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8화 (8/215)

〈 8화 〉 1­7. 알렉산더 에우데미아.

* * *

1­7. 알렉산더 에우데미아.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가져오라!”

알렉산더의 말에 정적에 빠진 집무실.

관리 중 비교적 젊거나 저렴한 옷을 입은 관리들이 왕자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옷을 고급지게 입은 사람들은 그대로 아셰리아 공주의 앞에 줄을 섰다.

... 그런 거구나.

쿡쿡, 내 가슴 속을 무언가가 찌른다.

이 인간들은 왜 이럴까.

아침부터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아셰리아 공주에게는 그렇게 매달리더니.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 장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공주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네? ... 알겠습니다.”

내가 말하자 공주는 약간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 의자를 들고 노랑머리 꼬마의 근처로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그대는 누구인가?”

“새로 왕실 가정교사로 부임하게 된 표류자 이시하라고 합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오, 새로 고용되셨다던….”

알렉산더는 저 말을 꺼내고선 나를 멀뚱멀뚱 보고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앞으로 몰려온 관리들의 서류를 받아 처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옆에 앉아 알렉산더의 일 처리를 구경하고 있자, 뒤에 서 있는 흑발 남자아이도 나를 궁금하다는 듯이 보고 있다.

“이건 어딜 보면 되는 건가?”

“이곳과 이곳을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문제는 없는 것 같군. 들고 가시게나.”

일처리에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음, 이건 미안하지만, 아셰리아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군. 한 번 부탁해보게나.”

“알겠습니다, 왕자님.”

아셰리아 공주와 비교해서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긴 하지만, 자신이 못 할 일을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낫다. 거기다 13살 어린 아이가 이 정도면 알렉산더 역시 훌륭한 편이다.

이후로도 일처리는 비슷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꼼꼼히 처리했고, 봐야할 영역을 정확히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선에서 해결되지 않는 안건들은 적절하게 반려시켰다.

그나저나 이 꼬맹이 ‘그 놈’의 말투는 왜 이러는 걸까. 본편에선 온갖 시크한 분위기를 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대를 붙이는 왕자였다.

지금 말투는... 적응이 안된다.

* * *

다시 시작된 서류 디펜스는 1시간 뒤에야 끝났다. 열한 시쯤 나온 것 같은데, 집무실에서만 5시간째다. 밖은 아직 밝긴 하지만, 태양은 이제 퇴근 직전이라며 왕도 서쪽에 걸쳐있었다.

"안녕..."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루시아 왕비와 제드로 재상이 들어왔다. 둘 다 반쯤 녹초가 된 상태다.

이 왕국, 괜찮은 걸까.

수뇌부부터가 과로사 위험이 있어 보인다. 물론 안 괜찮으니 망하는 거겠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돌아온 왕비가 말했다.

“회의 안건이 너무 많았어. 미안하구나, 얘들아”

“안녕하십니까, 어마마마.”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 옆에 서있던 검은 머리 소년도 가볍게 인사를 하길래 나도 살짝 고개만 숙였다. 그러자 제드로 재상과 왕비님이 나를 알아차렸다.

“오, 선생도 있었나?”

“네, 어쩌다 보니 말이죠.”

“알렉산더와도 인사를 나누신 것 같고요.”

“네, 정말 당차시더라고요. 하하하...”

내가 집무실에 있는 게 의외인가 보다. 하긴, 가정교사로 뽑았는데 집무실 보조로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왕비는 우려를 표하며 말했다.

“적응도 하셔야 하는데 첫날부터 이렇게 되어서 죄송하네요. 내일은 회의도 없고, 바깥사람도 토벌 일정이 없어서 저희가 집무실을 보면 될 것 같아요.”

내일은 서류 디펜스 해방인가. 다행이다.

그나저나 적응이라…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이미 이 세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꽤 쌓여있는 상태다.

하지만 과연 그 지식이 여기서 통용될 수 있을까. 지난 이틀만 해도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이 보였다. 내 기존 상식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도서관의 책이 지금의 나에겐 절실하다.

“그럼 내일은 공주님께 부탁드려서 함께 도서관을 가보아야겠네요.”

“네, 대부분의 출입 권한은 리아에게 있으니 마음껏 구경해보세요.”

왕비님의 허락도 얻었으니 내일은 도서관 일정을 그대로 진행할 수 있겠다.

왕비 옆의 재상이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약간 일이 많긴 했을 텐데, 하필이면 국왕 폐하와 카일이 외부 업무로 바쁜 참이라 말이야. 이제 다들 돌아가서 쉬시겠습니까? 시하, 자네도 가서 쉬게나.”

