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22화 (22/215)

〈 22화 〉 EP11. 여왕이 있었다. (1)

* * *

EP11. 여왕이 있었다. (1)

야외수업이 끝난 다음 날.

동관의 마이룸.

헤르만은 휴가를 달라 해서 쉬는 날.

그리고 나는 책상에서 우두커니 보고 있다.

[속성 기초마법 무영창 이론]

[매우 쉬운 이론! 이어지는 무영창!]

…….

정말이지 적응이 안 돼….

왜 죄다 서장이 이 모양이야.

내가 보는 마법서만 이런 건 아닐까?

각설하고, 이 마법서는 무영창 마법을 사용할 때 생각해야 하는 이미지와 해당 마법의 기본 원리가 두루뭉술하게 적혀있는 책이다.

마법의 이미지는 나에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항상 에서 본 스킬과 마법들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해결되니까.

오히려 나로서는 기본 원리 면에서 ‘마법스러운 사고방식’을 가지는 게 힘들다. 나는 현대인이다 보니 기초 과학에 근거한 사고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기초 과학은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마법 사용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체 강화마법을 예로 들어보자. ‘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에너지나 열량, 세포호흡을 연상한다. 세포호흡은 영양소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한 분해와 발열 과정이었나? 그럴 것이다.

만약 내가 신체를 강화하기 위해 마력으로 에너지를 더 끌어써야겠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몸이 녹아 죽을 것이다. 나는 신체를 강화하려던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끌어쓰는 것을 강화한 게 되니까.

결국, 나는 마법을 배우기 위한 이미지는 차고 넘치지만, 사고방식이 마법을 쓰기에 적절하지 않아 따로 공부해야 한다.

거기다 재앙을 잡을때 느꼈던 그 감각 마법의 실마리도 못 잡고 있다. 세상 전부가 보이는 그 감각. 정말 신기했었는데…

이세계물을 보면 항상 특전이라면서 신들이 능력을 주거나, 이세계의 기술과 사고방식을 살려 성공한다거나 하던데. 나는 그런 거 없나?

빨간 마녀가 준 선물은 도대체 뭘까.

아직도 감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다.

참 부조리하네…

여하튼 지금의 내가 영창 없이 해낼 수 있는 마법은 신체 강화와 마력 장막, 겨우 둘. 그것도 마력 장막은 완전하지도 않다. 근육과 뼈마디마다 마력을 흘리고, 피부 바깥에 마력으로 막을 형성하라니. 판타지식 사고에 적응하느라 애먹었다.

헤르만의 말로는 마력 사용자들이 걸음마처럼 배우는 기초 중의 기초라고. 녀석은 ‘이 세상 살아가시려면 그 정도는 꼭 배우셔야죠. 마탄 맞으시면 어쩌시려고.’라고 덧붙였다.

‘네가 지켜주는 거 아니었냐.’라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총이 난무하는 세상이라면 방탄복은 입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카페에서 헤르만의 속성 교육을 받은 것이다. 물론 고관통탄에 맞으면 죽듯이 마법도 세게 맞으면 죽겠지만, 그런 건 생각하면 우울해지니까 그만 생각하자.

그래도 6개월간 거의 폐인 생활을 한 내가 슬럼가에서 기본적인 몸싸움이라도 하려면 꼭 습득해야 했던 고마운 마법 아닌가. 헤르만의 도움으로 기초 정도는 쓸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슬럼가라…

‘슬럼가의 지배자’ 루트는 원래 이방인과 아모스 단둘이서 슬럼가를 정리하는 루트. 슬럼가를 장악한 그들은 자경단 비슷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게임에 나온 기록들을 기억해가며 전력을 예상했었는데, 게임 시점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라 불량배들은 그보다 훨씬 약했다. 지도야 내가 몇 번을 공략한 슬럼가인데,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고.

그런 상황에 알렉산더 왕자급의 메인 캐릭터라 볼 수 있는 헤르만과 요나스트롱, 거기다 치안본부까지 동원해 밀어버렸으니 정말 쉬운 일이었다.

그 일이 끝난 뒤로 치안본부장은 나에게 압도적 감사!를 표하면서 불량배의 장물 중 3할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했다. 어차피 나는 잔챙이들만 대강 넘겨버렸으니, 딱히 한 일도 없지만 말이야.

……

그러고 보면,

이방인은 분명 사기적인 캐릭터였다.

슬럼가를 아모스와 둘이서 정리한다 해도, 이방인이 위협적인 부분을 전부 처리해버린다.

