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112. 일상 속에서. 기어오는 파란. (1)
* * *
112. 왕실 가정교사의 일상.
에코니아의 생활 문화는 내가 살던 세계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게임에서야 ‘게임이니까’라면서 넘길 수 있었지만, 달력이나 시간을 보는 법까지 완전히 같아서 놀랐다.
…….
중요한 건 내가 달력을 보았다는 거다.
건국제까지 남은 시간 약 7주하고 3일.
과연 멀쩡한 상태로 버틸 수 있을까.
에코니아에 도착한 뒤로는 열흘, 참관수업으로부터는 약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이세계 라이프에 벌써 지쳤다.
먼저 내가 진행하는 수업.
이건 내 일이니까 불만은 없다.
가정교사라는 일을 맡았으니까 당연하지.
수업은 주 3회로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진행하기로 했다. 하루 수업은 대학교 강의처럼 약 3시간씩 두 번으로 나뉜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원래 세계의 기준으로 초등학생일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이런 강의식 수업을 하면 전부 뻗어버릴 건데, 내 학생들은 잘 따라와 준다. 오히려 체력적으로는 내가 학생들보다 빨리 지칠 정도다.
궁금해서 아셰리아 공주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나름대로 왕가에 명문가 자제들이다 보니 이런 강도로 진행되는 강연에 많이 참석했다고.
수업이 없는 날에는 다음 수업을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와 연구한다. 내가 지금껏 배워온 학문들을 에코니아의 역사와 사회구조에 대입해서 수업하려면 필요한 일이다.
게임에서 경험하지 못한 생활 상식도 간접적으로 획득할 수 있기에 정말 알찬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그래.
교사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너무 힘들다.
“음식을 보고 감탄사를 내지 마세요.”
현재 나는 프로네시스 공작저의 식당.
내가 지친 제일 큰 이유는 예법수업이다.
“음식을 그릇에 덜어 담을 때는 여백이 중요합니다. 항상 음식이 그릇의 4할을 넘기지 않게 하십시오.”
왕궁 정문에서 마차를 타고 이십 분이다.
“음식을 먹고 남은 뼈는 테이블 아래 바닥에 버리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 버리셔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지내는 동관에서 왕궁 정문까지 가려면 삼십 분이 더 걸리지.
“에휴….”
“식사 자리에서 한숨을 쉬지 마세요.”
“그런 게 아니에요. 조금만 쉽시다.”
“아, 그런 거였군요.”
안경이 어울릴 것 같은 적발 아가씨, 한나 프로네시스가 말했다. 머리 색이 검정이었다면 공부 잘하는 반장 느낌이 났을 거다.
그녀가 말하길, 식사예절은 식탁에서 배워야 쉽다고 한다. 그 말을 시작으로 프로네시스 공작저에서 식사 예절을 배운지 벌써 사흘. 귀에 가시가 박히도록 지적받고 많이 고친 게 이 정도다.
첫날에는 뭘 했었더라.
그래...
손톱을 깎았다.
한나가 말하길.
'다과회나 큰 연회에서는 손으로 먹는 음식이 많습니다. 손톱이 길면 서로 손이 엇갈릴 때 손을 할퀼 수 있으니, 손톱은 미리 다듬어주세요.'
정말이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음 상황이 문제였지.
손톱깎는 도구라며 큰 가위를 하나 주었는데, 생김새가 마치 공포게임에서 나오는 그로테스크한 작도처럼 생겼었다. 그 모습 앞에서는 누구든 망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날, 동생뻘의 이세계 여자에게 손톱 정리를 당해버렸다. 9살 때 어머니 손길을 벗어나서 스스로 깎은 손톱을 왜 여기와서...
이렇듯, 정말이지 예법수업은 정신에 해롭다. 낮에는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예법수업을 받다 보니... 지난 사흘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피곤해졌다.
내가 피곤에 절은 한숨을 내쉬는 걸 보고, 내 뒤에 있던 헤르만 티오리아가 말을 걸었다.
