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111. 사교계 데뷔까지 생각해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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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사교계 데뷔까지 생각해야 한다니.
이시하의 참관수업 이틀 후.
에우데미아 왕성 본관의 집무실.
그곳에는 국왕 내외와 장관들은 다탁 근처에 둘러앉아 있다. 불리지 않은 것은 오직 원수부의 장군, 발람 프라시스 단 한 명뿐이다.
원래 왕실 가정교사가 된 이시하에게 참관수업의 의미는 그저 학생들과 관리들 사이에 거리를 벌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는 전혀 다른 수준의 문제였다.
재상, 제드로 프로네시스가 자신의 누이이자 왕비인 루시아에게 말했다.
“누님,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그래도 말이지. 썩어도 귀족이라는 것들이 그딴 식으로 하면서 봉급을 받고 떵떵거려?”
“마음은 이해해. 어쩔 수 없잖아. 건국제 연회 때 면박을 주는 수밖에 없지. 가주들 앞에서는 기도 못 펴는 놈들이니까.”
건국제.
그것은 해방제와 더불어 에우데미아에서 열리는 가장 큰 축제다. 거리에서는 일반 백성들과 객들의 술판이 벌어지며, 왕성에서는 국왕과 귀족 간에 화합을 도모하는 사교회가 열린다.
지방 영주들에게는 년에 두 번뿐인 국왕 알현의 기회 중 하나. 중앙 정부에 잘 보일 기회가 한정된 그들에게는 최고로 중요한 이벤트다.
왕궁부 장관, 카일 티오리아가 말했다.
“맞습니다, 왕비님. 이번 사건에 연루된 놈들은 지방 귀족들의 탈락자 녀석들이 대부분이니, 건국제에 전부 정리하면 됩니다.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른 놈들을 가주들이 감쌀 리 없습니다.”
에우데미아의 귀족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는 지방 영주 귀족.
왕도의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는 관료 귀족.
이들 중 지방 영주의 자제들 중 후계자가 아닌 자는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기에 귀족 작위가 끊기게 된다.
물론 후계자가 아니더라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면 작은 영지라도 관리하며 한 단계 낮은 작위를 받을 수야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영지가 넓은 백작령 이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번 집무실 소동을 일으킨 대부분은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한 지방 귀족 자제들. 왕도로 떠밀려와 도시 귀족 자리를 노리던 자들이다.
왕비, 루시아는 카일의 말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 멍청이들을 쓰고 있다가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서 내가 더 화나는 거야. 우리가 바쁜 틈을 타서 그러다니 불경이 지나쳐.”
“일단 그 자식들은 제드로와 제가 경고 조치를 해둔 상태이고, 영주들에는 미리 서신을 보내두었습니다.”
루시아 왕비는 당장 그들을 쳐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깨물어 덜 아픈 손가락이라도 손가락인 법. 그들은 썩었어도 영주의 자제들이다.
왕실에서 일방적으로 결단했다가 영주 자제들이 단체로 해고되었다는 소문이 돌면, 그것은 영주들의 체면을 깎는 일이 될 수 있다. 자연스레 지방의 영주들과 충분한 합의를 한 후 처벌하는 방향만이 남는 것이다.
거기다 더 큰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왕궁부장, 카일은 또다른 보고를 올렸다.
“국왕 폐하, 그 관리들 대부분이 프라시스 가에서 그들만의 사교 모임을 진행했다는 정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썩어빠질 놈들. 연줄을 믿고 설치다니.”
카일 티오리아의 보고에, 사법부장인 아론 미모스가 분노를 표했다.
이시하에게 있어 프라시스 가는 게임의 중역으로서 등장하지 않았기에 모르겠지만, 그들은 왕국의 사대 가문 중 하나. 대대로 전선의 선두에 서며 에우데미아를 섬기던 가문이다.
그 가문에는 현재 단 두사람 외에는 없다.
원수부의 장군, 발람 프라시스.
왕자의 호위를 자처하는 기디언 프라시스.
발람은 가문에 단 하나 남은 성인이기에 가주에 오른 자. 그런 그가 프라시스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있으며 자신만의 파벌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왕가로서는 그를 쉽게 처벌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대가문의 혈통과 심상 마법은 보존되어야 하는 법. 기디언 프라시스가 성년을 맞이하기 전까지 함부로 발람을 경질시킬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이기에 탈락한 지방귀족 자제들은 발람 프라시스와의 연줄을 믿고 설칠 수 있던 것이다. 왕실의 중진들에게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발람과의 친분만으로도 중간 관리들의 간섭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으니까.
왕비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로리아만 있더라면 나라가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건데.”
