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14. 일상 속에서. 기어오는 파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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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7.일상 속에서. 기어오는 파란. (3)
돈을 뿌린 건가!
진짜 그럴 리는 없잖아!
하지만 17살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더 어린 알렉산더가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네!
위병에게 사정을 자세히 듣고 싶지만, 아직도 헤르만이 물었던 말에 대답도 애매하게 한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이다.
왕도 정문에서부터 달려온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여기가 박물관 근처라 뛰어서 20분은 걸릴 거리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샤가 위병에게 약을 하나 꺼내 먹였더니 금방 안정되었다.
생각해보니 티오리아 백작 부인이 왕도 약초원장이었다. 사실 독도 쓰니까 약과 독을 한 번에 재배하려는 부업이나 마찬가지지만.
“감사합니다!”
“됐고, 간단히 말해주세요.”
심성이 고와서 안정제를 줬나 했더니, 자신이 귀찮아서 줬던 거였다. 그럼 그렇지.
“왕도 근처 타라스 마을에서 재앙이 출몰했다는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그걸 듣고 왕자님이 왕도 성문을 나가버리셨습니다!”
“에?”
“아?”
“또?”
공주를 제외한 세 명의 어이없는 탄식.
그건 그렇고 아샤.
“또. 라고?”
“저번에도 하위 판타스매터가 주변 마을에 출현했다니까 나갔다 오셨어요. 물론 잡았지만.”
헤르만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
정말 생각이 없네.
나는 문지기에게 확인할 게 있었다.
“재앙의 위험 등급은요?”
“위험도는 D! 하운드형이라고 합니다!”
똥개네.내가 전이 후 쫓겼던 그 몹이다.
아마 이전에 완벽히 토벌되지 못한건가.
아니면 새로운 개체라도 출몰한 건가.
유저들 사이에선 똥개라 불리던 몹.
게임 기준으로 대략 레벨 15에서 19 정도.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 기준이다,
세계관 안에서는 꽤 무서운 편에 속한다.
D급이라 기사 넷은 필요하다.
하지만 기디언도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려나.
왕족과 귀족은 이 세계에서 꽤 강하다.
마력의 재능이나 심상 마법의 혜택 때문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가 있으니 가봐야겠다.
“헤르만, 혼자서도 괜찮아요?”
“하운드 정도야 뭐, 괜찮겠죠.”
“마중이나 갑시다.”
뭐가 우수에 젖은 금빛 왕자님이야.
도대체 뭘 해야 우수에 젖을까.
공주에 대한 열등감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너무 열혈이잖아.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가.
거기다 재앙이 왜 재앙인지 모르는 걸까?
그 바보에게 한마디 따끔하게 해야겠다.
타라스 마을이면 바로 이 근처다.
왕자 일행이 먼저 갔다고 해도 간격은 같다.
꾸욱. 누군가 내 옷깃을 잡았다.
“선생님, 다른 위병이 지원을 요청하러 갔으니, 저희는 돌아가는 게 맞습니다.”
빨려 들어갈 듯한 연보라색 눈동자.
사실 공주가 말하는 것은 합당하다.
하지만 이 썩어빠진 는,
과연 합리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선생님?”
공주가 내 옷을 한 번 더 당겼다.
나는 너무나 합리적인 그녀의 최후를 보았다.
나는 분명 합리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했다.
하지만 나에겐 ‘다시 하기’가 있었다.
그 버튼 하나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살아난다.
그걸로 수천, 수만의 트라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이기에 그 버튼이 없다.
내가 죽는 것에는 별로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죽으면?
이미 그 열혈 꼬맹이는 내 삶의 한 부분이다.
멍청하긴 해도 죄를 짓지는 않는 아이다.
간다는 선택이 실수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가지 않아서 후회하게 된다면…
“공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헤르만도 있으니까요. 마중만 나가서 따끔하게 혼낼 뿐이에요.”
“아샤, 공주님과 왕궁으로 돌아가 있어요.”
공주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아샤의 손에 이끌려 왕궁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셰리아 공주가 이쪽을 돌아본다.
걱정해주는 걸까.
“갑시다, 헤르만.”
“네, 교사님. 일단 위병소에서 작은 마차라도 빌리죠.”
.
그렇게 위병소까지 삼십 분.
아직 나는 승마를 배우지 못한지라, 인력거처럼 생긴 작은 마차를 빌렸다.
타라스까지 거리는 달리는 말로 20분.
마차로 가고 있다 보니 30분은 잡아야 한다.
헤르만이 마차를 잘 몰아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세계의 마차는 아직 발전이 더딘가 보다.
지면의 느낌이 그대로 불편한 좌석에 전해진다. 전신이 쑤신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야 위화감이 든다.