“일하신 뒤라 피곤하시죠? 저도 어릴 때 이런 걸 배우다가 피곤해져서 가출할 뻔했어요.”
“헤르만 오라버니! 예법수업 중에 그런 소릴 하면 당사자는 오히려 기운 떨어져요!”
너는 전투나 암행 수업도 받았을 거잖아.
당연히 나보다 힘들었겠지.
내가 있던 세계 기준으론 가출해도 합법일거야.
헤르만은 내 보조로 발령받은 이후,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나에게 붙어 다닌다.
언제는 안 따라오는 것 같아서 확인차 허공에 대고 ‘헤르만’ 하고 이름을 불렀던 적이 있다. 그땐 그림자에서 갑자기 검은 마력이 일렁이더니 ‘부르셨습니까?’ 하고 나와버렸다.
... 정말 소름돋았다.
한나가 내게 묻는다.
“그나저나 선생님. 아셰리아 공주님이 선물 받으면 좋아할 만한 것 알아요?”
“저보다 한나님이 더 오래 같이 지내셨으니까 더 잘 알지 않을까요?”
우리는 나름대로 사흘간 이야기도 많이 해서 이 정도 일상 대화는 하게 되었다.
수업 때 말고는 왕자나 공주와 대화할 시간이 잘 생기지 않기에. 오히려 이 둘과 더 친해진 느낌도 있다.
“음, 항상 다른 일에 관심 없다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림을 잘 그리시긴 하는데, 그건 취미 같은 거잖아요.”
“그런데 선물은 왜 하시려는 거에요?”
“그야 친해지고 싶어서요?”
갑자기 무슨 소리지.
게임에서는 서로에게 냉랭한 관계 같았는데.
“그게, 귀엽잖아요?”
“예?”
“공주님 매번 무표정하게 있어도 귀엽잖아요. 그러니까 친해지고 싶죠. 거리 두는 느낌이 있어서 그러기 어려울 뿐이지.”
“저는 여기 온 지 열흘 밖에 안 됐잖아요.”
“선생님이랑 같이 다닐 때는 공주님 표정이 꽤나 좋아 보였는데.”
도서관에 가거나 집무실에 간 날 길에서 본 걸까. 그래도 11년을 같이 지낸 한나보다 나랑 다닐 때 표정이 좋았다니, 잘 이해가 안 되네.
고민하고 있는데 헤르만도 동조했다.
“공주님이 다른 사람들이랑 거리를 두려는 건 맞죠. 이번에 그 멍청한 관리들도 공주님의 성향 덕에 꿀을 빤 것도 있고.”
나보다 오랜 시간동안 아셰리아 공주를 관찰한 헤르만이 저렇게 말한다니. 저번에 집무실에 같이 있었을 때, 나도 저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자, 두 사람은 투닥대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나저나 헤르만 오라버니, 꿀을 빤다니 우리가 쓰기엔 경박해.”
“뭐 어때, 우리끼린데.”
“교사님도 계시고, 오라버니는 꼭 공석에서도 한번씩 말이 새잖아.”
“교사님은 이런 거 이해해주셔. 그리고 공석에서 자주는 안 그러잖아.”
“자주 그러니까 말하는 거야.”
티오리아는 원래 이런 느낌인가보다. 카일부터 시작해서 헤르만, 아샤까지.
게임에선 엘리트 살수 집단 느낌이었는데... 가문이 힘든 일을 해서 그런가 보다.
그러려니 해야지.
... 그래도 깬다.
그렇게 예법수업을 계속할 분위기는 깨져버렸고, 우리 셋은 하릴없이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아직 어색한 감이 있어서, 헤르만과 한나가 이야기하는 것에 반응만 해주고 있다.
그런 와중에 식당 문이 열렸다.
“한나, 가정교사님 그만 괴롭혀라.”
“그래, 일 끝내고 오셔서 피곤하실 텐데.”
