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EP10. 새로운 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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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새로운 왕도.
왕자 알렉산더는 유년기부터 항상 고민했다.
왕족은 백성을 위해야만 한다.
왕족으로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왕자에게 보이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자신의 부친 필레몬 에우데미아는 재앙의 토벌에 있어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무인이다. 타 국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에도 맞서며 나아가는 에우데미아의 국왕. 세상의 균형을 담당하는 국가의 수장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자다.
자신의 모친 루시아 에우데미아는 나라의 내정을 담당해오며, 재앙에 무너질 수도 있었던 국가의 내실을 다졌다. 재앙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앙의 심상 마력 연구를 지시해 재앙 예보의 기틀을 다진 것 역시 그녀다.
아마 그녀가 없었더라면,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가 를 통해 경험한 미래의 시점도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왕자는 자라왔다.
자신의 부모에게는 각자 왕의 길이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부모와 같은 성군이 되리라고 끊임없이 다짐해왔다.
그러던 중, 자신과 이 년 터울의 여동생 아셰리아 에우데미아가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불과 3년 전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왕자가 8살일 무렵에도 자신이 가벼운 안건들에 승인을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그저 승인만을 받기 위해 한 관리가 들고 왔던 문서. 해당 안건은 부서에서 검토를 마친 상태.
왕녀가 그 문서의 한 부분을 가리키자, 관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 부분을 보았다. 그저 어린아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이리라.
가벼운 마음으로 문서를 다시 보았던 관리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몇 번을 검토했던 그 문서에는 작은 실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8세 왕녀는 그것을 한눈에 파악하고 짚어냈다.
작은 실수라는 것이 산수의 문제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정책이란 그 목적과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고 방법론을 알고 보아야 오류를 찾아낼 수 있는 법. 그런 오류를 왕녀는 찾아내 버렸다.
아무리 왕족으로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는 이상한 일임이 틀림없었다.
이후로도 왕녀는 건설, 농업, 상업, 재정, 치안 모든 걸 넘어서 재정과 외교 안건까지 뛰어난 능력을 표해냈다.
그저 무표정한 눈으로.
그저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왕자는 그런 여동생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2년을 일찍 태어난 자신이 보지 못하는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며,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며 효율적인 선택을 해나가는 그의 여동생.
에우데미아의 왕족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저런 능력 있는 소녀가 자신의 여동생이다.
재능있는 여동생을 시기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랑스러워 한 왕자는 분명 올바른 아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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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자의 순수한 마음가짐과는 별개로, 주변의 환경은 너무나도 크게 일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묘하게 피하는 관리들.
자신이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정적.
여동생의 책상 앞에 늘어선 줄.
그저 도장을 찍는 도구로 전락한 자신.
왕자는 10세의 소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소년 역시 왕족이다.
한 나라의 정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여러 국가기관 내의 정치나 내정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 구조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해마다 벌어지는 건국제와 해방제의 행사에 참여해왔으며, 비슷한 나잇대의 또래들이 주축인 사교의 장을 드나들었던 소년이었다.
그렇기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 이곳은 나에게 맞지 않는 곳인가.
소년은 자신이 보아온 왕족의 삶 중, 모친인 루시아 에우데미아의 길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길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여동생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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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길이 나에게 부합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길을 걷는 건 어떨까.
보아온 길이 둘 뿐이기에, 소년이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부친인 국왕이 언젠가 보여준 심상 마력.
그것은 찬란한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떤 더러움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당신의 앞에 선 모든 부정을 정화해나간다.
마침 자신의 심상 마력 역시 금색이다.
그런 빛나는 길을 걷는다면, 본인 역시 자랑스러운 에우데미아의 왕족으로서 인정받지 않을까.
소년은 예전보다 검술과 마력훈련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저 여동생과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고 무서운 일이기에 피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은 그저 도망일 수 있다.
이런 잡념들을 부정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어느샌가 자신을 따르는 기디언,
그와 함께 검술로 대련하기도 했다.
국왕에게 금빛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기사단장에게 검술을 단련 받았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여동생과 함께 마력 사용을 연습하던 그 날.
아름답지만 차갑고 날카로운 마력을 본 그 날.