글로리아 프라시스.
6년 전 돌연 행방불명 된 프라시스의 원 가주이자 기디언의 어머니. 현 상황에선 그녀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국왕은 침울한 분위기를 정리하듯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일단 접어 두자고. 지금이 9월이니 앞으로 건국제까지 두 달도 채 안 남았어.”
그리고 국왕은 말을 돌리려는 시도를 했다.
“그래서 카일, 보았나? 아셰리아가 그 정도로 기특한 생각을 한다니.”
“예에.”
“거기다 알렉산더도 참 역시 내 아들이야. 당차게 그런 의견을 말한다니. 왕이 된다면 백성들이 참 잘 따를거야”
“예에.”
실제론 딸과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할 거면서.
뒷모습만 봐놓고도 저렇게 즐거울까.
카일은 속마음을 숨기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말을 돌리려는 의도긴 하지만, 국왕은 참관수업 이후로 들뜬 상태다. 현 사태의 심각함을 알아도 그에게는 참관의 기쁨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평소 발람을 대신해 대형 마수나 판타스매터 토벌을 가는 그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자식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왕비와 재상도 ‘평소에도 저렇게 해보지.’라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국왕을 지켜보고 있지만, 속으로는 내심 수긍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왕궁부장이자 그림자의 수장, 카일에게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으니.
“그런데 이것들 명단이 아샤의 필체인 게 마음이 쓰이네. 아무리 선생이 부탁을 했었다 해도 하필 아샤에게 부탁을 하다니. 영 찜찜해.”
“그저 우연일 수도 있지 않나. 거기에 그 새로운 왕실 가정교사 덕에 그 치들을 잡아낼 수 있었고. 물론... 자네들은 이용당한 거나 마찬가지로 보이네만. 허허허.”
카일의 말에 노년의 사법부장, 아론이 답했다.
국왕은 아직도 겉으론 부정하는 중이다만.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의 신뢰도는 집무실 내 인원들의 마음속에서 크게 뛰어올랐다.
특히 아론의 마음에는 제대로 각인된 편이었다. 그에게 이시하의 첫인상은 전이 첫날 알현의 장에서 정의를 거론한 건실한 청년. 거기에 이번 일로 좋았던 첫인상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그래도 걱정된다면 말일세… 사람을 붙이면 되겠지.”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법.
의심되면 사람을 붙이는 게 마음이 편하다.
아론 미모스,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기에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자의 말에 집무실 인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국왕은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아론 아저씨. 사람을 붙이면 눈치채지 않을까. 대화를 해보니 이시하 그 자는 눈치가 꽤 있는 모양이던데.”
“이 노인에게 다 생각이 있다네.”
노인은 이미 그 정도는 준비되어있었다는 양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명실상부 새로운 왕실의 가정교사, 그 자리에 어울리는 능력 있는 수행원을 붙여줘야겠지.”
“거기다 건국제가 두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왕궁의 예법도 익혀야 하지 않겠나. 익숙지 않아 보이던데.”
그는 차를 마시며 다음 말을 준비했다.
“헤르만과 한나를 그에게 붙이면 어떤가.”
아론 미모스는 빙그레 웃고 있다.
“뭐, 나는 사실 카일 자네와 같은 걱정은 하지 않는다네. 이건 원래부터 건의하려 했던 사항이야. 흔치 않은 표류자가 아닌가, 건국제까지 이 세계에 적응하도록 도와야지.”
이시하가 모르는 사이.
그가 신경 쓸 일만 늘어갔다.
* * *
나는 지금, 에코니아에 떨어진 뒤로 내 숙소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들른 곳에 와있다.
도서관? 아니다.
교실? 아니다.
내 위치는 현재 집무실 회의용 소파.
정말이지 너무 자주 오는 것 같다.
오늘은 국왕 내외가 과외교사 업무를 지원하기 위한 지급품이 있다고 해서 찾아 왔다.
뭘 주려고 불렀을까.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집무실 문을 연 것까지는 좋았다. 오히려 그때는 기대감이 더 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상석에는 왕비님.
국왕과 왕궁부장은 멀리 국왕의 책상에.
맞은편 소파 뒤에 제드로 재상님.
그 소파에는 금발 청년과 적발의 아가씨.
기대감을 가지고 연 집무실 문 안에는, 경비 지급을 하는 것 치고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다 새로운 두 사람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도대체 저 두 명이 왜 여기 있는거야...
내가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자, 루시아 왕비가 두툼한 주머니를 내밀며 말했다.
“먼저, 여기 활동경비입니다.”
주머니를 열어 확인하기엔 너무 무서웠다.
아주 무거워보였기 때문이다.
