹어서 판결을 내려주마."

와 이걸 진짜 실물로 보네.

게임에서 '물들지 않는 정의'라고 불리는 저 망치는 사용자가 악으로 규정한 것을 심판한다.

미모스는 작중 최강의 가문 중 하나.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절대적인 무력을 보여준다. 에우데미아의 사법부 산하기관들 역시, 전원이 헬스를 한다는 설정이 참 독특하다.

잠깐의 대치상황.

왕실은 상황에 끼어들지 않고 있으며. 발람은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는데다, 근육질 노인은 고목처럼 우뚝 서있다.

그 상황에서 적발의 남성이 말했다.

"발람. 너가 오히려 사죄할 상황이다. 나라 망신은 다 시키고 있구나. 만약 고집을 더 부리겠다면 나도 가세하겠다."

아마도 저 사람이 제드로 프로네시스, 재상가의 가주이자 루시아 왕비의 동생일 것이다.

"국왕 폐하, 판결을 내리시죠."

지금에서야 약간 화가 진정되어 보이는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중 초반의 에우데미아는 입헌 군주정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통치자는 인권을 해치지 않고 지키며, 신하들은 그를 보좌하면서도 폭주를 견제한다. 즉, 적절한 왕권과 적절한 신권.

국왕은 최고권력이 있음에도, 딸을 심문하자는 말에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발람 프라시스의 탄원은 기각. 탄원인들은 추가적인 안건이 없으면 자리를 비우도록."

흑돼지는 국왕의 선고에 불만족한 표정이다.

하지만 어쩌나. 까라면 까야지. 발람 프라시스는 자신의 옆에 있던 홀쭉이 군인과 함께 알현실을 휙하고 나갔다.

퇴궐 인사조차 하지 않다니... 정말 무례하다.

이후 근육질 노인은 망치를 다시 판사봉으로 돌려 품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겉보기에만 과묵한 집사님은 아직도 낄낄대고 있었다.

"아. 저 변태놈한테 엿을 먹이다니. 내 속이 다 시원하네."

깬다.

겉보기만 과묵고수의 이미지도 깨지만, 저 말로 보아 발람 프라시스는 전과가 있는 듯 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본인의 생각이 저리 썩어있으니 탄원을 했겠지. 저런 게 장관이라... 나라가 망할만 했네.

이윽고 국왕 옆에서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왕비가 한 마디를 꺼냈다.

"오늘따라 글로리아가 더 그립네요."

"발람은 언제쯤 철이 들 건지."

"저건 이미 손쓸 방법이 없다."

장관들은 각자 말을 거들었고, 왕비는 이 자리를 정리하듯 나와 공주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보니 중요한 걸 잊고있었네요. 아셰리아, 손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해주겠니?"

왕비의 물음에 풀이 죽어 있었던 공주는 조곤조곤 어제부터의 상황을 요약했다.

물론 내 문양의 존재는 제외하고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내가 표류자라는 사실을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특히 국왕의 얼이 빠졌는데... 그 표정을 보고 작은 공주님은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내가 플레이한 게임속에서... 루시아 왕비는 필레몬 전대 국왕을 가족에게 약한 사람이자 성군으로 회상한다. 그런 사람이 딸인 아셰리아 공주에게는 왜 저런 관계일까.

탄원 당시의 모습이나 지금 저 표정만 봐도... 공주를 아끼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국왕은 탄원 때와는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왜 먼저 말하지 않았니...."

"죄송..."

"국왕님께서 공주님의 말씀을 끊으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공주의 사과를 끊어버렸다.

국왕과 공주는 서로를 혐오하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사적인 사과가 쌓이다 보면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법. 이왕 흘러가는 대로 살기로 했으니, 뒷생각없이 질렀다.

국왕은 나를 째려보더니 금방 풀이 죽었다. 자신이 말을 끊은 걸 떠올렸나보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 개선의 여지는 있는법.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눈의 상처와 근육은 부담되긴 한다만, 감정이 겉으로 다 드러나는 국왕이다.

왕비는 곁눈질로 국왕의 표정을 보더니 슬쩍 손을 뻗었다. 그러자 국왕은 갑자기 허리를 쭉펴고 표정을 고쳤다.

'아. 찔렸다.'

거기다 국왕 귀에다 대고 무언가 속삭이는데... 국왕은 또 풀이 죽어버렸다.

왕비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걸 어쩌죠.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좀 당황스럽네요. 일단 지낼 곳은 저희가 제공해드릴 수는 있는데... 이전 세계에서는 무얼 하셨었나요? 표류자 분께서 오시면 일을 주선드리는 게 이 세계의 전통이거든요."

이거구나.

게임을 시작할 때 주어지는 질문이다. 이방인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게 된다.

