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9화 (9/215)

〈 9화 〉 1­8. 공주님과 함께하는 역사와 마법.

* * *

1­8. 공주님과 함께하는 역사와 마법.

다음 날.

아셰리아 공주는 전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바로 도서관으로 직행한 상황이다.

왕실 도서관의 부지는 긴 타원형에 내부는 농구장처럼 뻥 뚫린 구조. 벽 둘레를 가득 채운 책장은 3층까지 올라가 있다.

아셰리아 공주는 특별 구역에서 가져올 책이 있다고 하며 어딘가로 사라졌고, 나는 도서관의 전경을 구경하는 중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의 발생지를 보니 거대한 책탑이 있었다.

아셰리아 공주였다.

쌓인 책들의 높이는 시야를 가리는 수준.

“들어드릴게요.”

“… 감사합니다.”

책을 가지고 온다길래 많아봐야 한두권 정도일 줄 알았다. 저 정도면 그냥 나한테 부탁하면 됐을 텐데 굳이 자신이 들고 오고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 중앙의 책상에서 책을 두고 마주 앉았다. 책은 대부분 한국어였지만 몇몇은 영어를 닮은 이상한 글씨로 쓰여있다.

“음, 이 책들은 못 읽을 것 같은데요. 이 문자는 제가 모르는 문자라서.”

“그러신가요... 그 문양의 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분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셰리아 공주는 제일 낡아보이는 얇은 책 하나를 펼치더니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코니아의 탄생신화와 역사였다.

"이 세계는 원래 창조주 혼자 유유히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거하고 있던 장소의 이름은 근원. 하지만 혼자라는 사실에 권태감을 느낀 창조주는 하나의 정원을 만들게 됩니다. 그게 바로 저희가 살아가는 에코니아입니다."

"창조주는 자신이 살던 곳을 생각하며, 자신의 마력 대부분을 쏟아부어 지금의 대륙과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를 만들었죠. 인간, 수인, 드워프, 엘프, 마인... 수많은 종족은 최초부터 이 대륙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는 그들에게 불완전한 감정을 불어넣었어요."

여기까지는 우리 세계에 있던 성서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물론 여러 종족을 창조했다는 건 판타지 느낌이 나지만 말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주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모든 것을 완성한 창조주는 다시 권태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창조물들이 느끼는 감정과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마력을 연결하였죠. 창조주는 근원에서 자신이 만든 정원을 관찰하는 나날을 보냈어요. 하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피조물들이 감정을 드러내고 싸우는 현실을 보고 창조주는 실망에 빠져버린거죠. 급기야 신은 에코니아를 지워버릴 생각을 하며 다섯 신수를 만들고, 악의 감정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아셰리아 공주는 읽고있던 책을 덮으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창세입니다.”

"허어..."

잠자코 듣고 있었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창조주는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세상을 만들어 놓고, 멋대로 피조물들에게 감정을 불어놓고 싸움을 구경하다가, 자신의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전부 멸망시킬 생각을 한 것이다.

무슨 방송 플랫폼의 악질 시청자인가. 인간으로서 기본이 안된 놈이다.

아... 인간이 아니니까 저런건가.

"쓸데없이 감정을 줘놓고 제멋대로네요."

"...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내가 창세에 관한 감상을 내놓자, 아셰리아 공주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여기서 웃을 포인트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공주는 다음 책을 들었다.

“다음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에우데미아 왕국의 건국사입니다.”

공주는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첫 번째 표류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레트 에우데미아. 저희 나라의 시조이십니다. 시조님께서는 꾸준한 생각을 통해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며 행동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레트는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며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꾸준한 생각을 통해 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며 행동한다... 내 세계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던 가치다. 두 세계가 막상 철학의 시작이 비슷하니 꽤나 신기하다

공주의 옛날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 여행에서 시조님은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순수한 여성을 만나 반하게 됩니다. 아레트는 그녀에게 헬레니아라는 성을 주었죠. 이후 둘은 결혼하게 됩니다. 그 아이들은 장성한 뒤 나라를 세우니, 그게 바로 에우데미아 왕국과 현재 교국의 시조가 되는 헬렌 왕국입니다."

"이후 부부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영원한 여행을 시작합니다. 신수들을 설득해 신을 끌어내리기로 한거죠. 창조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신은 에코니아의 모든 것을 저주하며 사라졌고, 신이 있던 근원에는 시조님과 헬레니아의 성을 가진 여성... 초대 성녀님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약간 찜찜한 무언가가 남긴 했지만... 그래도 해피 엔딩이 아닐까. 악신이 죽었으니 말이다.

