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15. 왕실 가정교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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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왕실 가정교사가 되다.
교사라니. 아카데미의 교사를 말하는 건가.
에우데미아에도 아카데미는 있다. 하지만 그 곳은 재앙에 대비하는 훈련소에 가깝다. 무력이 없는 내가 맡을 직책은 아니란거지.
"어떤 교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왕실 가정교사직이 공석인데, 어떠신가요?"
"그럼 누구를 가르쳐야 하나요…?"
"물론 제 아이들이죠. 귀족 자녀들도 몇 명 있을 수 있습니다."
왕비가 정말 부담스러운 직책을 밀었다.
국왕이 입을 한껏 내밀고 한 마디 하려는데...
아, 또 찔렸네.
"봉급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
"봉급보다는 왕가나 귀족의 자제분들께 무엇을 가르쳐야 할 지도 몰라서...."
분명 과외 학생을 구해서 해본 적이 있긴 하다. 나름 성적도 많이 올려줬고, 잘 가르쳤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건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단순한 학습일 뿐이다. 나에게 이런 형태의 가정교사는 처음이다.
거기다 지금 여기엔 없는 왕자까지 가르치게 되는 걸까. 왕자는 아무래도 나한테 껄끄러운 존재인데… 귀족 자제들도 다 똑똑할 거 아냐.
"다른 문화를 보여준다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원래 왕실 가정교사라는 직책이 그런 겁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상담 정도만 해줘도 도움이 됩니다."
왕비님은 부담가질 필요없다 하신다.
표류자니까 다른 문화권의 시각을 보이라는건가.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니까 결국에 비슷할 것 같은데? 내가 게임을 플레이할 때 느꼈던 이 곳의 가치관도 결국 현실과 비슷했다.
나도 모르게 옆을 보니... 공주가 나를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고 있었다. 게임 속 여왕과 어제 어른스러운 공주의 모습이 동시에 떠오른다. 이 똑똑한 공주님에게 내가 가르칠 게 있긴 할까.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공주가 입을 열었다.
"일단 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셰리아도 괜찮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떤가요?"
공주가 저렇게 말하니 약간 해볼까 싶었다.
가르칠 것을 떠나서 공주가 신경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의외로 약한 면도 많이 보였으니까. 근심 정도는 덜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 물론 그것조차도 나에게 과분할 수 있다. 그래도 아이가 불행하지는 않도록 해주고 싶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이시하님은 왕실 가정교사로서, 임시로 공작에 준하는 지위를 갖게 되십니다."
"예?"
뭐라고요?
"전통적으로 에우데미아 왕국의 왕실 가정교사는 명예 공작위를 받게 됩니다. 업무상에 필요한 권한이니까요. 물론, 가정교사직을 그만두실 때 작위는 반환됩니다."
아. 왕가의 자제들이 공작에 준하는 지위니까, 교사 역시 동등해야 한다 그런건가.
근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멍하게 있으니 왕비가 말했다.
"그럼... 이곳에 적응하실 기간도 필요하실테니, 사흘 정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수업을 시작하시면 되겠네요."
그래도 뭐 어떤가.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
나는 언제나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할 때는 하는 사람이다. 이왕 맡았으니까. 교사로서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해보다가 실적이 안 좋으면 저런 작위도 회수당하겠지.
"오늘은 일들이 많았어서 약간 지치네요. 다들 해산할까요? 아샤, 새로운 가정교사님께는 동관의 손님방을 내주세요."
왕비는 내가 교사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일사천리로 모임을 파했고, 나는 공주와 함께 동관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본 공주의 발걸음은 다행히도 가벼웠다. 아마 긴장감과 압박감이 풀린 듯 했다.
동관에 도착해서는... 어제 사용한 방을 내 방처럼 쓰라고 안내받았다. 내가 이전 세계에서 살던 방을 생각하면, 분에 넘치게 호화로운 방이다. 특히나 침대가 푹신푹신하니 좋다.
이제 여기서 지내게 되는거구나...
"하아."
설마 내가 어린 시절 그렇게 몰두하던 게임의 세계로 오다니… 열여섯 살이었던 그 당시에 왔다면 무엇이든 해보려 했을까?
하지만 지금은 무력감이 먼저 든다.
