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EP12. 결투 준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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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결투 준비. (2)
오늘은 결투를 신청한 다음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달리고 있다.
왜?
당연히 기초 체력은 회복해야지.
내가 아무리 속의 이방인은 못 되더라도, 2주 동안 폐인 생활 이전의 체력까지는 회복해야 한다.
물론 결투 자체는 마법으로 풀어나갈 것이다. 한나가 보증하길, 내가 마법을 습득하는 요령이나 마력 감응 능력은 뛰어나다고 한다. 에서의 마력회복량과 이성수치를 말하는 것 같은데, 왜 높은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높으면 좋겠지.
하지만, 아무리 내가 아무리 마법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상대는 프라시스의 가주다. 거기다 초보인 내가 그 돼지를 한방에 압도할만한 마법을 낼 리 없다.
그렇다고 내가 승산이 없는 건 아니다. 아마 발람은 내가 게임에서 보았던 그 프라시스 용병의 검술을 비슷하게 사용하겠지. 물론 그 수준까지 도달하진 못했을 것이다.
게임 내 프라시스 용병은 거의 절대적인 강자에 근접한 무인. 그리고 지금의 에우데미아에서 최강자로 평가되는 인물은 국왕과 기사단장이다. 발람이 국왕이나 기사단장에게 비빌 수나 있을까? 불가능하다. 왕성 내에서 발람이 받는 취급만 생각해도 답은 나온다.
지금까지 봐온 왕성 내 발람의 평판은 몇몇 귀족들을 제외하면 최악. 어제 따로 조사해보기도 했는데, 특히 기사단이나 국왕의 직속 병사인 1군에서의 평가가 박하다.
토벌을 피하는 평소의 행실, 프라시스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심성, 가주직에 걸맞지 않은 실력. 이 세 가지가 발람에 대한 현재의 평가들이다. 이 정도면 심상 마법도 전투 자체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다.
프라시스의 심상 마법은 프라시스 다워야하는 법, 거기다 겉보기로 보이는 발람의 건강 상태만 봐도 무사로서 많이 실격이니까.
내가 발람의 기술을 봉쇄하면서 동시에 심상 마법을 사용하기 어려운 상태를 유도한다면 충분히 이긴다. 그러기 위해선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기에 체력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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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달리고 있다.
그저 체력만 생각한 건 아니다. 나는 지금 이 달리기에 인터벌 트레이닝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를 섞고 있다. 일정 순간순간마다 신체 강화마법을 발동하는 것이다.
인터벌이라고 하니까 옛날 생각나네. 사고뭉치 재능충 동네 친구 녀석이랑 태권도와 검도 도장을 같이 다녔었다. 도장의 사부들이 우리 둘을 매번 토할 정도로 굴렸었지. 그 친구 녀석은 태권도 국가 대표가 되어서 선수촌에 들어갔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아, 친구 이야기는 제쳐두고. 헤르만이 말하길 마법 발동에는 루틴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듯이 말했었지. 나는 지금 달리는 도중에 무릎과 자세를 낮추는 순간마다 신체 강화마법을 전신에 발동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도약력을 높이고 신체 강화 마법을 꾸준히 유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습관화. 한 가지 자극과 반응을 계속해서 줌으로서 특정 행동을 뇌에 각인시키는 것.
조건화. 컨디셔닝. 파블로프의 개. 스키너의 상자. 일정한 자극과 보상, 벌을 계속 줘서 어떤 조건에 뒤따르는 행동을 설정하는 것. 이는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물론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보상이나 벌은 없다. 하지만 조건화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나라는 생물이 특정 맥락에서 이때까지 없었던 생물학적 기능을 갖게 한다는 부분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 ‘무릎을 낮추는 자극’에 대응하여 ‘신체 강화마법을 발동한다’라는 명제를 내 몸에 각인시켜야 한다. 무릎만 낮추어도 신체 강화를 발동시키게끔. 신체 강화마법을 무의식적으로 쓸때까지 습관화해야만 다른 마법을 쓸 여력이 남는다.
신체 강화마법을 나도 모르게 쓸 정도가 되면, 여기에 더해 마력 장막을 펼치는 것도 추가할 것이다. 아마 오른손은 공격마법을 행하거나 무기를 드는 일이 많을 테니까, 왼손을 들 때마다 장막을 펼치도록.