타라스는 왕도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반 농민들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 서울 근처에 위성 도시가 많듯, 왕도 근처에는 이런 마을이 많다.
평소 타라스는 적더라도 군이 상주하며 근처 숲을 순찰하는 지역. 게임에서도 마을 자체는 비전투지역일 만큼 관리가 잘 되고 있었을 터.
하지만 그저 게임과 다르다고 생각하기엔 이상하다. 왜 갑자기 급보가 들어왔을까.
판타스매터의 등급이 높을 경우, 내뿜는 마력 역시 커진다. 그렇기에 마력 감측을 통해 동선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국왕이나 기사단장, 군 역시 예측한 동선을 통해 B나 C급 정도 되는 재앙을 잡으러 다니겠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C급 이상의 경우다. D급 재앙 이하는 그 움직임과 출현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럼 이미 습격을 허용한 이후에 마을에 있던 누군가가 제보를 하러 왔다는 것이고… 왕자 일행은 늦었다는 것이 된다.
“지금 속도를 더 높일 수 없어?”
“더 높이면 말이 지쳐서 돌아오지 못해요.”
혀를 깨물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상관없어, 빨리 가자.”
“알겠습니다.”
헤르만이 대답하고 잠시 뒤.
마차는 더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왕자 일행이 늦었다면 위험하다.
지금 이 상황은 너무나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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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타라스 마을.
통나무를 잘라 만든 듯한 목재 집.
그런 집들을 둘러싼 나뭇가지 울타리.
수확된 농작물이 저장되어있을 창고.
전형적인 농민들의 마을이다.
게임에서 본 것과 똑같은 구조다.
하지만 같은 건 구조뿐이었다.
할퀸 자국이 남은 통나무 집.
무너져버린 나뭇가지 울타리.
큰 물체에 부딪힌 듯, 무너져 버린 창고 벽.
그런 창고 벽을 통해 흘러나와있는 농작물.
그리고 모든 곳에 피가 칠해져 있다.
바닥에 물풍선이 터지듯 쏟아져 있는 피.
인간의 내용물이 부서진 장난감처럼.
거리 곳곳에 흐트러져있다.
가축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흔적 근처에 여기저기 기워져 있는 옷이 조각조각 난 채 흐트러져있다.
살점이 아직 붙어있는 뼈.
그 밑의 피 웅덩이.
웅덩이 옆에 비정상적으로 텅 빈 부분이 있다.
저곳에 엎드린 채로 먹이를 먹은 건가.
생활의 흔적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다.
검소한 살림의 식기
농사에 쓰이는 농기구
전쟁놀이에 쓰일법한 장난감 칼
여자아이가 안고 잘법한 인형
시각적 정보로 받은 너무나 큰 충격.
그 충격으로 잃었던 호흡이 돌아온다.
비릿한 피 냄새와 분뇨 냄새가 올라온다.
분뇨 냄새는 내장에서 흘러나온다.
여긴 마을이 아니다.
인간이 도축당한 곳이다.
망연하다.
“교사님, 정신 차리세요.”
헤르만이 나를 흔들었다.
“저깁니다.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세요.”
헤르만은 먼저 뛰어 가버렸다.
나는 그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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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숲속 공터.
공터 입구에 누군가 쓰러져있다.
기디언이다. 검을 놓은 채 쓰러진 상태.
그 뒤에 있는 나무는 움푹 파여있다.
걱정되어 확인해보니 죽진 않았다.
기절한 것 같다.
주변에는 마을 남자들도 쓰러져있다.
…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헤르만은 팔뚝 길이의 단검을,
알렉산더는 자신의 다리만 한 검을 들고 있다.
그리고 공터 중앙에, ‘그것’이 있다.
높이는 3미터가 조금 안될 것 같은 늑대.
녹아 흐르는 타르가 갑옷처럼 붙은 몸통.
형광색으로 빛나는 초록색 눈이 먹이를 본다.
판타스매터, 하운드다.
분명 전이했을 때 그 모습이다.
하지만 그 때에 비해 너무 크다.
짐승 특유의 빠르고 경쾌한 움직임.
놈은 헤르만에게 연신 앞발을 갈겼다.
헤르만은 열심히 피하고 있다.
알렉산더 역시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다.
고전하는 것 같았다.
알렉산더와 헤르만이 이길 수 있을까.
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운드는 원래는 저 크기가 아니다.내가 처음 전이했던 마을을 덮친 하운드도 저렇게 크지는 않았다.
저건 원래의 하운드의 세 배 정도 크기. 재앙은 인간을 먹을수록 점점 더 강해진다는 걸 감안해도 비정상적으로 커진 편이다.
원래의 하운드라면 헤르만이 압살할 것이다. 하지만 저 크기라면 상성이 좋지 않다.