공주는 방금까지 읽던 책을 덮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건국 신화입니다. 다음은 선생님의 팔에 새겨진 문양과 직접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런가요."

"네. 바로 200년 전 악인기의 역사입니다."

이번에는 한국어로 적힌 책을 집어든 공주.

그녀는 다시금 역사를 읊어주었다.

"신이 죽고 나서 약 천 년의 시간이 흐르고, 세상에는 온갖 악인들이 넘쳐나 태초의 혼란이 재현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새로 나타난 한 표류자 남성이 두 여성과 함께 평화를 추구했죠. 하지만 세상에 악인은 줄어들지 않았으니... 표류자는 전설 속의 신수들을 찾아가기로 정했습니다."

"표류자는 결국 신수들과 닿을 수 있었고, 그들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근원에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이후 표류자는 근원에 나아가려 했고... 그 과정에서 한 여성은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류자는 남은 한 사람의 여성과 근원으로 찾아가 모든 것을 해방시켰고, 이후 태초의 혼란을 일으킨 악인들은 다시금 잠들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일을 해낸 표류자를 기리며 후대의 사람들은 이를 해방자라 부르며, 이날을 기점으로 해방력이 시작되었어요."

공주는 읽던 책의 표지를 보이며 말한다.

"이 문자도 해방자님이 전파한 것입니다."

해방자님은 한국인이었다.

의지의 한국인은 이세계에서도 대단하다.

그나저나 근원이라... 그곳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공주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의 팔뚝에 있는 문양은 해방자와 마지막까지 함께한 마녀의 상징입니다.”

“아...”

“그 분은 분노를 간직한 마녀라고 불립니다. 해방자님과 함께하셨기에 위인으로 모셔지죠. 좋은 문양이긴 하지만 알려지면 적응하시기도 전에 일이 커질 수 있으니... 필요가 생기기 전까지는 숨기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공주의 말이 백번은 옳았다.

아무리 위인으로 모셔지는 인물의 문양이라 해도 이것으로 내가 과한 관심을 받게 되면 적응하는 데 어려움만 커질 것이다.

“그럼 일단 조용히 지나가죠.”

사실 뭐가 됐던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싫다.

이런 문양 하나로 관심을 받게 되어봐야, 나 자신의 가치 그 자체를 보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그런 관계따위는 원하지 않는다.

공주는 내 대답을 듣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더니 한 종이를 꺼냈다. 명함처럼 생긴 카드였다.

“이건 마력적성 검사지입니다. 한번쯤 검사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 들고 왔습니다. 해보실래요?”

공주님이 내민 마력검사지.

그 얇은 종이를 들고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음…. 마력이라.

일반인인 내가 이 마력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역사에서 표류자라는 단어가 꽤 많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선 상식이란 건데... 게임에서는 표류자라는 단어가 없었다.

혹시 이방인과 표류자는 같은 말은 아닐까... 물론 게임에서 왕실 가정교사라는 선택지는 없었어도 직업 권유 자체는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비슷한 직업 권유를 받은 상황.

그렇다면 나도...?

…….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마력과 마법에 대한 동경.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저는 마력을 쓸 줄 모르는데, 검사지가 알아서 마력을 판독해주는 건가요?”

“이건 심상 마력의 잠재력을 검사하는 도구입니다. 굳이 마력을 주입할 필요는 없어요.”

심상 마력이라는 건 처음 듣는 개념인데.

혹시 내가 게임에서 본 것 중 하나려나...

“검사지 중앙에 피부를 접하시면 됩니다.”

아셰리아 공주는 내가 검사지를 받은 뒤로 내 손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나보다 그녀가 더 궁금해하는 것 같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동물처럼 보인다.

그런 공주의 모습을 보던 나는 표시된 부분에 손가락을 대고 검사지를 지켜보았다.

1...

2...

3...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당황하여 공주의 표정을 살피는데...

그녀는 평소 무표정한 얼굴에서 약간 입이 열린 채로 굳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공주를 불렀다.

“공주님…?”

“아, 네?”

그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공주에게는 약간 실망한 기색도 보인다.

“음, 일단 심상 마력은 없다고 봐야겠네요.”

“역시 저는 그냥 일반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나 싶네요. 마력은 못 쓰겠네요.”

“아뇨. 심상 마력은 약간 특별한 마력이에요. 모든 사람이 마력을 쓸 수는 있어요.”

“그럼 다른 마력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네.”

