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EP11. 여왕이 있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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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여왕이 있었다. (2)
아셰리아 여왕의 그림.
아니 아셰리아 여왕을 닮은 그림이다.
내가 게임에서 본 아셰리아 여왕의 인상은 날카롭고 차가운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여성은 눈매나 분위기가 부드러워 보였다.
“제2 왕비, 에스더 에우데미아, 혼인 이전의 성은 헬레니아입니다.”
의자를 돌린 채 그림을 보고 있자, 내 뒤에서 왕비가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을 말했다.
에스더…
별이라는 뜻인가.
“헬렌 교국의 전대 성녀 후보였죠. 아레트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중 우리와 친해졌었습니다.”
‘우리’라면 국왕과 왕비, 재상과 왕궁부장일 것이다. 네 명은 어릴 때부터 함께였다고 들었다.
“정말이지,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어요.”
왕비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감상에 빠졌다.
“언제나 순수했고, 언제나 주변의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사람이었어요. 항상 남들에게 웃고 다니다 보니, 멍청한 남자들은 멀리서 에스더를 지킨다며 기사단을 만들어 졸졸 따라다녔죠.”
물론 에스더는 몰랐지만.
라고 왕비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던 중에 사건이 터졌죠. 천진난만한 에스더를 보고 욕정을 못 참은 멍청한 귀족 하나가 납치극을 벌였죠. 다행히도 우리가 에스더를 구해냈는데, 바보 필레몬이 글쎄 도중에 사고를 쳤다는 거예요?”
아.
위기에 봉착한 두 남녀.
극복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두근거림.
뭐 그런 건가?
결국에 혼약은 했겠지.
제2 왕비라 했으니까 말이야.
“왕태자가 헬렌 교국의 성녀 후보와 추문을 일으키다니, 까딱 잘못해서 전쟁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어요. 성전 기사단은 눈이 돌아버리면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광신도라는 단어에 그만큼 부합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 사이에서 저는 필레몬과 약혼한 사이였죠. 그런데 바람을 피운 그이에게 화가 난다기보다는, 몹쓸 짓을 당한 에스더가 상처라도 받았으면 어쩌나 더 걱정되던 거 있죠?”
에우데미아 왕실 비화 그런 거 아냐?
지금 왕비님, 너무 어둠이 깊은데?
“당장 에스더를 책임지라고, 약혼해서 제2 왕태자비로 맞이하라고 며칠 내내 쫓아다니며 필레몬의 엉덩이를 걷어찼죠. 여차하면 내가 두 번째가 되어도 좋다고 말하면서요.”
“하하하… 엄청나네요.”
예전 이야기를 털어놓는 왕비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기세가 엄청나.
두 번째가 되어도 좋다니, 그만큼 사이가 각별했나 보다. 거기다 팔불출 국왕이 바람 때문에 루시아 왕비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인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니. 스펙터클 하구만.
“그런데 말이죠, 교사님. 정말 중요한 부분은 지금부터예요. 우여곡절 끝에 약혼까지 끝내놓고 에스더와 필레몬을 앉혀놓고 물어봤죠. 도대체 이 금수에게 뭘 당했냐고.”
“둘 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정말이지 저는 중간에서 화가 날 뻔했어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에스더가 이러는가 싶어서.”
꿀꺽.
긴장으로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
“입을 맞췄대요.”
“에?”
뭐라고요?
잘못 말씀하신 거죠?
…… 내 긴장감 돌려줘요.
“어이가 없으시죠? 키스만으로도 애가 생긴다느니, 저 바보와 순둥이는 그쪽 상식이 전혀 없던 거에요. 이미 약혼은 끝나버렸고, 에스더는 성녀 자리를 포기했어도 우리와 평생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웃고 있으니. 저는 뭐라 할 수도 없었죠.”
왕비는 웃고 있다.
어이없다는 웃음은 아니다.