그저 클릭 몇 번으로 무술을 터득해버리고, 루트에 따라 심상과 자연을 가리지 않고 마력을 터득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존재.

게임이니까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세계에 와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니 그건 괴물이다.

그리고 나는 분명 이방인이 아니다.

그리고 심상 마력. 수업 준비를 하다 보면 내 생각보다 심상 마력이 훨씬 대단한 것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많았다.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마력, 그런데 마음이 강한 사람은 그걸로 역사를 써간다.

나는 그저 심상 마력이 캐릭터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마법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실상은 꽤나 사기적인 마력이다.

애초에 마음이 강하면 마력이 더 깃들어서 상황을 엎어버린다니, 말 안되는 사기행각이다.

그런데 나는 심상 마력 적성이 없다. 높은 자연 마력 적성을 믿고서 내가 수련을 한다 해도, 심상 마력을 제대로 쓰는 사람을 만나면 지겠지.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잘 알면서도 나는 왜, 이 멍청한 서문의 마법서를 멍청하게 보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슬럼가에서는 헤르만과 요나에게 대부분 맡긴 채 내 몸만 지키면 되었다. 알려주기만 하면 완벽하게 따라주는 둘이다. 분명 두 사람에겐 처음인 보스의 반응도 완벽하게 대응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찜찜했다.

이대로 살아도 되나, 라면서.

하지만 마법을 여기서 더 배운다 해도, 나는 그걸 적절하게 사용해낼 수 있을까. 내가 이걸 배운다고 해서 이 세계의 운명 같은 게 바뀌나 싶다.

그건 이방인이 오면 부탁해야 할 게 아닌가?

.

똑똑.

생각의 흐름을 끊는 노크 소리.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아샤였다.

“왕비님. 후궁. 호출.”

“갑자기?”

아샤 녀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실례하겠습니다는 제대로 말해놓고 말이야, 행동과 말투에서 평소의 귀찮음이 더 심해진 기분이다.

거기다 왕비님이 후궁에 호출이라니… 후궁 건물에 교실이 있어서 간 적은 있지만, 익숙하진 않다. 애초에 내가 왕성에서 익숙한 공간은 내 방과 왕실 도서관 정도.

“알았어, 갈게.”

그래도 피고용자는 고용주를 거스를 수 없는 법. 나는 보던 책을 정리하고 후궁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

.

후궁의 시종들에게 안내된 곳은 국왕과 왕비의 침소였다. 학부모 면담을 침실에서 진행한다니, 참 어이가 없구먼.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

침소는 정말 넓었다. 사실 침소라고 쓰고 거실이라 읽는 게 맞다. 엄청 넓은 방에 대형 침대, 소파와 다과용 테이블, 그리고 여러 가구가 있다. 왕비는 차와 디저트를 마련해둔 채로 기다리고 있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가정교사님을 불러서 할 이야기가 뭐 있겠나요. 아이들 이야기죠.”

“아, 네.”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나는 찻잔을 들었다,

“어제는 치안본부와 슬럼가를 터셨다고.”

“예?”

벌써 알고 있었다니.

차를 아직 안 마셔서 다행이다.

성대하게 뿜을 뻔했다.

“대강 일의 전후는 들었어요. 걱정 마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알렉의 일도 들었습니다.”

“하하, 네…”

헤르만이 카일에게 말하고, 카일이 국왕 내외에게 말한 건가. 아니면 기사단이나 치안본부에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는 게 이상하진 않다.

왕자를 타박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약간씩 올라왔다.

‘이세계에 전이해 특전을 받아 생활할 줄 알았는데, 두 주 만에 실직자가 되어 거리를 방황?’이라는 내용의 소설이라도 있나?

아, 내 이야기구나.

“감사합니다.”

의외로 감사를 받았다.

부잣집 아이들 과외수업을 해주러 다닐 때는 당연한 일을 해도 한 소리 들을 때가 많았는데, 왕족이라 그런지 참 관대하다.

“사실, 예전에 알렉이 판타스매터를 토벌했다던 일도 저희는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오시기 바로 전주에 일어난 일인데, 군에서 보고를 누락시킨 것 같더군요.”

“알렉이 왜 그랬는지는 짐작이 갑니다. 남편이 그날 바로 대화를 했거든요. 거기다 집무실의 분위기도 생각해보면, 알렉에게 부담감이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희가 못 보는 부분들을 확인하고 해결해주시니, 제 선택은 성공이었군요.”