두 가지가 모두 된다면 이제 두 마법을 동시에 발동시키게끔 훈련해야지. 어디선가 마법이 날아온다는 가정을 하고, 회피와 동시에 마력 장막을 펼치도록. 계속 반복해야 한다.
의식적인 훈련을 반복해서.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쓸때까지.
이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게임에서 즐겨 사용하던 플레이 방식. 마법과 방어로 적의 선택지를 줄이고, 마지막에 남은 그 선택지에 대응하는 것. 지금의 훈련은 이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한 기초다.
정말 내가 게임 속 이방인이었다면 아마 검으로 마지막을 노리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검 따위 잘 모른다. 그러니 선택지를 줄여나가는 것에 일단 집중하자.
◆ 일주일 후, 한나 프로네시스 시점.
“선생님, 일단 영창부터 알려드릴게요. 오늘도 저번이랑 비슷하게 가보죠. 영창을 한 상태로 마력의 느낌을 익히시는 거예요.”
“한 번 해볼게.”
이게 나한테서 마법을 겨우 한주 배운 사람의 실력이 맞나? 내가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네.
나는 프로네시스의 공녀로서 자연 마법에 꽤나 능통하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도대체 뭘까. 내 어릴 적을 생각하면 약간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데.
내게 예법 교육을 받는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 선생님. 이 사람은 마법적인 재능이 여러모로… 이상하다. 장점부터 두 가지를 꼽자면, 자연 마법 습득력과 마력 감응 능력이 '너무' 좋다.
이와 상반되게 마력 총량은 너무 적다. 물론 체내에 마력을 저장할 수 있는 마력 총량이야, 어릴 때부터 쌓아 올리는 것이다 보니 표류자인 이시하 선생님은 어쩔 수 없긴 하다.
마법의 습득력, 마력 감응 능력, 마력 총량은 예전부터 비례하는 관계란 말이지. 밸런스가 무너졌다는 사실부터가 이상하긴 한데, 표류자니까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마법을 단계화시켜서 사용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초급 마법을 조금 더 크게 많이 결합하면 중급 마법이에요. 중급 마법의 규모가 커지면 상급이고요. 하지만 선생님은 상급 마법을 쓸 총량이 안 되시니까, 초급과 중급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는 방식으로”
“음, 예를 들면?”
“물 마법을 사용해서 수분을 바닥에 깔아 두고, 불 마법을 사용하면 수증기가 되겠죠. 그 후에 공기만 얼려버리면 안개가 될 거에요. 초급 세 개로 중급 마법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아하”
마력을 물이라 가정하면, 모든 마법사는 몸에 수조를 가지고 있다. 그 수조의 용량은 마력 총량이다. 그리고 외부의 물을 필터로 정화하는 것이 감응 능력이다.
선생님의 수조는 너무 작다. 상급 마법은 못 쓸 거고, 중급 마법을 두 번 쓰면 비어버릴 거다. 마법에 갓 입문한 꼬마가 반년 정도 수련했을 때의 마력 총량. 딱 그 정도다. 물론 저 정도 아이는 중급 마법도 못 쓰겠지. 어디까지나 총량에 한정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중급 마법을 연달아 사용할 정도의 필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마법 학회에 보고해도 모자란 수준.
감응 능력은 선천적인 면이 크지만 그걸 높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갈고닦는 수련을 해야 한다. 헬렌 교국의 성전 기사단은 출정 전에 매번 기도를 드리고, 에퀼리아 마법 학회의 마법사들은 저마다의 철학으로 자아를 확고히 한다. 그리고 동방에서는 명상을 통해 잡념을 지운다. 이런 행위의 끝에 감응 능력은 약간씩 오른다.
이시하 선생님의 마력 감응 능력은 나의 두 배에 달한다. 나도 꽤 감응 능력이 좋은 편이라 견습 마법사의 다섯 배 정도는 된다. 그럼 선생님은 견습 마법사의 열 배라는 거지. 이건 선천적인 면도 있지만, 후천적인 노력이 몇년간은 쌓인 것이다.
도대체 이시하 선생님은 어릴 때 어떻게 살았을까. 개인적으로도 궁금해서 종교라도 있나 물어봤을 때는
‘나 교회 다니다 관뒀는데?’