부친이 걸었던 길에서마저 자신의 여동생이 더 돋보이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은 아바마마와 같은 금빛의 마력.
그 사실 하나만을 믿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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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마을 사건 당일, 왕자의 방.
왕자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표류자 가정교사의 말을 곱씹고 있다.
왕자에게 판타스매터 토벌이라는 것은 왕족으로서 당연히 해내야 할 일이기에, 당연히 토벌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 여겼다.
왕족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부친의 길을 포기해야 한다는 무력감.
두 감정이 왕자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사는 왕자가 생각하고 있던 일을 ‘그딴 일’이라 표현했다. 자신이 계속해서 보고 있던 목표를 한순간에 낮추어 버렸다.
‘도대체 왕족은 당신에게 뭔가요?’
‘도대체 왕족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도대체 왕족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요?’
세 개의 질문이 마음속에서 맴돈다.
하지만 교사가 바라는 답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왕자의 방문이 열리고 한 남성이 들어왔다.
“아바마마?”
“그래 아들아. 오늘 큰일이 있었다고?”
“네…”
토벌을 마치고 자정에 가까워서야 귀환한 국왕은, 사정을 듣고 동관으로 바로 향한 것이다.
국왕은 왕자의 침대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 한마디에, 왕자는 작은 목소리로 하루 동안 타라스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가정교사에게 들은 이야기 중 두 가지만 빼놓고.
“흠, 큰일이었겠구나. 다친 곳은 없느냐?”
왕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필레몬 에우데미아는 그의 아버지와 교감이 적었던 편이다. 그렇기에 그 역시 이런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의 그는 왠지 모르게 며칠 전의 탄원을 떠올리며, 일단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왕자는 고민에 빠졌다.
존경하는 아바마마라면 그럴 일이 없으리라.
그런 생각을 내내 하고 있었다.
약간 확인을 하고 싶어졌다.
“아바마마”
“왜 그러느냐.”
“만약, 정말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죽었다면 제 고집을 방치한 위병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왕자는 자신이 위병들에게 고집을 부린 것이라고, 만약을 가정한 것이라고, 두 개의 보험을 걸어둔 채로 물었다.
필레몬은 그 말을 듣고 침음했다.
자기 아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낼까.
“혹시, 교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냐?”
“맞습니다.”
교사가 아들을 꾸중했다는 사실은 이미 마중을 나갔던 기사에게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언급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것이구나,
필레몬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아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에게는 먼 옛날의 일이 떠올랐다.
국왕이 다시 마주하기 싫은 주제,
하지만 아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생각했다.
“나는 이미 소중한 가족을 한 명 잃었단다.”
“네……”
왕자로서 모를 리 없는 이야기.
아바마마의 또 다른 별.
그 별은 재앙의 어둠에 삼켜졌다.
“내가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 것 같으냐.”
왕자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지켜보다 말을 이었다.
“에우데미아의 국왕으로서 증오는 멀리해야 하는 법, 하지만 나는 증오스러웠다. 내가 어떻게 되던, 눈앞에 있는 것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셰리아를 살리기 위해서는 퇴각해야만 했다. 그것에게서 도망쳐야만 했다.”
왕자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이야기.
하지만 지금은 들어야 할 이야기 같았다.
“아들아. 네가 죽었다면 분명 국왕으로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당연한 덕이다. 하지만 나는 아마, 그러긴 힘들 것이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국왕이기 이전에 나는 너와 리아의 아비이고, 루시아의 남편이다.”
“나에게는 여러 입장이 있단다. 방금 이야기한 것들 이외에도, 에코니아 내의 모든 나라가 우리를 의지하지 않느냐. 하지만 여유가 된다면 나는 에우데미아를 우선하겠지. 그중에서도 가족을 더 우선하겠지. 나는 분명 작은 사람이다.”
왕자에게 필레몬은 너무나 크게 보여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아버지로만 보였다.
“내가 재앙을 토벌하는 것은, 분명 에우데미아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그때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에게, 그의 말이 떠오른다.
‘당신이 국왕 폐하께 그 정도 가치밖에 없는 사람 같아요? 사람은 자신의 소중한 가치 앞에서는 이성적이지 못해요. 국왕님도 결국엔 사람이고요?’
그의 말이 맞았다.
항상 국가를 위하신다고 여겼다.