자리를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얼핏 보니, 아셰리아 공주는 방전 상태나 다름 없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건전지가 다 된 장난감 인형처럼 굳어 있다. 반면에 알렉산더는 그나마 한두 시간만 참여해서 멀쩡해 보인다.

한 명은 괜찮다 해도 이건 엄연히 아동 학대다. 따지고라도 싶은데 지금은 말할 상황도 아니다. 내가 뭐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아셰리아 공주가 힘없이 끄덕이자 왕자도 동관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 * *

본관에서 나와 동관으로 돌아가는 길.

공주와 왕자는 말이 없다.

집무실의 격무로 지쳤다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둘 사이에 무언가 벽이 느껴진다.

왕자의 시종으로 보이는 흑발 남자아이와 메이드복 차림의 아샤 역시 말이 없다.

공기가 무겁다.

지금은 퇴근시간 즘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이미 지나쳐온 본관 입구가 시끄러워졌다.

고개만 돌려 뒤를 보니, 왕궁부와 재상부의 관리들이 본관에서 나오고 있다. 관리들의 얼굴은 대부분 어제와 같이 지쳐있다. 그 중에는 집무실에서 마주쳤던 사람들도 간간히 보였다.

하지만 수많은 관리들 중 몇몇의 얼굴은... 다른 이들보다 유난히 밝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비언어적 의사소통, 그러니까 몸짓이나 표정에서 정보를 많이 얻는 편이다.

주변에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아무래도 항상 타인을 잘 관찰하라는 말씀을 해주신 어머니의 영향이 클 것이다.

원래 세계의 여사친이었던 이아인 그 녀석만 나보고 둔기니 뭐니 놀리는 정도. 둔기라는 별명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 이제는 물어보지도 못하겠지.

여하튼 관리 중 몇 명만이 웃고 떠드는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한가지 결정을 했다.

“왕자님, 공주님. 먼저 들어가셔서 쉬시겠습니까? 집무실에 무언가를 두고 나온 것 같아서요.”

물론 거짓말이다.

게임 속 에우데미아에 떨어진 지 겨우 사흘째인데, 개인 소지품이 있겠는가.

아셰리아 공주님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며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아샤, 이시하님은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잠시 수행해주실래요?”

“그럼 공주님 수행은 누가...”

“저는 오라버니와 기디언님과 함께 가면 되잖아요. 어서 쉬고 싶어요.”

“네... 마음에 안 들지만요.”

“아샤, 그런 건 마음 속으로.”

“네...”

대화를 듣던 왕자와 검은 머리 소년은 나에게 약간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왕자님. 다음에 뵈요.”

내가 멀어져가는 공주 일행을 우두커니 보고 있자, 아샤는 옆에서 왜 집무실로 가지 않냐며 재촉하듯 나를 보고 있었다.

“아샤.”

“왜요.”

... 그래도 네가 수행하는 공주님의 가정교사인데, 예의는 지켜주라. 뭐 나도 아직 실감은 잘 안 들지만.

“미행용 마법이랑 청각계 마법, 쓸 줄 알아요?”

“예?”

내가 확신하는 듯한 어조로 물어보니, 아샤는 얼빠진 대답을 들려줬다.

티오리아 가문.

작중 그들은 프로네시스, 미모스와 함께 이 나라를 500년째 섬기고 있는 가문으로 소개된다.

중간자로서 합리적인 판결을 중요시하는 미모스처럼 이들에게도 정체성이 있다. 왕의 곁에 밀착하여 그를 향하는 위협을 쳐내는 것이다.

티오리아 가문에 있어, 왕가는 지켜야 할 선이자 규율.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왕가의 자제들과 긴밀히 지내며, 항상 그림자 속에서 활동한다.

굳이 백작이라는 작위에 머무르는 이유 역시 조금이라도 일반 귀족의 눈에 약해 보이도록 위장하기 위함이다. 왕궁부 역시 일반업무 부서와 그림자 업무를 처리하는 부서로 나뉘어 있다.

아샤에게 미행용 마법이 있다는 것을 추론한 이유 역시 본작에서의 기억 덕분이다.

현재의 왕궁부 장관, 카일 티오리아는 본편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헤르만이 왕자의 집사로 등장한다. 그와 친해지면 이것저것 회상을 하는데, 티오리아의 자제들은 7세부터 ‘그런 쪽’의 마법과 기술을 연마한다고 한다.