검사, 마법사, 도적, 기술자, 과학자... 이세계에 간다 했을때 메리트 있을 직업들도 꽤 많다. 선택 이후엔 그에 맞는 첫 목표가 정해진다.

게임이었다면 선택지 창이라도 떴겠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엄연히 내 현실이다. 거기다 선택지를 줄줄 꿰고 있어도 막상 말할 게 없다.

싸움이라 해봐야 태권도, 검도. 도장이 유행하던 세대라 나녔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였다.

예언가처럼 미래를 안다고 할 수도 없다. 게임처럼 세계가 흘러간다 하더라도 나는 결국에 이 나라의 쇠퇴만을 보았으니까.

… 절망을 미리 알려주는 건 싫다.

순간 안좋은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내 유희로 삼은 건 아닐까. 그렇다면 차라리 이 나라와 함께하다가 죽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한 속죄로서.

그렇다면 그냥 사실이나 말하자.

"평범하게 인문학을 공부하던 학생입니다."

"학생이요?"

"여러가지 배웠지만, 교사가 되려 했었습니다."

"......"

"이 곳에서는 마법이나 검같은 게 당연해보이지만, 저희 세계엔 없기도 했어서..."

어머니께서 먼저 가신 뒤로 접었지만... 원래는 임용 시험은 합격한 상황이었다. 어쨌건 내가 공부한 저런 것들로 에코니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왕비가 잠시동안 고민에 빠졌고, 옆에 있던 적발의 재상, 제드로 프로네시스가 끼어들었다.

"재상부에 와서 일이라도 해보시겠나? 방금 프라시스 녀석을 말로 혼쭐 내주시지 않았나."

"당연한 논리였고 상황이 좋았던걸요."

"알더라도 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제드로 프로네시스. 본편에서도 이따금씩 스쳐 지나가며 등장하는 유능한 재상님이다. 그런 재상이 날 고평가해주다니 감회가 새롭다.

... 이세계 공무원 면접을 통과해버린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건장한 노인도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사법부는 어떤가. 자네가 판사봉을 들면 공정하게 잘 두드릴 것 같군."

아론 대법관도 나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

근데 판사봉을 들고 잘 두드린다니. 방금 그 '물들지 않는 정의'를 가지고 '사람을' 잘 두드릴 것 같다는 건가. 애초에 미모스 가문의 특유의 마력이 아니면 쓰지도 못할 것이다.

거기다 나는 사법부에 들어가 근육이 넘치는 헬창이 되고 싶지는 않다. 무엇이든 적당한 게 제일 좋은 법이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좀 더 어깨를 펴개. 방금 발람 놈에게 한 방 먹여서 여기 모두가 시원하다네."

아셰리아의 시종 아샤의 아버지, 카일 티오리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왕의 앞에 서 있는 걸 보면 집사장이라 불리는 왕궁부 장관일 것이다.

"그리고 자네 생각처럼 모든 표류자들이 무력을 가진 건 아니었어."

카일 티오리아는 게임 내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낄낄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북방의 에퀼리아 합중국의 첫 총리는 표류자 상인이었지. 지금은 세계 경제가 에퀼리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리고 남방의 헬렌 교국은 첫 교황이 표류자 신부였다네. 그는 우리 세계의 신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집대성했지."

만약 DLC를 플레이 했다면 알 수 있었을까. 정말이지 처음 접하는 정보였다. 에코니아에 올 줄 알았으면 DLC도 했을텐데.

... DLC의 스토리 중에 본편에 적용될 이야기가 있진 않았을까. 나도 모르는 선택지가 보이진 않았을까. 그런 후회도 들었다.

"반면에 싸움 좀 한다고 와서는 죽은 표류자가 더 많아. 젊은 친구.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일세."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해 해주는 말이라는 게 느껴져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오늘 이 사람에 대한 인상은 여러번 바뀐는 것 같다. 정말 자유분방하고 입체적인 사람이다.

이런 와중에도 아셰리아 공주는 조용했다.

고개를 숙인 이후로 계속 그 자세로.

"공주님, 아셰리아 공주님?"

"아, 네?"

두 번 불러서야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뭐라 말을 해야 할까.

이럴 땐 괜한 위로를 하면 안될텐데.

"다행이네요. 별 일이 없어서."

"그러게 말이에요."

하하.

억지로 웃는 소리를 내는 아셰리아 공주.

이야기를 환기시키고 싶지만 이야깃거리도 없다. 그래도 말은 해서 다행인가 싶네.

"이시하님."

공주와 대화를 하던 나를 부르는 목소리. 내겐 여왕이라는 칭호가 더 익숙한 루시아 왕비였다.

"혹시 교사가 되어 보시겠습니까?"

... 갑자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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