“대금화 스무 장입니다.”
잘 감이 안 오는데.
아직 왕궁 밖으로 발도 못 디뎌본 나다. 물론 게임에서는 골드, 실버, 카퍼를 단위로 쓰긴 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고급품을 사기 마련이라 생활과 관련된 물가는 모를 수 밖에 없다.
지금 당장에 떠오르는 건...
알렉산더가 자선을 위해 베푼 1골드가 사람 목숨보다 귀하다는 것 정도다.
왕비와 재상이 내 반응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설명을 해드려야 할까요?”
“하급귀족 부부의 기초생활비가 둘 정도인데.”
왕비가 고민을 하고 있자, 재상님께서 설명을 덧붙여주셨다.
한 달 생활비가 대금화란 둘이라... 하급귀족이면 지방직 공무원 정도일 것이다. 기초생활비면 딱 식비에 소모품 정도겠지.
원래 세계에서는 2인의 기초생활비가 80만 원 근처라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대금화 2장이 80만원... 그렇다면 저 주머니는 800만 원 정도려나.
활동경비로 800만원. 아직 내가 거리에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면 아이들과 견학을 간다거나 할 때 충분한 경비가 될 것 같다.
무려 왕족의 가정교사인데다 나부터가 공작에 준하는 계급을 가지고 있다. 이것저것 품위를 유지해야 귀족 사회가 돌아가니 적당한 금액아닐까.
“참고로 1년 생활비일세.”
80 x 12 = 960.
960 x 10 = ?
알고 보니 저 주머니는 약 1억이었다.
하하하... 정말이지.
사람을 들었다 놓는 재주가 있으시네, 재상님.
알렉산더는 약 500만 원짜리 대금화를 슬럼가 빈민에게 적선한 거군. 이 자식, 사람을 돈으로 죽이기 전에 꼭 금전 감각을 가르쳐야겠다.
“음, 부족하신가 보군요. 활동경비는 모자라시면 재상부에 지출 내역서와 요청서를 올려주세요. 연봉은 중앙은행에 대신 예치해두었으니, 직접 찾아가시면 될 겁니다.”
“전혀 안 부족합니다. 제가 궁성에서 나갈 일도 없어서 오히려 너무 과합니다.”
“꽤 검소하시네요. 그래도 일단 받아두세요.”
“그냥 이것도 은행에 예치해주세요….”
내 연봉은 얼마일까.
궁금하지만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다.
“사실 본론은 따로 있어요.”
왕비님이 말을 돌리셨다.
“가정교사로서 업무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보조를 위해 집사를 붙여드리려고 해요.”
“안녕하십니까, 헤르만 티오리아라고 합니다.”
헤르만 티오리아.
원작에서 왕자의 시중이자 호위. 필레몬 국왕과 카일의 관계와 비슷하다.
갈색 머리에 나른한 얼굴의 미청년으로, 대인전에 있어서는 중상위급의 무위를 보인다. 내 몸의 안전은 충분히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다.
약간은 내 주변을 관찰하려는 의도도 섞여있을 법 하지만... 그래도 헤르만이라면 믿을만하다. 아샤와 어느정도 성격이 비슷해서 내가 적대적인 행동만 하지 않으면 따라줄 것이다.
“그리고 건국제라는 행사가 2개월 후에 열립니다. 그에 대비해서 예법을 공부해주셨으면 하여 아이 한 명을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한나 프로네시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한나 프로네시스.
재상부의 신성 제드로가 작중 사망하게 되는데, 그를 대신할 만큼 유능하다고 서술된다.
프로네시스 가문은 자연 마법에 능통한 자들로 유명하기에, 그녀 역시 자연 마법이 특기다.
“두 분, 잘 부탁드립니다.”
헤르만과 한나.
분명 둘 다 능력 있는 사람이다.
업무지원품이 사람이라니.
상상도 못한 정체.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님."
"선생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잘 부탁드려요."
내 기억으로 건국제는 에우데미아 왕국에서 일년에 단 한 번 열리는 이벤트 중 하나다.
이방인의 첫 동료가 되는 캐릭터가 귀족일 때 참여할 수 있는데, 연중 열리는 정치 싸움이 모두 여기서 열린다.
사교의 장을 가장한 전쟁터.
상대를 공격할 연극의 공연장.
보이지 않는 투쟁의 현장.
그런 곳에서 지킬 예법을 지키려면 꽤 고생해야 할 것 같다. 인사법, 댄스, 식사 예절. 그런 단어가 머리를 헤집어 놓으니 벌써 정신이 없다.
설마 사교계 데뷔까지 생각해야 한다니.
나.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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