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7화 (7/215)

〈 7화 〉 1­6. 왕자 등장.

* * *

1­6. 왕자 등장.

어린 시절의 꿈을 꾸고 있다.

이건 확실히 꿈일 것이다. 어머니와 같이 시장을 걷고 있던 그 시절의 기억이니까.

어머니와 시장을 걷고 있는 꿈.

시장은 한창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간대다.

상인과 고객의 흥정.

음식점 주인의 호객.

사람들의 대화.

여러 소리들이 거리를 떠들썩하게 채웠다.

하지만 그 떠들썩함과는 종류가 다른 소리가 있는 곳, 어머니와 나는 길거리 연주자의 공연 앞에 멈춰 섰다. 우리 말고도 관객들은 꽤 많다.

관객들의 표정들을 보니 하나같이 연주에 빠져있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보고 있었고, 한 커플은 팔짱을 끼고 서로에게 밀착한 채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사람들을 한 명씩 구경하고 있을 무렵, 잔잔한 연주가 끝났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키던 침묵을 깨고 가벼운 갈채를 보냈다.

연주자 앞에 기타 케이스가 눕혀져 있고, 그 안에는 연주하는 틈에 쌓인 동전이나 천 원짜리 지폐들이 있다. 하지만 금액으로 환산하면 그다지 많은 돈은 아닐 것이다.

“저런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물었다.

꿈속이라 내 의지는 아니다.

“그러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저 정도 돈이라면 아마도 금전 때문은 아닌 것 같지?”

“네.”

그리운 목소리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멀리서 찾는 게 좋을 때도 있단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는 그대로 생각해보렴.”

“보이는대로….”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은 웃고 있어. 그리고 연주자는 그 반응을 보더니 표정이 좋아졌네. 무슨 반응일까?”

어린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나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기쁜 거구나.”

“우리 아들 잘했어. 맞췄네~”

어머니는 별 것 아닌 일에 나를 칭찬해주었다. 저런 분이셨지. 이제는 볼 수 없겠지만.

연주를 들으러 왔던 시장 상인들도 하나하나 자신들의 일로 복귀하고 있었다. 저것도 평소에도 항상 봐왔던 모습이다.

어머니와 처음 시장에 왔을 때도 지금 이 장면처럼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떠올려 보려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회상이 흐릿하게 변해갔다.

* * *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높은 천장.

나를 받쳐주는 폭신한 침대.

어머니는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더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리고 꿈속의 그 일보다 더 이전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머릿속을 뒤졌다.

“잘 기억이 안나는구만.”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 내가 사용하는 손님방의 문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잠자리는 편안하셨습니까?”

아셰리아 공주의 시종, 아샤 티오리아가 문밖에서 아침 안부를 물어왔다. 잠시간은 내 일도 맡아주는 모양이다.

“좋은 아침...”

“식사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샤는 퉁명스레 내 생존 여부만 확인하더니 또각또각 멀어지는 발걸음을 내며 떠나갔다. 역시나 무서운 백작가 여식이다.

"일단 씻어야지..."

내가 사용하는 방은 어머니와 내가 살던 투룸의 벽을 전부 텄을 때의 넓이에 맞먹는다 거기다. 침대나 소파, 책상과 같은 기본적인 가구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럽다.

세면실도 붙어있는데, 말이 세면실이지 고급주택에서나 볼 수 있는 욕실처럼 생겼다.

탈의 공간과 욕실이 분리되어있는 호화스러운 공간. 욕조는 1인용을 위시하지만 사실 두 명은 들어갈 것 같다. 거기다 현대 화장실의 장치를 떠올리게 하는 마력 도구까지.

그 마력 도구들에는 마력석이라는 걸 넣어 뒀기에, 마력을 접하지 못한 나도 쓸 수 있었다.

... 어찌되었건 부담스러운 공간이긴 하다.

한창 부담스러움을 느끼면서, 나는 에코니아에서 맞는 두번째 아침을 보냈다.

* * *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공주, 아샤와 함께 왕실 도서관으로 가게 되었다. 자신이 한 말을 꼭 지키려는 성실한 공주님이다.

“그럼 이제부터 선생님이신 거네요.”

“그렇네요…. 잘 부탁드려요.”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이 정말 기대됩니다.”

공주가 기대감을 표출하자, 뒤에서 듣고만 있던 메이드가 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도 참~ 기대가 됩니다.”

“그렇죠, 아샤?”

공주님, 그 여자애는 절 비꼬는 거에요.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해서 저 여자애한테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할까. 해봐야 중학생 정도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기분이 묘하다.

일단 도서관까지 따라간 후 입구에서 대기하겠다는 고집을 피우며 우리를 따라온 메이드다. 나랑 공주 둘이서만 보낼 수는 없다나.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공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다. 알현실의 풀죽은 모습은 어디 갔냐는 듯, 입꼬리도 조금은 올라가 있다.

그래도 기분은 많이 풀렸네.

다행이다.

그래도 왕실 가정교사라...

아무래도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

왕비는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분명 그 자식도 가르치게 되겠지.