재상부의 추가근무에서 해방된 제드로 재상과 리니아 공작부인이 들어왔다.
공작부인은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기에 처음엔 긴장했지만, 재상과 성격 비슷한 친절한 사람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왕가나 유력 귀족의 사람들이라 그런지. 성격들이 모난 데가 거의 없네. 이게 유복함이 주는 여유로움 그런 걸까.
물론 흑돼지 발람은 예외다.
그건 그냥 쓰레기가 맞다.
요즘은 마주칠 때마다 시비를 걸어댄다.
‘가정교사 주제에 그런 것도 모르나.’
‘가정교사가 예법이 덜 되었네.’
‘하긴 천것이니 아는 것도 없겠지.’
‘표류자라는 인간이 가정교사 따위를...’
흑돼지의 이미지에 맞는 수준 낮은 시비. 예법수업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로 저 흑돼지가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있다.
프로네시스 모녀 대화가 이어졌다.
“괴롭히는 거 아니거든요.”
“얼굴로 저 피곤합니다. 말씀하시잖니.”
어이쿠, 공작 부인.
저 그런 표정 아닙니다. 하하.
나는 황급히 표정을 정돈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서 쉬게.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예법수업은 쉬어도 돼.”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잘 가시게."
그렇게 오늘 하루 일정이 끝나게 되었다.
* * *
왕궁의 본관, 동관, 서관, 정문은 서로 이어져 있진 않다. 중앙의 정원을 통하지 않으면 왕래할 수 없는 구조다.
나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왕궁에 도착하여 정원을 통해 동관으로 가는 중이다.
하늘의 불빛은 사라져 정원은 어둑어둑한 상황.
마력등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빛나는 중에...
정원 한 구석에 티테이블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셰리아 공주가 아샤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이젤 하나를 두고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뭘 그리는 걸까.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아셰리아 공주님.”
“안녕하세요.”
공주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도화지에는 정원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사람 하나 없이 어둑어둑한 풍경이다.
“정말 잘 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내 말에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공주가 그림을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헤르만과 아샤 역시 아무 말이 없다.
그 침묵이 영 어색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티테이블의 위에 그림 가방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물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시나요?”
“그저 취미에요.”
“한 번 봐도 될까요?”
“네.”
나는 테이블에 쌓여있는 그림들을 보았다.
어두운 배경의 정원.
왕도를 감싼 산맥.
정원의 연못.
하나같이 풍경화였다.
“풍경화를 잘 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공주의 말은 평소보다 없었다.
그저 묵묵히 그림을 그릴 뿐이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불현듯 한나의 말이 떠올랐다.
공주님이 좋아하는 것.
나는 공주가 좋아하는 것을 모른다.
지금 공주의 반응을 보면, 그림을 잘 그린다 정도일 뿐...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느낌은 없다.
그래도 한 번 떠보기라도 할까.
“왕도에 그림이 많은 곳이 있을까요.”
“아레트 박물관에 그림이 많습니다.”
나도 초대 국왕의 이름을 딴 박물관. 게임에서 재앙, 판타스매터가 출현했었던 장소기도 하다. 물론 이방인이 금방 격퇴해버렸지만.
“내일 같이 가보실래요? 한번 가보고 싶은데, 공주님은 역사를 잘 아시잖아요.”
공주는 같이 가자는 말에 약간 당황했는지, 칼같이 나오던 대답이 멈추었다. 도화지를 거닐던 붓도 잠시동안 걸음을 멈춘 상태.
공주는 약간 고민하는 분위기다.
이곳에 온 지 두 주가 되어가는데, 공주가 활발하게 말하는 걸 본 기억이 적다.
전이 첫날 공주의 방에서.
도서관에서.
첫 수업에서.
그 이후론 수업을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오히려 나를 유심히 관찰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 공주님은 무엇을 보는 걸까.
내가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공주가 대답했다.
“네, 같이 가봐요.”
그렇게 내일.일요일은 공주님과 함께 박물관에 가는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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