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13. 일상 속에서. 기어오는 파란. (2)
* * *
EP07.일상 속에서. 기어오는 파란. (2)
일요일, 왕성 동관의 정문.
나는 헤르만과 함께 아셰리아 공주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박물관에 가자고 말은 꺼내어 보았지만, 정말로 같이 가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평소 공주는 자기표현이 적기에 나는 ‘아셰리아 여왕’이 아닌 ‘아셰리아 공주’의 모습은 그다지 모르는 편이다. 박물관을 같이 가는 접점 하나라도 정말 소중한 셈.
그런데 기다리는 아셰리아 공주보다 알렉산더 왕자가 먼저 나왔다.
”엇! 안녕하세요, 선생님!“
”알렉산더님, 어디 그리 급히 가시나요?“
정말 기운차네. 어쩜 저리 항상 밝을까.
같은 사람이 맞나 싶다.
”아바마마의 토벌을 배웅하러 가려고요. 왕도의 정문까지 가려고 해요.“
”왕궁을 나가야 하는 일정이네요. 기디언님도 함께 가나요?“
”네!“
기디언도 함께 가면 괜찮겠지.
그 아이는 꽤 사고방식이 침착한 편이니까.
”다녀오세요. 다른 길로 새지 마시구요.“
”네, 선생님도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공주님과 박물관을 가기로 해서요.“
”음,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네, 왕자님. 다녀오세요.“
아버질 닮아서 표정에 전부 드러난다.
이시하식 표정감지 센서로 측정한 결과 100%.
박물관은 질색이라는 느낌이었다.
아레트 박물관은 왕성과 왕도 정문을 잇는 중앙 도로변에서 약간 들어간 곳에 있다.
나에겐 게임에서 박물관 이벤트를 제외하면 갈 필요가 없던 거리다. 주변이 하위 귀족들의 주거지역이라 이벤트도 없고 조용하기 때문이다.
굳이 거리를 시간으로 따지면 왕성 정문에서 도보로 20분 거리. 오늘은 걸어가기로 했다.
‘공주님을 데리고 걸어가는 건 위험하지 않냐.’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유동인구가 적어서 큰 위험은 없다.
거기다 전투 집사와 전투 메이드가 같이 가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헤르만은 오늘은 집사복이 아니긴 하다. 중산층이 평상복으로 입는 셔츠에 면바지 차림. 집사복은 눈에 띈다며 저렇게 입고 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공주와 아샤가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공주는 평소에 프릴이 적당히 달린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데, 오늘은 하늘색 긴 팔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평소 눈에 띄던 은발은 대부분 틀어 올려 긴 챙 모자에 숨겨 두었다.
나를 처음 만난 날과 도서관에 갈 때도 들고 있던 책은 오늘도 가지고 있다.
“아, 일요일인데 귀찮아.”
그건 그렇고 귀찮은 거 티 내려고 말은 꼭 해.
“오래 기다리긴요. 가실까요?”
“네.”
우리 넷은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
그러고 보니 전이 후에 왕궁 밖 거리를 걷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법수업을 위해 프로네시스 공작저로 갈 때는 항상 마차를 타고 다녔으니까.
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른 점도 있었지만 내가 아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도 게임에서 고정된 시점으로만 바라보던 거리를 실제로 보니 새롭게 느껴진다.
중세의 거리라고 하기엔 약간 더 발달한 유럽의 거리. 중앙거리를 따라 벽돌 주택들이 있고, 중앙거리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상점도 많다.
호객 중인 상인의 소리.
왕도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는 가족.
왕도 정문을 향하며 떠들썩한 모험가들.
함께 뛰어노는 아이들.
역시 이 세계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좋은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
그것 자체가 정말 힘든 일인데.
눈이 부시다.
물론 우리가 양지의 거리를 걷기에 왕도의 어두운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촘촘한 계단이 여럿 쌓여있고 그 위로 미국의 백악관을 연상시키는 건물, 박물관에 도착했다.
“에코니아에 온 뒤로 첫 관광이네요.”
“음, 선생님께는 그렇게 되겠네요.”
게임에선 관광을 참 많이 했었지.
막 밑으로 떨어지는 버그스팟이라던가.
아, 관광이 아닌가.
참고로, 저 버그스팟은 프로네시스 공작저로 가는 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마차를 타고 가던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확인을 부탁했었는데… 헤르만이 재상부와 협력해서 거길 파보니 지반이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어디까지 디테일한거야… …
“선생님, 관심 가는 전시물은 있으신가요?”
“뭐가 전시되어있는지 몰라서요. 공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럼.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방향으로 하죠.”
박물관 건물에 들어가니 홀 정면에는 거대한 석상이 한 쌍 있었다.
“아레트 에우데미아와 헬레니아의 상입니다.”
공주가 설명해주었다.
저번에 신화를 이야기할 때 들었었지.
아레트 에우데미아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나 입을 법한 복장에 북슬북슬하게 기른 수염이 포인트인 남자다. 실제로 그럴진 모르겠지만.
헬레니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여신들이 자주 입는, 흰색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약간 비너스상 같은 외모.
“이 두 분은 에 도달하여 천이백년이 지난 지금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시겠죠.”
창조주의 에 도달하여 결국 그를 죽였다는 두 사람. 그저 에코니아의 신화인지 진실인지 나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에우데미아. 뜻은 행복.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일 것이다.
아마 아레트가 내 세계 출신이지 않을까.
이름마저 행복인 저들은 과연 행복할까.
사색에 잠겨있다가 다른 구경을 시작했다.
.
박물관은 외부에서 볼 때는 적당해 보였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박물관의 전시구획은 다음과 같이 세 개로 나누어져 있다.