왕비는 역시나 모든 일의 경위를 알아낸 눈치다. 게임의 본편에서도 왕비의 혜안은 뛰어났었다. 최후에 약간 감정적인 실수가 있었을 뿐이었지.

“칭찬해주시니 참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예법 수업은 어떻게 되어가시나요?”

“아, 하하. 한나 씨가 잘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슬럼가 일로 며칠 못 갔다.

못 간다고 말할 때마다 은근히 화를 참는 한나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오늘 저녁에 프로네시스 공작저에 가면 죽을지도?

“다행이네요. 예법은 건국제 때까지 확실해지도록 노력해주셔야 합니다. 아마 백작급 귀족들이 교사님께 많이 꼬일 수 있어요.”

“네? 저는 그저 교사인데요.”

“왕실 가정교사의 의미는 상당히 크답니다. 관계를 좋게 해두면 왕실과 연줄이 생기는 거니까요.”

“그렇군요….”

“특히나 건국제는 에우데미아 안의 귀족 자제들이 남편감과 신붓감을 찾는 자리기도 하답니다? 올해는 지나갔지만, 해방제 때는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 학생들도 그 판에 끼어들고요.”

“하하… 약혼이라니.”

해방제와 건국제가 약혼자를 찾는 의미도 가진다니. 내 생각보다 훨씬 의미가 큰 사교모임이었다.

인 게임에서는 파란의 정치싸움이나 치졸한 함정이 될 연극만 언급되었고, 이방인으로서 참여해도 저런 이벤트라는 암시는 받지 못했었다.

“괜찮은 가문이라도 소개해드릴까요?”

푸흡 ­

이번에야말로 마시던 차를 뿜었다.

“사실 제 조카인 한나도 혼기가 찼는데 말이죠. 꽤 괜찮은 아이 아닌가요? 그리고 한나가 아니더라도 제가 아는 귀족들은 많습니다. 왕국에서 제일 미녀라는 아이들도 알고요?”

차를 뿜은 건 신경도 안 쓰시고 은근히 의문형으로 물어보시는 왕비님. 너무 급작스럽다.

중세에 가까운 판타지 세계니까, 어린 나이에 약혼은 흔한 일이겠지. 그래도 한나는 나한테 활발한 여동생 정도로만 보인다.

“하하…. 제 세계에서 혼례는 늦게 하는 편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별생각이 없습니다.”

“아쉽게 됐네요.”

도대체 뭐가 아쉬우신데요.

내 표정이 이상한가.

왕비님은 유심히 보시더니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유능함을 증명하셨습니다. 저희가 모르던 일들을 두 가지나 해결하신 거니까요. 별개로 재상부에서도 감사를 표하더군요.”

재상부? 아, 그 버그 스팟 이야긴가 보다. 의 무한추락 버그 스팟을 헤르만에게 말했더니 진짜 그곳에 결함이 있었다고 했었지.

“선생님, 귀족들의 정보 전달은 정말 빠르답니다. 건국제 때 정말 고생하실 거예요. 지금까지는 그저 새로운 표류자라는 말에 간만 보고 있었겠죠.”

“그런데 선생님은 지금 왕자를 훈계하는 대인배, 귀족 자제들이 태반인 재상부와 왕궁부 관리 중 태만한 자를 대거 적발한 인물이에요?”

“아마 건국제 때는 영애들이 줄을 서겠죠.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한답니다?”

은근히 왕비님이 웃으시면서 나를 본다.

어디 한번 당해보라는 느낌.

참관 수업을 ‘당한’ 귀족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문을 냈나? 내가 한 행동들이 한 주도 안 돼서 다 퍼져나갔다니 약간… 무섭다.

귀족사회. 무서워.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건국제의 중요성은 아셨을 거라 봅니다. 알아서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나저나 리아는 잘 지내나요?”

리아라, 아셰리아 공주를 말하는 건가.

“공주님은, 워낙에 뛰어난 분이시니까요.”

“그런가요.”

게임 속의 그 아셰리아 여왕이 될 사람이다. 평소나 어제 분수에서도 언제나 올바른 선택지를 곧잘 보는 아이다.

… 언젠가 그 여왕처럼 자라나겠지.

한편으로는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아마 그때는 나도 죽지 않을까.

사실 그때까지 살아있는 것도 용한 거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루시아 왕비가 내 뒤편을 망연하게 보고 있다.

마치 내가 저곳을 봐줬으면 하는 듯이.

“아…”

내가 들어왔던 문.

그 옆의 벽면에 있는 그림.

그곳에는 아셰리아 여왕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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