아샤 역시, 작중 아셰리아 여왕의 그림자로서 등장한다. 대부분의 루트에서 그녀는 여왕을 끝까지 보좌하다가 죽는다.

아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죽여야 하나, 수상한데.”

“왕녀를 지키는 메이드인데 남작가나 자작가의 여식도 아닌 고위 귀족의 자제. 이런 느낌이면 우리 세계에서 뻔하거든요.”

물론 창작물에서만.

거기다 난 창작물에서 너네 집안 사정을 대강 봐버려서 알고 있습니다.

암살자 메이드는 쏘아붙이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말이 믿길 것 같아요?”

“투덜투덜 말만 많네. 쓸 수 있어요, 없어요? 저 모자란 인간들 따라가서 들을 게 있어서.”

아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저것들이 모자란 놈들이란 건 마음에 드네요. 청력을 올리고, 거리 유지하는 동안 인기척만 덜면 되죠?”

“우와 역시 유능한 메이드.”

“닥쳐요.”

내가 태연한 척 하고는 있어도...

너 무서워 이년아.

최강 암살자 가문인데 안 무섭겠냐.

치마에 왠지 모를 무게감이 있는데, 소설이나 게임에 자주 나오는 그 설정이 맞을 것이다.

잠시 후, 유능한 갈색 머리 중학생 메이드님이 손짓을 하자 검은색 무언가가 퍼졌다. 그것은 우리의 귀와 발을 감쌌다.

아샤는 자신이 행한 마법을 간단히 설명했다.

“당신이 초심자니까 청력은 조금만 올렸어요. 지금은 대낮이니까 다른 걸 쓰면 오히려 들키기 쉽고, 발소리나 다른 환경음만 죽였어요.”

“메이드님 최고!”

“귀찮아….”

청력이 좋아져서 평소 들리지 않아야 할 거리의 대화까지 들린다.

너무 많은 말소리에 약간 머리가 아프다.

그 수없이 많은 대화 속에서...

방금 집무실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찾는다.

“아~ 공주님이 정말 똑똑해서 다행이야.”

“너는 양심 좀 챙겨라.”

“왜? 공주님께 부탁드리는 게 4배는 빠른데.”

“적어도 기본적인 건 직접 처리하고, 모르는 부분만 자문을 부탁드려야 하는 거야.”

“뭐래.”

가슴이 또 답답하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런 증상은 있었지만, 에코니아에 떨어진 뒤로 유독 심해졌다.

“그나저나 그 왕자는 참 답답하다.”

“그 나이치고는 잘 하시는 거 아닌가.”

“그래도 말이지 비교는 할 수 있잖아.”

“뭐, 공주님이 엄청나긴 하지.”

왜 어제 알현실부터 짜증나는 일이 한가득일까.

이것들은 아래서부터 썩어있다.

윗물은 멀쩡한데 아랫물이 썩다니.

“아샤, 부탁 좀 들어줄래요?”

“뭐요.”

아무래도 퉁명스러운 메이드님에게 부탁을 하나 더 해야겠다.

“가정교사로서 첫 업무, 협조 좀 부탁해요?”

메이드의 표정은 점점 썩어갔다.

* * *

3층짜리 동관 건물, 그중에 2층 중앙계단을 올라와 왼쪽 복도로 들어가서 세 번째 방. 현재 내 거주지다.

아샤와 함께 관리들 몇 명을 스토킹…은 아니고 도청했다. 두 개 다 범죄긴 하네.

미행하다 보니 얼빠진 소리를 하는 관리들은 꽤 많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뒤로는 아샤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고 동관으로 돌아왔다.

하늘엔 이미 햇님은 사라지고 달님이 계신 시간, 나는 돌아오자마자 지쳐서 침대에 누웠다.

푸근하면서도 적당한 탄력감.

최고급 호텔에 온 기분이다.

집무실에서 계속 종이와 문자를 보고 있었더니 눈이 피로하다. 밥은 아침과 점심 휴식시간에 먹은 과자 몇 개가 전부.

몸의 피로와 눈의 건조함이 겹쳐 절로 눈을 감게 된다. 그리고 눈을 감으니 방금 그 관리들의 대화가 비디오처럼 머릿속에 재생된다.

어디든 남을 이용해 편하게 사려는 충동에 지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하필 라는 이세계에 와서까지 보고 싶진 않았다.

“하아…. 또 이러네.”

또다시 무거운 돌로 가슴을 누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협심증인가? 그럴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유독 이곳에 온 뒤 심하다.