창조 직후의 세대
평화의 세대
악인 범람의 세대
해방 이후의 세대
각자 테마에 맞는 전시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평화의 세대는 전시물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은 편입니다. 악인의 시대를 거쳐 왔기에 불타버린 것이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 시절의 벽화나 그림들을 보면, 그 어느 시기보다 평화롭고 분쟁이 없던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각 테마에 도착할 때마다 아셰리아 공주는 나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악인의 세대에는 뒤틀려버렸다고 여겨지는 악인들이 많이 출현했습니다. 최초의 판타스매터가 토벌된 시기이기도 하죠. 그 뒤틀림에서 파생되는 심상 마력은 상당히 강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아레트님에게 설득되었던 신수들이 나서서 생명을 지켰습니다.”
공주님은 이런 역사를 설명할 때 가장 즐거워하는 것 같다. 표정의 변화는 없더라도 자신의 말을 여과 없이 뿜어내는 듯한 느낌.
평소같이 공주님다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내기보다는 거리의 소녀라는 느낌이 강해 그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그러면서 우리는 해방 이후의 세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테마까지 왔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게임을 통해 접한 부분도 많았다. 판타스매터의 형상을 그린 벽화라던가.
거대한 까마귀, 뱀, 멧돼지, 곰, 전갈.
더 나아가 드래곤, 케르베로스, 그리폰.
이외에도 여러 동물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이런 동물의 형상 자체가 뒤틀린 채로, 타르와 같은 끈적하고 어두운 마력을 두른 그 모습. 항상 게임에서 잡아 왔던 그것들이다.
저런 것들 하나하나가 육체적인 성능으로 생명체를 깔아뭉개고, 그 특유의 마력으로 생명 그 자체를 농락한다.
“저것들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것이 심상 마력을 지닌 자들의 의무입니다.”
심상 마력.
자신의 마음속 그리는 것을 그리는 마력.
조사할수록 신기했다.
자연 마력은 말 그대로 자연법칙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만, 심상 마력은 그런 당연한 이론 자체를 무시하는 듯했다.
거기에 특정 가문에서 정해진 형태로 발현하기 쉬운 마력이란 인식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가 문헌을 조사하고 든 생각은 개인의 정서와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는 것.
그렇다면 일반인도 발현할 수 있어야겠지만, 게임에서나 지금이나 심상 마력은 귀족들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당장 나부터도 검사지에서 퇴짜를 맞았고 말이야.
하지만 이건 지금 중요한 건 아니겠지.
지금 중요한 건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공주님이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쉴새 없이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
물론 표정 변화는 없다.
그래도 교사로서 저런 모습을 조금 더 보여줬으면 한다. 저 아이에게 무엇이 보이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 아이는 너무 많은 것이 보이기에 조용하다.
그런 공주를 보며 주변을 구경하다 보니.
이 박물관의 마지막 전시물에 도착했다.
해방자라 불리는 전설적 인물.
여정을 함께하던 마녀 중 한 명은 희생되었다.
까지 도착한 것은 결국 한 쌍의 남녀.
그 둘을 다섯 신수가 따랐다고 한다.
내 키의 두 배정도 되는 벽화로 그려져 있다.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아셰리아 공주는 모든 걸 멈춘 채 조용히 그림을 감상하기만 하는 중.
“선생님.”
“네?”
돌연 나를 불렀다.
“에 저도 도달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단 네 명밖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힘들지 않을까요?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산타클로스의 환상을 어린아이에게서 뺏는 것보다 더한 대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제쳐두더라도, 이 야무진 공주님이라면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공주님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요?”
공주님의 얕은 한숨.
맥락이 보이지 않기에.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이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박물관을 뒤로 했다.
왕성으로 돌아가는 길.
아침 일찍 나왔기에 아직 시간은 점심 쯤이다.
아, 저쪽 거리에 인 게임 묘사로 엄청 맛있어 보이는 크레이프 케이크와 팬케이크를 파는 집이 있었는데.
“우리, 뭐 먹고 들어가지 않을래요?”
다들 뜬금없다는 듯한 표정.
괜히 말했나.
일단 돈은 가지고 있다.
왕비님이 주던 그 둔탁한 대금화 말고.
은화 몇 장과 대동화 몇 장이다.
저번에 내가 생각했던 통화가치가 대강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왕성 내 백성들은 꽤 부유한 편인데, 이런 사람들이 식당에 가서 식사하면 대동화 한 장.
그 대동화 한 장을 만원 정도라고 생각한다.
대동화 한 장은 소동화(천 원) 열 장.
대동화 열 장은 은화(십만 원).
은화 열 장은 소금화(백만 원).
소금화 다섯 장은 대금화 한 장.
대금화는 하나 500만원….
알렉산더는 500만원을 빈민에게 그냥 줘서 폭력배에게 습격당하게 했다. 이 자식 오늘 왕도 거리에서 돈을 뿌리면 안 되는데, 그 순간 사망자가 생길 거다.
대금화 한 장이 누군가에겐 유흥비 정도로 보이겠지. 하지만 이 세계에선 가난한 사람 기준으로는 2년 식비나 마찬가지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을 탄 위병 하나가 왕도 중앙거리를 급하게 달리고 있다. 그 뒤를 따르듯 다른 위병이 갑옷을 입은 채로 멀리서 달려온다.
말을 탄 위병은 우리를 쌩하고 지나간 상황.
헤르만이 뒤에 있던 위병을 멈춰 세웠다.
“안녕, 헤르만 티오리아야.”
“아.... 안녕하십니까!”
딱봐도 바빠보이는데 본론만 말하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왕자님께서…!”
설마.
돈을 뿌린건가!
비상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