방금까지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 애써 이 무력감을 무시했다. 결국 나는 게임에서처럼,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게임 속 '이방인'도 따지고 보면 해피엔딩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결말뿐이었으니까. 거기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묵시록이라니. 지금 생각해봐도 촌스럽네."
듣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푸념을 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옥좌에 앉아있는 게임 속 아셰리아 여왕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내 그녀는 아셰리아 공주로 화했다.
답답하다.
알고 있었던 사람.
내가 마주한 사람.
닮으려 했던 사람.
대화를 나눈 사람.
나와 닿았던 사람...
* * *
알현실에서의 일과가 끝나고, 국왕 내외는 후궁의 침실으로 돌아왔다.
"루시아,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왜 검증도 안된 표류자에게 하필 가정교사직을 맡긴거야."
국왕 필레몬 에우데미아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딸의 침소를 자신도 모르게 출입한 수상한 자. 하지만 왕비는 자신과 상의도 없이 큰 제안을 해버렸다. 검증되지도 않은 사람을 갑자기 왕실 가정교사로 앉힌 것이다.
물론 왕비가 왕실 내부의 대소사를 대신 해주는 상황. 당연히 왕비에게 결정권은 있었지만, 자신과 상의도 없이 결정한 이유가 궁금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해?"
왕비 루시아 에우데미아가 답했다. 약간은 떠보는 듯한 목소리로. 필레몬 에우데미아는 고민했다. 루시아가 이런 태도를 보일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그랬다고 생각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그녀와의 어린 시절, 펠레몬을 항상 당황하게 하던 말이다. 이럴 때는 항상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 떠올리게 된다.
불현듯 그 표류자의 말이 떠올랐다.
'국왕 폐하께서 공주님이 말하려 하실 때 끊으셨습니다.'
국왕폐하라던가 공주전하라던가 하는 존칭마저 더 낮게 빼먹으면서 했던 그 발언. 사실 필레몬은 예의에 큰 무게를 두진 않는다.
그는 한 명의 무인, 재앙 판타스매터를 토벌하는 자리가 알현실보다 편한 남자. 그는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큰 격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존칭이야 유야무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 표류자의 발언은 필레몬의 성정을 감안하더라도 과감했던 발언이기에 내심 마음에 남아있었다.
"내가 리아의 말을 끊은 것 때문에...?"
국왕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내심 그 일을 하루종일 품고 있었다. 그는 알현실에서마냥 또다시 풀이 죽었다.
왕비,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한 말은 아닌데.'
물론 말을 끊은 것은 문제지만, 그 문제는 오히려 다독이려 했었다. 거기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대략 알고 있으니까. 그 아이의 일만 되면 서툴러 지는 것이 필레몬이었다.
방금 그 질문은 다른 이유에서 한 것이다.
"필레몬...."
"어...."
"당신이 그 아이를 아끼는 건 알지만, 그 아이를 어려워하는 것도 잘 알아."
"......"
잠깐의 침묵이 침실에 돌았다.
국왕은 한 쪽의 벽면으로 망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 벽면에는 한 그림이 있었다.
왕비는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리아의 말을 끊은 거야, 당신이 걱정해서 그랬던 거니까 넘어가줄게."
"......"
"애초에 내가 당신한테 무슨 잘못했는지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
가벼운 어조로 '바보' 라는 말까지 왕비가 덧붙였다.
"내가 홧김에 그 사람에게 가정교사 권유를 했겠어?"
"그건… 아니지."
"권유한 이유를 짐작해 보라는거야."
왕비의 말에 필레몬은 아직 그림을 바라보는 채로, 약간 안심했지만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아무리 알현실에서 풀이 죽어있었더라도 그는 국왕이이다. 대화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는 있다.
"음, 그 표류자는 교사가 되려고 했다 했었나... 그것만으로 충분한거야?"
"전혀 충분하지 않지."
원래 왕실 가정교사라는 자리는 당대 최고를 모신다. 헬렌 교국의 이름난 대주교. 당대의 마법사. 동쪽의 대장군.
그런 자들만이 취할 수 있는 자리다.
루시아가 에우데미아의 성을 받기 전까지의 성은 프로네시스, 현 재상 제드로의 누이다. 그렇기에 왕실 가정교사라는 직위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잘 안다.
"오늘 리아는 어때 보였어?"
"......"
국왕은 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왕비는 그 이유를 국왕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필레몬, 그 아이를 사랑하고 아낀다면 제대로 봐줘."