“일단 좀 씻자….”

터덜터덜 일어나서 욕실로 향하는데, 동관 뒤뜰 방향에서 휙휙 무언가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로 가서 내려다보니... 알렉산더 왕자와 그 옆에 있던 검은 머리 소년, 기디언이라고 했나.

그 두 명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계속.

나는 그걸 멍하니 지켜보았다.

사실 내가 알렉산더라는 캐릭터를 싫어하던 이유는 여왕을 죽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백절불요. ???.

본편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정말 올곧은 사람이다. 불의에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그 어떤 경우라도 원칙을 지키려 한다.

그 모습에 대부분 팬이 되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고집이나 생각의 짧음으로 보였다. 아마도 본편을 얕게 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그의 정의는 이방인의 선택이 다른 사람을 향했을 때도 엄연히 존재한다.

빈민가에 집사와 잠복하는 이벤트.

이방인과 함께 갈 때 플레이어의 시점에서 거지에게 금화 하나를 베푼다. 그 금화를 받은 빈민은 다른 루트에서 등장하는데, 이방인의 눈 앞에서 폭력배에게 금화를 뺏기고 사망한다.

또 다른 토벌 이벤트.

알렉산더는 왕족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토벌 임무를 받아들인다. 선택받지 못한 루트에서 그는, 자신을 지키던 병사만 잃은 채 이방인에게 도움을 받는다.

이를 두고 알렉산더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는 정의롭다. 가장 보편타당한 가치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저... 상황을 바라볼 때 그 주변을 바라보지 않았을 뿐이다.

한 가지 가치는 여러 상황과 여러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법.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이렇게 에코니아 아포칼립스는 겉으로 절망을 숨긴 게임이다. 대표적인 루트만 끄적이면 ‘아포칼립스’라는 말이 과하다 느껴진다. 하지만 이방인의 선택을 받지 못한 다른 등장인물 전원에게 아포칼립스가 닥친다.

커뮤니티에 루트를 정리할 시절, 초반에는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며 신기해하는 반응이 대부분었다. 그 후로는 점점 대부분이 내용은 읽지 않고 조롱하는 댓글들만 남았었지.

아셰리아 킬러라고 지껄이던 놈은 마지막 게시글에서조차 날 놀렸다. 떠올리니까 열 받네.

에코니아에서 알렉산더의 행적을 떠올리다보니, 어느새 기디언이라던 아이는 왕자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귀족 자제 같은데 누구일까.

기디언이 돌아간 뒤에도 알렉산더는 계속 검을 휘두르다 뒤뜰 한 켠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망연히 먼 하늘을 본다.

전기가 없는 세계.

마력등이 이곳저곳을 밝히고는 있지만,

이곳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모든 소음이 사라진 와중에.

“나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소년의 목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렸다.

“만약 아바마마라면...”

…….

알고 있었구나.

집무실에서 그 분위기의 의미를.

아셰리아 여왕은 작중 특별하다는 서술이 끊이지 않는다. 그녀는 타락했다는 말이 돌 때마저 합리적인 판단만을 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동경했었지.

하지만 이곳에 직접 와보고 알았다. 그녀는 이미 공주일 때부터 특별했다. 여왕인 시절에 비해 표정 변화가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비교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자라 보이기만 하던 왕자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13세 어린 나이에 알고 있었다.

저 나이에 자신의 가치를 고민한다.

나는 13세에 무엇을 하고 있었나.

에코니아 아포칼립스 공략 3년차였다.

현실을 보기 싫어서 매몰되어있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 두 번이 울렸다.

“선생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아셰리아 공주였다.

나는 창가에 멍하니 있던 자세를 고쳤다.

공주는 자기 전에 입을 듯한 드레스에 가디건 비슷한 것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과 어울리는 연한 연보라와 흰색이 조합이다. 손에는 첫날 공주의 침실에서 보았던 책을 들고 있었다.

“도서관 일정을 정하려고 왔습니다.”

“저는 한가한 표류자니까요. 공주님께서 편할 시간대가 좋을 것 같네요.”

“그럼 내일 10시에. 어떤가요?”

“네, 알겠습니다.”

간단한 말로 일정을 정해버렸다.

아셰리아 공주의 용건은 끝났을 텐데... 날 계속 보고 있다. 예쁘지만 무표정한 인형같다.

“지금 생각하시는 길은 옳은가요?”

“네?”

인형이 작은 입을 움직여 물었다.

“아닙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난 그저 멍하니…

떠나간 빈자리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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