자신도 당시 기뻤다는 듯이 웃고 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헬렌 교국과 맺은 작은 조항 하나가 그 비극을 만들 줄 누가 알았을까요… 아이를 낳으면 헬렌 교국에 와서 심상 마력을 검사받으라는, 어쩌면 당연한 조항이었죠.”
최초의 성녀 헬레니아의 핏줄.
교국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항이었겠지.
“에스더가 아셰리아를 데리고 교국으로 출발한 뒤, 단문 통신 마법에 습격을 당했다는 급보가 도착했어요. 급보가 도착하자마자 필레몬과 기사단장, 글로리아가 전부 달려갔지만….”
……
이미 늦었던 건가.
왕비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님을 왕실의 가정교사로 임명한 것은 제게 도박수나 마찬가지였어요. 표류자라 하더라도, 에우데미아의 왕실 가정교사 직책은 그 무게가 너무나 큰 자리입니다.”
왕비는 갑자기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내가 가정교사로 임명된 것이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표류자의 업적이 많다 해도, 나는 아무 신용도 없는 일개 학생일 뿐이었다.
“아셰리아가 스스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랬던 건가…
“아셰리아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저 역시 제가 낳은 딸처럼 여기긴 하지만, 그래도 친모의 존재는 중요한 것 아닌가요. 그 아이는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를 잃었어요.”
“자신의 능력으로 꿋꿋하게 살아가 주는 것도 고맙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항상 걱정이었습니다. 변명밖엔 안 되겠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이 편한 듯했고요.”
내가 오기 전까지 그랬었구나.
나는 적어도 박물관에 같이 가거나, 아플 때 먼저 찾아와주기라도 한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다르게 보는 것 같긴 하다.
“그런 와중에 선생님께 관심을 보이는 아이를 보니, 가정교사 직을 드려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 하는 건 죄송한 일입니다. 능력을 보며 판단하고 있었으니까요.”
왕비는 자신이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미안함을 표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당연한 일을 하고 당연한 가치를 바란다는 게 가족으로서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건 부모로서 당연한 겁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리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노력해보겠습니다.”
왕비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괴로울 것이다.
그런 과거를 다시 떠올렸으니까.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자리를 비켜 줘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했다.
자연스레 내 시선은 그림으로 갔다.
아셰리아 여왕을 닮은 그림 속 여인은 마치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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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에서 동관을 가기 위해서는 본관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나는 자연스럽게 본관 앞을 걷는 중이다.
그나저나 아셰리아 공주라.
내가 가르칠 것도 없을 정도로 훌륭한 아이다. 공주와 함께 한 시간은 많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말에서 현명함이 베어져 나오는 아이인 것은 나에게 확실하다.
그런데 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까. 다른 이들에게는 확실히 관심을 덜 가지는 것 같긴 하다. 다른 점이라고는 표류자란 점 외엔 없는데.
그리고 하나. 걸리는 부분도 있는데…
“하! 네 놈 잘 만났다.”
귓가에 걸걸한 돼지의 목소리가 스쳤다.
“네 이놈! 내 조카를 욕보였다고 들었다!”
발람 프라시스. 흑돼지가 날 보고 소리치고 있었다. 기디언은 발람의 뒤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 눈을 피했다.
흠. 기디언이 일러바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일러바쳤다면 엊그제 찾아왔을 것이다.
“내 오늘, 루시아님께 일러 네 놈의 해직을 고려케 할 생각이다.”
방금 루시아 왕비를 만나고 잘 부탁드립니다. 소리를 듣고 나온 사람한테 할 말인가. 그것도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면서 말한다.
그나저나 이 자식 은근히 왕실과 친분이 있음을 보이려고 왕비라는 호칭도 빼고 말하네. 탄원 때 다른 장관들과 국왕 내외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에는 친했을 가능성도 있다.
“오늘도 한가하신가 보네요.”