알렉산더 에우데미아.

아셰리아 여왕의 오라버니인 왕자다. 팬덤에서는 ‘우수에 젖은 금빛 왕자님’이라 불린다.

작중 설정으로는 알렉산더가 본래 책정된 왕세자였지만, 그는 아셰리아에게 세습권을 넘기고 돌연 아레트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아레트 아카데미는 전 세계의 유력 계층 자제들이 유학을 오는 장소이다. 주로 판타스매터에 대항하기 위한 전투 능력과 차기 유력층으로서 책임을 강조한다.

만약 이방인이 학원을 통한 성장 루트를 선택하면 무기력한 알렉산더와 만나게 되는데, 그를 동료로 삼으면 아셰리아 여왕의 폭정에 맞서 들고 일어나는 전개가 된다.

발매 초기에는 작화가가 엄청 갈려 나갔을 것 같은 일러스트 속 모습에 ‘그 별명’이 붙고 여성팬이 엄청 몰려들었지.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왕도적인 알렉산더 루트를 접한 플레이어가 많아졌다. 그리고 부조리에 분노하는 그의 모습과 클라이맥스를 본 남성팬들마저 알렉산더에게 빠져든다.

알렉산더 루트의 클라이맥스는 아셰리아 여왕의 심장을 찌르며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 담긴 일러스트와 독백이다. 자신의 책임이라며 아셰리아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데... 결국에 찌른 건 본인이잖아.

그게 복선인 것 같아서 나는 다른 루트까지 파훼하며 그 의미를 계속 찾았지만 나는 결국 그 발언의 뜻을 알지 못했다.

하여튼 커뮤니티에서 인기투표 1위는 항상 그 자식이다. 물론 나에게는 아셰리아 사망원인 1위로서 내 마음속의 공적이지만 말이다.

그 우수에 젖은 금빛의 무기력 왕자님에게 내가 뭘 가르쳐야 하는 거야... 가르치기 싫은 건 둘째 쳐도 진짜 모르겠네.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었더니, 아셰리아 공주에게 관리 대여섯 명이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공주님, 도와주십시오!”

“여길 봐주십시오!”

“공주님, 절 살려주십시오!!!”

뭔가 문서를 잔뜩 쥔 채로 달려오고 있다. 그 기세는 형용할 수 없게 엄청나서, 아셰리아 공주가 관리들의 처절함에 밀리듯이 약간 뒷걸음질을 쳤을 정도다.

살려달라니, 무표정마저 귀여운 공주님이 저 사람들에게 협박이라도 한 걸까. 물론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본편에서도 아셰리아 여왕이 관리들을 대거 숙청하긴 하지만... 지금은 아니겠지.

“무슨 일이신가요?”

아셰리아 공주의 어조는 약간 냉랭해졌다. 방금 나한테 말하던 것과는 약간 달랐다.

어조의 차가움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관리들은 우리 앞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여기, 전에 처리하신 예산서에 결함이 있는데, 원인을 못 찾겠습니다!”

“왕도 중앙천에 놓인 다리를 보수해야 하는데, 전문가들이 전부 자리를 비워서…”

“바로 다음 달 건국제 행사에 쓰일 기획서인데, 왕비님께서 회의 중이시라 대신 결재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다행히 숙청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보인다. 이 무능력한 공무원들은 한창 놀 때인 11세 여자아이에게 뭘 물어보는 걸까.

결재를 받으러 온 사람은 이해한다. 관료제에서 상관에게 검증을 받는 절차는 중요하니까. 하지만 나머지 둘은 이해할 수 없다.

예산서의 결함은 단순하게 본인이 다시 검토하면 되지 않는가. 거기다 전문가들이나 할 일을 어린 아이에게 자문받으러 온다니, 어제 흑돼지를 시작으로 인간말종이 참 많은 것 같다.

공주는 난처한 듯이 나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도서관에 가는 약속은 약간 미뤄도 될까요. 선생님?”

“조금 늦어져도 상관은 없어요.”

본인이 미안해할 상황이 아닌데.

관리들에게서 문서 몇 장을 달랬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나에게 넘겨 주었다. 가져온 문서들을 보니 회계 정도는 나도 도울만한 것 같았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기초적인 회계 업무 정도는 자신 있습니다.”

“그럼 도움을 좀 받을게요, 선생님.”

시종일관 미안한 기색인 소녀.

“그럼 여러분, 일단 집무실로 가볼까요?”

얼마나 이런 일을 많이 겪었으면 태연하게 대처할까. 메이드인 아샤도 이런 건 일상이라는 듯 가만히 있었다. 공주의 말에 관리들이 화색을 띄우는 걸 보니, 부조리는 더 심하게 느껴졌다.

* * *

도착한 집무실에는 책상이 여럿 있었다. 중앙에 엄청 큰 책상과 중간 크기 책상 하나. 그리고 양쪽에는 작은 책상이 하나씩.

왼쪽부터 순서대로 알렉산더, 국왕, 왕비, 아셰리아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샤가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스톨 의자를 들고 와 아셰리아 공주의 의자 옆에 두었다. 의자를 보고 공주가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자리가 여의치 않네요.”