… 관둔 사람이 이 정도면 성전 기사단은 재앙의 씨를 말렸겠지. 그래서 다른 질문으로 취미를 물어봤다. 취미생활에서 원인이 드러날 수 있으니까. 대답은 그때 뭐라 했었더라.
‘인간 관찰…?’
이 사람 헤르만 오라버니에게 나쁜 물이 들어서 나한테 장난치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알아보는 걸 포기했다.
그나마 납득이 가는 이유라면, 이 사람의 심상 마력 적성이 아예 없다는 것. 원래 심상 마력 적성은 낮거나 높다고 판단하는 게 옳다. 하지만 가끔은 아예 없는 사람도 나타나긴 한다.
심상 마력 적성이 아예 없는 사람들은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대신, 자연 마법에서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겉보기에 정신이 멀쩡한데 왜 적성이 없을까. 이것도 표류자라서 그런 건가? 참 신기하단 말이지.
“아, 수증기까지는 만들었는데.”
“그것도 잘 하신 거예요.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공기만 얼린다는 게 잘 감이 안 와서…”
“‘온도를 낮춘다.’보다는, 열을 빼앗는다는 느낌은 어떠세요. 불이나 물마법은 잘 다루시는 걸 보면, 이 접근방법이 더 맞으실 수도 있어요.”
“음, 한번 해볼게.”
마법을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능력 자체도 훌륭하다. 하지만 마법의 이미지는 결국 스승이 한 번 마법을 보여주면 그만인 일이다. 이건 중요하지 않아.
선생님의 두 번째 장점은 마법 이론을 습득하는 능력이다. 마법에 가장 큰 걸림돌은 상식에 대한 편견, 사람은 선입관이라는 걸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알려주는 마법 이론에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자연 마법 이론은 자연을 더 쉽게 조작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마법사들도 기본적인 물리학이나 화학 정도는 안다. 하지만 마법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어느정도 그걸 수용하고, 어느정도는 무시해야 한다. 마력으로 현상을 조작하기 쉬운 방향으로 이해해야하지. 그런데 그 무시라는 걸 이 사람은 너무 잘해.
신체 마법도 이틀 만에 배웠다는데 말이 안 된다. 자기 몸에 칼을 들이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을 독학으로 저질렀다니…
“오, 됐다.”
“하…”
“이게 다 한나 선생님의 뛰어난 가르침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축하해요…”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그런 일이 있어요….”
지금 배운 마법은 오버래핑 미스트. 그냥 안개를 뿌릴 뿐인 미스트 마법은 초급이다. 하지만 이 마법은 수증기를 만드는 과정부터 시작해 두꺼운 안개를 대기에 생성해버리는 중급 마법. 훨씬 불투명성이 강하다.
시야 차단용 마법을 알려달라 해서 미스트를 알려줬더니, 그걸로는 부족하시단다. 그런데 하루라니, 하루 안에 다 배워버리다니.
내가 처음으로 마법을 사용한 건 여섯 살이었나. 그때도 난 천재 소리를 들었지. 내가 처음 중급 마법에 발을 들인 건 아홉 살이고, 그걸 마스터할 수 있었던 건 열셋이었다. 내 7년 노력을 이 사람은 한주 만에…
“저기 한나?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냐?”
하아…
헤르만 오라버니가 나한테 왜 고민을 털어놓는지 알겠어. 너무 이상해 이 사람.
“괜찮아요.”
“그럼 내가 생각해본 마법이 하나 있는데, 구조화하는 걸 좀 도와줄래?”
“네?”
마법을 구조화해달라니. 마법을 하나 새로 만들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발언. 당신 제대로 마법을 접한 지 두 주도 안 됐잖아요.
선생님은 나에게 이리 와보라는 양 손짓을 했다. 원래 같으면 그런 손짓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한번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 지금은 강하니까 이번에만 내가 그냥 넘어가 준다.
가까이 다가가니 일급기밀이라도 되는 양,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씀하신다.
……
…………
내가 들은 게 맞나?
“미쳤어요?”
“아니, 왜?”
“이런 발상은 어떻게 한 거예요?”
“음, 이런 마법 없어?”
“당연히 없죠!”
“그럴 수가… 왜 없지?”
그럴 수가는 왜 나와?
없는데 이유라도 있어?
거기다 이 사람 미쳤어?
지금 들은 마법이 제대로 구조화된 상태에서 상급 마법의 수준으로 실현되기만 한다면…
기사단장님도 못 막으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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