헤르만은 어디까지나 암살과 잠행이 특기.
놈의 타르와 같은 마력 갑옷은 이미 강화되어 헤르만의 무기로 뚫기 어려울 것이다.
알렉산더의 심상 마력을 쓰면 승산이 있지만,
알렉산더는 이미 지쳐있다.
저런 상태로는 어려울 것이다.
재앙은 인간을 먹는다.
그 먹는 방법은 재앙마다 모두 다르다.
하운드는 ‘말 그대로’ 인간을 먹는 쪽.
도대체 얼마나 되는 인간을 먹은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산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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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서관에 다녀온 날.
내가 마법을 익혔더라면.
전투를 익혔다면 도움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알렉산더에게 나가지 말라고 했더라면.
다른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면.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여기는 인데 얼빠진 채로 있었다.
그런 가정들과 함께 자괴감 속에 쳐박혔다.
멍한 내 시야에 하운드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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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브러진 식기와 농기구들
미세하게 흔들리는 앞다리의 어깨 근육.
장난감 칼들과 찢어진 동물 인형
이내 앞발을 들고 내려찍는다.
붉은 핏자국과 인간의 부속물들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
그것을 이용해 한 바퀴 돈다.
자신의 몸을 거대한 둔기로 쓰는 재앙.
분명 살아있었을 사람들이
한 바퀴 돈 후에는.
네 다리에 힘을 주고 뒤로 튀어 오른다.
너무나 익숙한 패턴의 반복.
저딴 쓰레기에게, 모두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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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선물도 하나 줄게, 열심히 해봐.’
허리가 접힌다.
땅이 붉게 보인다.
속이 탈 것 같다.
메스껍다.
생각이 날아갈 것 같다.
‘마음속에 있는걸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
‘항상 고민하고 항상 신중히 하렴.’
붉게 물들었던 시야가 개인다.
언젠가 느껴본 듯한 흐름이 온몸에 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이번엔 뜨겁지 않다.
오히려 맑고. 시원하다.
몸이 가벼워지고, 머릿속도 시원해진다.
팔을 접었다 펴보았다.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재앙과의 전투는 약간 소강상태.
재앙 역시 많이 지쳐서 숨을 고르고 있다.
기디언 옆에 떨어진 검을 들었다.
천천히 앞으로, 재앙까진 스무 걸음.
고막에 부딪히는 소리. 하지만 듣지 않는다.
놈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나를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로도 보지 않는다.
턱밑에서. 오른발은 앞으로, 왼발은 뒤로.
재앙의 턱밑까지 왔다.
천천히 검을 든다.
재앙을 올려다본다.
자세를 잡았다.
검을 밀어서 박아넣는다는 느낌으로.
온몸의 무게중심은 오른 무릎에.
재앙은 날 비웃듯 콧바람을 내뿜었다.
날 깔보면 오히려 좋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앞다리의 어깨 근육.
이내 앞발을 들고 내려찍겠지.
앞발이 천천히 들린다.
기울어진 무게중심을 이용해 땅을 박찬다.
그대로 뛰어든다.
자세는 낮게 유지한 채.
마치 느린 배속처럼, 천천히 나아간다.
재앙의 앞발도 천천히 쇄도한다.
두렵지않다.
앞발은 나에게 닿지 못한다.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난 이 똥개만 수십만을 잡아 왔다.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이미 괴물의 가슴팍 아래.
내 뒤로 앞발이 스친다.
나를 정확히 압살하기 위해 무리했으리라.
괴물의 균형이 흐트러져 몸이 기운다.
재앙의 심장이 내려온다.
나는 검을 밀어 넣었다.
괴물의 가슴팍에 들어가는 검이 붉게 보였다.
끈적한 타르와 시꺼먼 피가 내 얼굴에 튀었다.
타르는 이내 기화되어 사라진다.
재앙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난 검을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점점 재앙은 작아졌다.
결국에 그 자리엔 죽은 늑대 한 마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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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손에 힘이 빠진다.
쨍그랑.
내 손에서 검이 떨어지고,
몸에서 긴장감과 함께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그대로 뒤로 주저앉았다.
“교사님! 너무 위험했습니다!”
헤르만이 뒤에서 달려오는 것 같다.
“헤르만?”
“네?”
“나, 살아있어?”
“예?”
뭐였지?
약간 나 자신을 삼인칭으로 보는 듯한 기분
방금 그 속 시원한 느낌은 뭐였을까.
짚이는 건 그 빨간 마녀밖에 없다.
“선...생님?”
알렉산더가 천천히 걸어오며 날 불렀다.
아, 얘를 어떻게 하지.
“일단. 무릎. 꿇어.”
어떻게 하긴 혼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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