죄송할 일도 아닌데 계속 죄송하다고 하니, 내가 죄송할 지경이 되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사과가 입에 붙은 아이다.

“괜찮다니까요. 일단 그쪽에 계신 분 성함이?”

“안톤 로더스, 재상부 소속입니다.”

“들고 오신 문서 줘보세요.”

아.

이세계로 와서 내 팔뚝에 이상한 문양의 의미도 알아내고, 독서를 통해 무언가 깨우치는 전개를 예상했는데. 나름대로 새로운 것에 대한 학구열같은 것이 있었는데.

오히려 서류의 파도에 휩쓸리다니.

불쌍하다, 나 자신!

나는 회계와 관련된 업무 자료들을 증빙 문서와 함께 받아 처리했다. 나름대로 왕실 가정교사라는 직위가 주는 공신력이 있는 건지, 관리들은 큰 불평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맡겨진 일을 처리하며 공주가 하는 작업을 슬쩍 보니... 대견함과 어이없음이 공존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계도면을 보니 여기에 하중이 집중되겠네요. 거기다 중앙천이면 통행량이 많은 대신 짧으니 이 방식이 적합하지 않아요.”

“안건에 문제는 없네요. 이 안건은 제 소관으로 결재해드릴 수 있습니다.”

방금 그 설계도면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무언가를 덧대어 그리거나, 자신의 권한을 명확히 따져가며 결재를 내어주고 있었다.

능력이 확실한 걸 보면 역시나 공주구나... 싶다가도, 11살 애한테 뭘 시키는 건가 싶다.

문득 떠오른 사실이 있다. 작중 아셰리아가 왕좌에 오른 게 17세이다. 그럼 그 전까지 이런 업무를 계속 처리하다 왕위에 올랐겠지. 어찌보면 미성년자 노동 착취가 아닐까.

물론 이 세계의 성년이 17세로 내 상식보다 더 빠르다고는 하지만, 그 나이 꼬마에게 왕위를 맡겨버린다니. 정말 무책임한 세상이다.

그렇게 세 사람의 안건을 전부 처리한 직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집무실 문이 열렸다.

또 다른 관리들이었다.

그런데 세 명 정도가 아니다.

열댓명은 되는 것 같다.

“공주님, 계셨습니까!”

“동관에 없으셔서 얼마나 찾았는지!”

두 번째 웨이브였다.

* * *

그렇게 시작된 공문서 디펜스는 5차 웨이브에 달했다. 도중에 아샤의 제안으로 차를 마시며 쉬긴 했지만, 거의 네 시간동안 이러고 있으니 이제는 슬슬 피곤하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옆에 있는 인형 공주님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나보다 고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이제는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슬슬 표와 문자의 지옥에서 토가 나오려는 순간, 두 명의 인물이 집무실 문에 등장했다.

“하!하! 집무실의 혼란 속에서 이 몸, 등장!”

한 명은 국왕과 닮은 금발 머리, 아무리 봐도 열혈이라는 느낌이 강한 남자아이. 전형적인 게임의 미청년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의 미소년.

그 옆을 그림자처럼 지키듯 반걸음 뒤에 서 있는 흑발의 소년. 눈은 거의 감듯이 뜨고 있어서 인상이 나쁘지만, 이쪽도 이목구비는 잘 빠져서 미소년이다.

“모두! 나를 기다렸는가!”

두둥등장.

소년은 영문모를 등장 멘트와 함께 양팔을 태양 만세­를 외치듯 벌렸다. 그 모습은 마치 사이비 교주와 같다.

성격은 익숙하지 않지만...

저 녀석의 얼굴은 낯이 익다.

커서 아마 그놈이 될 거다.

예비 여왕 시해자.

내 마음 속 공적 1위.

‘우수에 젖은 금빛 왕자님’

알렉산더 에우데미아가 등장했다.

갑작스러운 알렉산더 왕자의 등장에 집무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런데 저 자식 본편과는 너무 캐릭터가 다른 것 아닐까. ‘이 몸, 등장!’ 이라니. 원래는 좀 더 과묵한 캐릭터였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하하하! 동생이여! 안녕한가!“

아셰리아 공주가 인사하자 알렉산더는 껄껄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아마 아셰리아와 알렉산더의 나이 차가 2살이었던가. 그럼 13살일 것이다.

근데 말투가 진짜 적응이 안 되네.

본편에서는 안 저랬는데.

“허허허, 왕자님 오셨습니까?”

“오늘도 당차시구만!”

“하하하!”

관리들도 왕자에게 반갑다는 듯이 인사를 한다.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몇몇 관료들 머리 위에 없던 식은땀이 뻘뻘 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개중의 몇 명은 몸을 돌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알렉산더는 당당한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흑발 소년도 알렉산더를 지키듯 뒤에 섰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가져오라!”

왕자의 호령에...

집무실은 잠시간 정적에 빠졌다.

무언가 이상하다.

이 위화감은 너무 꺼림칙하다.

설마... 그 정도로 쓰레기들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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