"......"
"아이에게 눈도 못 마주치는 아버지는 슬프잖아."
"노력할게...."
왕비가 노력한다는 말을 들은 지 이미 몇년이나 되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 아이, 오늘 그 표류자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어."
"...?"
필레몬은 자신이 내내 바라보던 그림에서 눈을 떼고 왕비에게 몸을 돌렸다. 왕비는 나긋나긋하게 그 장면을 회상하며 말했다.
"처음 그 표류자가 알현실 밖에서 멍하게 서있을 때 돌아보았고. 이시하 그 자가 발언에 허가를 구할 땐 걱정스러워 했어."
"말이 끊겨 풀죽어 있다가도, 그의 말 한 마디에 고개를 들었지. 제드로와 아론 아저씨가 그에게 권유를 넣으니 다시 고개를 숙였고...
"그가 교사직을 마다하는 낌새를 보이니 침울해졌어.한 번 해보란 말을 할 때는 옷자락을 꽉 쥐고 말하던데, 그가 제안을 받아들일 때는 그 아이 기준으로 정말 신나보였어."
왕비는 오늘 하루 딸과 표류자만을 계속 보고 있었다. 평소 감정을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아셰리아가 오늘처럼 다채로운 반응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랬....었군."
필레몬은 말을 더듬었다. 비록 딸을 제대로 보긴 힘들어하는 그였지만, 평소에 전해 듣던 이야기를 생각하면 새로웠다.
왕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의 눈은 정말 특별해. 그 표류자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무표정하던 아이에게 표정이 생겼는 걸."
왕비는 회상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국왕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 아이에게 표정을 준 사람은 무엇을 더 줄 수 있을까? 너무 궁금해서 누가 채가기 전에 내가 말했던거야."
필레몬은 알현실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제드로와 아론도 그 표류자를 영입하려했지. 그 둘도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라도 본건가.'
본인에게는 딸에게 접근한 불나방 하나였는데 말이다.
"그래도 아직은 그 자를 못 믿겠어"
"그 사람을 굳이 믿으려 하지마."
왕비는 국왕의 얼굴에 양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셰리아와 나를 믿어봐."
필레몬은 당연히 그 둘을 믿고 있다.
루시아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오다 혼례까지 올린 사이다.
프로네시스답게 현명하기도 해서 그가 토벌을 나간 사이 정무까지 맡길 수 있다. 본인보다 더 현명한 아내를 두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는 그이다.
거기다 아셰리아는 별이 남기고 간 유산이다. 그 아이의 눈은 그를 닮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생각은 루시아를 닮아 현명하기까지 하다.
오죽했으면 재상부와 왕궁부의 관리들이 난제가 있을 때 그 아이를 찾겠는가.
"일이 생기면 그 때 생각해도 되겠지."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은 믿어보겠다는 뜻이다.
필레몬은 자연스럽게 벽 한 쪽의 그림을 본다. 고뇌에 빠져있던 그는, 오늘 알현실에서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루시아, 그런데 그 수정구 말이야."
"음?"
"그게 아예 반응하지 않을 수가 있나."
오늘 표류자 이시하를 심문하기 위해 대령한 수정구. 그것은 감정의 색과 파동을 대략적으로 짐작케 한다.
필레몬은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보았다.
"그러게.... 하지만 아론 아저씨도 별 말 없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음..."
어렸을 적부터 자신들을 지탱해주던 아론이다. 대법관인 그가 수정구의 미작동을 보고도 별 말 없었으니 괜찮겠지.
"내일도 토벌이지?"
루시아의 말에 필레몬은 생각에서 깨어난다.
"음, 요즘따라 재앙 출몰예보가 잦네."
"발람 그 멍청이는 도움도 안 되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원래 그런 녀석은 아니었는데."
근원 반대편의 존재, 판타스매터. 그것은 이 세계와 왕국을 위협하는 존재들이다.
여러 형상을 가진 그 존재들은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 자야겠네."
"내일도 부탁 좀 할게."
"괜찮아, 알렉이랑 리아도 가끔 도와주는 걸."
알렉은 국왕 내외의 아들. 항상 아버지를 닮으려 하는 그 모습을 떠올린다. 필레몬은 항상 가족 모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평범한 부부의 대화가 끝나고.
국왕 내외는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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