물론 지금은 나도 이리저리 들은 게 있어서 이 자식의 상태를 잘 안다. 지방 귀족의 탈락 자제들을 모아 친목질을 하면서 토벌은 차일피일 미뤄대기 때문에 국왕이 더 고생하는 중이라나.
결국에 이 자식은 자신의 행태는 생각도 않고 자기 편할 때만 남을 이용해 처먹으려는 흔한 쓰레기 인간군상일 뿐이다. 글로리아 전 가주가 행방불명만 안되었어도 이 자식이 가주 자리를 맡을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한가하시면 타라스 마을 근처 숲에 정찰 한 번이라도 더 명령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해야 할 일만 잘 챙기셨어도 왕자님과 기디언이 위험할 일은 없었을 텐데….”
“그건 네 놈이 알 바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 쓰레기 자식은 조카가 걱정돼서 데려온 게 아니다. 내가 기디언을 나무랐다는 사실을 아는 건 타라스 마을 일도 뻔히 안다는 것. 그저 왕비 앞에 데려가서 내 해직을 말할 구실로 데려온 것이겠지.
기디언은 아직도 자신의 숙부와 내 눈치를 보면서 땅의 개미 숫자를 세고 있다.
정말 불쌍한 아이는 이 아이가 아닐까.
“기디언! 빨리 가자꾸나!”
“숙부님…”
기디언은 나를 처량하게 쳐다보더니 후궁 방향으로 끌려가듯 숙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
X같네.
“기디언,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나요?”
한 번 물어보았다.
대답은 못 할 것이다. 6년간 프라시스 공작저에서 함께 살아온 숙부다. 좋든 나쁘든 대답은 안 하는 게 바른 선택이다.
그저 반응을 보기 위해 물어보았을 뿐이다.
“그게…”
“어서 오지 않고 뭐하느냐!”
사실 나는 기디언과 큰 접점이 없다.
그래서 일러바쳤을 가능성도 열어뒀다.
하지만 내가 정말이지 싫어서 일러바쳤다면 지금 저런 고민도 하지 않겠지. 휭 하고 후궁으로 걸어가면 그만일 일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고민하고 있을까.
저 고민 하나만으로 대답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마.
상당히 짜증이 난 상태일 것이다.
“장군님?”
한나가 귀족이라면 하나쯤 챙겨 다니라는 손수건을 꺼내 돼지 면상에 날렸다.
“크헙!”
“애는 두고 저희끼리 이야기하죠? 시한은 두 주 뒤. 방식과 조건은 장군님이 알아서 정하시죠?”
돼지 발람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손수건을 걷어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하! 네 놈이 드디어 실성했구나!”
발람 입장에서는 무력도 없는 표류자가 결투를 건 상황일 뿐이다. 발람이 기세등등 할만하다.
주변을 걷던 관리들이 다 여길 보면서 뒤로 쑥덕거리고 있다. 대형이벤트 맞지.
기디언은 걱정스레 보고 있다.
“그럼 좋지. 통상적인 일대일 결투다. 내가 무려 장군인데 핸디캡 정도는 줘도 되겠지…. 선수는 양보하마.”
“대신 네 놈이 지면 기디언을 수업에서 뺄 것이고, 왕실 가정교사 직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야.”
어차피 내가 가정교사 직을 내려놓으면 기디언을 수업에서 빼든 말든 상관이 없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건 것이다.
“아, 조건을 두 가지나 거셨네요? 선수야 전투에 문외한인 제가 잘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가지나 걸게 만드셨으니 장관님도 두 가지를 거셔야겠죠? 저는 지금 당장엔 생각이 없으니, 결투가 끝난 시점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 상관없다. 네 놈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
저 병신은 자신의 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지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알 것이다.
증인은 매우 많다.
관리들이 도대체 몇 명인가.
그 많은 관리들이 전부 여길 보고있다.
저 돼지를 이길 정도는 수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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