공주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이어간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창세 신화에서 창조주는 마력을 두 번 사용합니다.”

“감정과 행동을 지켜보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창조할 때도 썼죠.”

가장 큰 마력을 쏟은 일을 잊고 있었다니, 나도 모르게 창조주의 관음증에만 꽂혀 있었다.

공주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람은 모두 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심상 마력은 더 강한 감정과 마음 속 의지를 요구합니다. 그러다보니 특정 문화나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발현하기 쉬워요. 일례로 저희 왕실과 대부분의 사대가문은 전부 심상마력 사용자입니다.”

“그에 반해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데 사용한 마력. 자연 마력은 모든 생명체가 의식적으로 조작할 수 있어요. 물론 훈련은 필요하지만요.”

자연 마력과 심상 마력.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에코니아 아포칼립스는 당연히 판타지 게임답게 마법을 쓸 때면 '마력'이 필요했다. 그 중 보편적으로 배울 수 있는 마법은 별개의 자원을 하나 더 소모한다. 바로 '이성'이다.

이성 수치는 마력의 회복률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고갈되면 온갖 정신적인 디버프에 시달리게 되어 전투 불능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성 수치를 깎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캐릭터별 고유 마법이 있었다. 혹시 그게 공주가 말하는 심상 마법이라는 걸까.

그런 마법을 보유한 적들은 상대하기 까다롭긴 했었다. 그 마법들은 하나같이 특이하고 상식을 무시한다. 하지만 습득하기가 귀찮고 사용처도 한정적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심상 마법을 습득하려면 게임 속 캐릭터인 이방인이 그 마법을 쓸만한 감정 상태를 조성해야만 했다. 공주의 말처럼 특정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데, 정말이지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상관없는 일 아닐까.

어차피 그 스킬들은 내가 게임을 순수히 즐길 때 사용하는 세팅이나 조합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내가 마법을 배워야 할 상황이 온다 해도 심상 마력은 쓸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공주에게 말했다.

“그럼 자연 마력에 관한 책도 있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제 방에 몇 권 가져가서 읽어도 되나요?”

“네, 그럼 제가 몇 권 추천해드릴게요.”

“그리고 역사책도 몇 권 부탁드려요.”

* * *

그 후 공주가 추천해주는 책들을 모두 들고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시간대였다. 역사서는 내 세계의 역사와 비교해가며 수업을 준비해볼까 해서 빌렸고, 마법서는 그냥 읽어보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 땅만 보면서 걷는 공주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차마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왠지 내 탓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방 안의 책상에 앉아 역사서를 펼쳤다.

…….

곰곰히 생각하니 부조리하다...

내가 에 와서 한 일.

1. 알현실에서 돼지에게 욕 듣기.

2. 부담스러운 집안의 가정교사 취직.

3. 지옥의 문서작업. (추가근무수당 없음)

4. 미소녀가 들려주는 역사 공부.

5. 현재, 다른 세계 역사 공부하기.

이세계 맞냐... 4번은 좋네.

이세계에 온 이시하(23).

이러려고 왔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거기다 나는 강제로 끌려온 것이다.

내 상황이 객관적으로 불합리하다.

왕비님이 주신 적응 기간은 사흘, 남은 날은 내일 하루 뿐이다.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역사책을 먼저 펴는 게 올바르긴 하다.

하지만 내일도 시간이 있잖아.

내일 해도 되지 않을까?

마법, 새로운 걸 학습하는 일.

그것은 올바르다.

마음속으로 변명을 주구장창 늘어놓으면서 역사책을 구석으로 밀어둔 뒤 마법 서적을 폈다.

[HELLO! 자연 마력의 세계! 환영한다!]

[매우 쉬운 자연 마법!]

... 무슨 헬로 월드인가.

창조신부터 사이비라 미친 사람들이 많은 세계다. 그러니 그 게임이 그렇게나 쓰레기였지.

…….

일단 진정하고 공부하자.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학문이다.

나는 책의 개론 부분을 펼쳐 요약을 시작했다.

이세계에 와서 공부라니 어질어질하긴 하다.

[자연 상태의 마력을 어떻게 하면 조작할 수 있는지 집중하라. 현실에서의 이론은 수단에 불과하다. 마법의 발동 조건을 만족시키고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라. 그걸 하지 못한다면 영창을 사용하라.]

잘 이해는 안되지만... 게임에서도 같은 마법인데 영창을 하는 캐릭터와 하지 않는 캐릭터가 있었다. 나름대로 이해력이 충만하면 마법을 무영창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거겠지.