이상적인 국왕이라 생각하고 존경했다.
왕족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틀렸던 것일까.
왕자의 마음속에 파문이 일었다.
“도움이 되었느냐?”
“네……”
“다행이구나.”
무거운 고민이나 생각.
가까운 이들에게 무심코 이야기할 때가 있다.
하지만. 때때로, 되려.
가까운 이들에게 꺼내기 힘들기도 하다.
생초면의 남에게 털어놓는 게 편할 때도 있다.
물론, 털어놓는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더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왕자는, 말했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바마마.”
“왜 그러느냐.”
“왕족이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흠.”
부자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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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틀 후 수업.
밤새 부친과 고민하고,
다음 날까지 고민한 답.
“아직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해야 저걸 이룰 수 있는지는…”
아마 답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했다.
교사는 합격이라 말하며 거리로 데려갔다.
그는 빵 봉투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말했다.
사실 왕자는 이때만 해도 그 의미를 몰랐다.
왕자는 불량배를 보았고 쫓아냈다.
그리고 가게의 여인에게 비난받았다.
왕자가 느끼기에, 여동생과 가정교사는 이런 결과가 일어날 것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왜 자신을 말리지 않았을까.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또다시 실패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틀 전 아버지 국왕과의 대화로 약간은 고개 숙였던 무력감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는 잘 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만 보면, 그렇죠.”
교사는 정론을 말했다.
“당신에게는 그래도 가장 큰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백성을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마음은 정말 칭찬받아 마땅한 거예요?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그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왕족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실수에서 배우지 못하고 포기하면 죄입니다.”
“이번에 못 보았다면, 다음에 더 보도록 노력하세요. 당신이 왕족이라면 더 노력하세요. 그것 말고는 백성에게 보답할 길은 없어요.”
왕자는 그저 멍하니 빵 봉투를 보았다.
네모난 빵 봉투.
직선일 수도 있고,
평면일 수도 있고,
입체일 수도 있다.
왕자는 이틀 전 왕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마다 왕족의 의미는 다르겠지. 그리고 왕족의 역할이라… 너만의 길이 있지 않겠느냐.’
왕자는 교사의 말을,
국왕의 말을 통해 이해했다.
“아이들 실수는 어른인 제가 치울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실수에서 눈을 돌리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배울 생각을 하세요.”
“실수해도. 괜찮아요.”
저 말은, 실수를 가벼이 하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실수를 더 무겁게 바라보라는 것.
왕족에게도 저마다의 길이 있듯이,
백성에게도 저마다의 길이 있겠지.
그렇다면 백성을 더 보면 되지 않을까.
교사의 말과 국왕의 말.
소년은 둘을 합쳐 새로운 말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말은, 새로운 왕의 길이 되었다.
물론.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왕성으로 돌아가는 길.
교사는 함께하지 않는다.
왕자의 손에는 흔한 빵 봉투가 들려있다.
왕자는 왔던 길을 잠시 되돌아보았다.
교사가 가게의 골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들을 전부 잡으러 가시는 거겠죠.”
평소 대화하기 힘들던 아셰리아.
그녀가 말했다.
“그렇겠지.”
교사가 재앙을 찌르던 그 날.
불현듯 왕자에게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는 망설임 하나 없었다.
그것 역시 자신의 실수를 치운 것 아닐까.
“저는, 오라버니처럼 되지 못할 겁니다.”
되지 않는 것 아닐까. 너는 현명하니까.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저는 방금도 그저, 그 상황의 손익을 계산하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나선다면 손해일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마 저는 오라버니처럼, 누군가를 위한다며 나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동생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
왕자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말인 것이 느껴졌다.
“그렇죠…. 왕자님은 항상, 남을 위하니까요. 저 때만 해도… 그러셨으니까……”
기디언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가 왕자를 따르게 된 것은,
기디언의 어머니가 행방불명이 된 날.
소식을 듣자마자 프라시스 가로 향했었다.
그때도 자신은 기디언을 위했구나.
자신을 봐주는 사람도 많구나.
왕자는 다시금 깨달았다.
따로 형용할 단어는 찾지 못했지만,
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이것을 해낸다면 좋은 왕족이 되지 않을까.
내일, 작은 한 걸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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