발동 조건은 환경에 따라 강해지는 마법이 있었던데다, 속성 버프를 주는 아이템을 생각하니 이해가 쉽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마법의 위력이 달라지거나 사용할 수 없다는 것에 유의하자.

[모든 자연 상태의 만물은 자연 마력으로 이루어져있다. 자연 마법은 그 마력을 끌어다 사용자의 내면에서 가공하는 것이며, 그 과정이 사용자의 정신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고로 끊임없는 사유, 명상, 기도, 성찰과 같이 여러 가지 내적인 수련을 통해 마력의 적성을 키워나가야 한다.]

... 무슨 마법에 기도까지 필요해.

사이비 같아.

그래도 게임 속 이성에 대해 내가 추론했던 내용은 대강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캐릭터나 아이템에 붙어있는 능력치의 효과 중 하나를 확인한 셈이다. 이것도 나름대로 큰 수확이겠지.

…….

과연.

나 따위가 이걸 습득할 수 있을까.

확실히 나는 이미 게임에서 수많은 직업 루트를 경험했기에 마법서에 존재하는 마법은 대부분 안다. 거기다 여기 안 나온 고급 마법이나 직업별 스킬도 줄줄 꿰고 있다. 숨은 용도, 범위, 이펙트, 데미지까지 외울 정도로.

하지만 난 본편의 이방인이 아니다. 카일 궁정부 장관은 표류자 모두가 특출난 건 아니라 했다. 아마 나 역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아셰리아 공주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마법을 습득하는 건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과연.

이를 습득한다면 미래는 바뀔까.

나는 99개의 루트를 찾았다. 그 99개의 흐름에서 에우데미아는 결국 반쯤 멸망해버리며, 아셰리아 여왕은 마지막에 반드시 죽는다.

물론 루트가 더 있을 수도 있다. 100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수라 그런 것 같다는 막연한 이유가 아니다. 그 쓰레기 게임은 깊게 파고드는 플레이어에게 무력감을 주도록 설계된 게임이다. 그런 게임이 99개의 루트가 전부일 리 없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에 찾아낸 그 루트. 아무런 복선도 없던 흑막이 갑자기 나타나 아셰리아 여왕을 죽인 그 전개. 그걸 본 내 입장에서 희망찬 전개가 남아있을 거란 기대는 할 수 없다.

과연.

내가 저걸 습득하는 게 옳은 걸까.

만약. 내가 마법을 습득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미래가 바뀐다고 할 때. 내가 에코니아의 마법을 습득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분에 넘치는 가정이긴 하다. 마법을 잘 배울지는 미지수에... 내 선택 따위로 바뀔 리 없다.

그래도 만약 가능하다면. 에코니아의 새로운 엔딩을 내가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내가 할 자격이 있는가.

게임 속 세상이 실체가 되어버린 나다.

게임에서는 내가 멋대로 세상을 휘둘렀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권리가 없는 사람이다.

... 기운 빠진다.

책상을 벗어나 침대에 누웠다.

마력등의 불빛이 너무 밝다.

왼팔로 불빛을 가리니...

자연스레 왼팔의 문양이 옷감 너머로 보인다.

늑대의 얼굴에 이어진 불길.

도서관에서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옷소매를 걷어 보았다.

해방력 196년.

분노를 간직한 마녀.

그 새빨간 여자는 마녀가 맞겠지.

이백 년 전 인간이 살아 있다니.

나에게 뭘 바라고 살려놓은 것일까.

사실 잘 믿기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나에게 무언가를 했다.

그리고 이곳 에코니아에 날 떨어뜨렸다.

수상한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또다.

붕붕 울리는 소리가 울린다.

어제의 그 시간이 또 왔나 보다.

억누른 기합 소리.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창문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금발 미소년이 검을 휘두르고 있겠지.

저 노력 바보는 또 노력한다.

도대체가 마음을 안 굽힌다.

부러지기 전까지 굽히지 않겠지.

그런 캐릭터니까.

…….

저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알까.

자기 동생을 찌르고 우는 미래를.

그러고도 구하지 못할 왕국의 미래를.

…….

일단 노력해보자.

자존감부터 회복해야 한다.

나는 왕실 가정교사님이시다.

나는 할 수 있다.

일단 준비해둔 것부터 시작하자.

내일은 수업 준비를 하자. 그리고 그 다음날엔 수업을 미뤄서라도 왕비님을 뵈어야겠다.

'특별한 수업'을 위한 사전 작업이 필요하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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