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EP13. 결투와 여왕의 소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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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결투와 여왕의 소원 (2)
“저기 시하 형님. 선수로 그런 걸 꽂아버리는 사람이 어딨어요…”
“음, 내가 여기 와서 귀족이 된 게 한 달 전인가? 나는 그런 거 몰라~ 선수를 양보한다는데 그걸 받아줘야 예의 아니겠어?”
“형님 마법 때문에 아카데미 교장 부부까지 온 거라니까요?”
“에이 설마. 무려 사대 가문의 가주님께서 펼치는 검기가 무서워서 부른 거겠지.”
헤르만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사실 알고는 있다. 결투를 시작하자마자 방심한 상급자에게 위장 폭탄을 던져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물론 내가 던졌지만.
“공작님, 이 악무세요.”
“아아아아악!”
아프다.
너무 아프다.
나는 헤르만과 치유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서 왼팔의 상처를 막고 있다. 검기가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다면 팔이 반쪽이 될 뻔했다.
싸움이 끝나고 나서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아무리 치유마법으로 복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근육의 단면이 드러나 있는 내 팔을 보는 경험은 다신 하고 싶지 않다.
“여기 진통제 드세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왼팔이 날아가지 않은 게 어디에요.”
“기사단장님이 훈련을 도와줘서 다행이었어.”
“그래도 두 주간 노력하신 성과죠.”
“그런 말은 고맙네.”
몇 개의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승리일까. 발람이 선수를 내주고, 기사단장이 프라시스의 검술을 보여주고, 게임에서 보았던 폭발마법의 개념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으며, 우연히 내 자연 마력 적성이 높아서 이긴 것이다.
아마 선수로 섬광 폭탄 마법을 먹이지 못했다면, 그 뒤의 연계도 못 하고 무난히 졌겠지. 검술을 미리 보았기에 반응할 수 있던 것과 발람의 방심 역시 승패에 큰 영향을 줬다.
“귀족이라는 작자가 선수를 양보받은 주제에 저런 마법을 쓰는 게 말이 되는 일이오!”
“프라시스 공작은 가만히 있는데, 네 놈이 승부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이냐. 아니면 네 놈은 왕실 가정교사님을 모욕하는 것이냐.”
“네 놈!”
정작 당사자들과 백작 이상의 상위 귀족들은 가만히 있는데, 말단들끼리 싸우는 중이다.
그나저나 이게 그 정도 마법이었구나.
전자레인지에 달걀을 넣어본 적 있는가. 터진다. 나는 그저 달걀 폭탄을 게임에서 본 마법에 적용해서 던졌을 뿐이다. 찰흙 파면이 사방에 튀고 섬광이 터지는 건 변형일 뿐이지. 한나가 없었다면 세세한 부분은 완성 못 했을 것이다.
“모두 조용!”
소란스러운 분위기 일축하는 근엄한 목소리.
기사단장이었다.
“발람 프라시스가 자신의 입으로 뱉어낸 항복이었다. 이의가 있는 놈들은 따로 결투를 신청하도록. 물론, 그런 자들은 결투를 모독한 자들로 간주하고 내가 먼저 상대해주겠다.”
입만 산 것들은 실력자의 말에 약하다.
소란스럽던 관중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결투가 끝났으니 계산은 해야겠지.”
심판을 맡았던 재상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받을 것을 받아내야 할 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으로 나아갔다.
발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발람 프라시스 장군, 당신은 저에게 두 가지를 걸라고 하셨었죠. 가정교사로서 직책, 기디언의 수업 참여 여부.”
발람은 전신에 찰흙 폭탄의 자상이 남아있고, 방전과 빙결의 여파가 남아 몸을 떨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치유 마법사가 붙어 있어도 꽤 후유증이 심한 것처럼 보였다.
“제 고향의 고대 법전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복을 종용하는 너무나 잔인한 글귀죠. 그렇기에 저는 자비를 베풀어 드릴까 합니다.”
발람의 눈이 약간 빛났다.
일관성이 있어서 좋네.
자비라는 말에 들뜨다니.
“먼저, 기디언 프라시스가 자신의 삶에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공작가 자제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당신이 그에게 걸어둔 모든 구속을 풀어주세요.”
큰 해가 되는 일은 아닐 텐데,
발람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실 이 부분은, 날 도와준 기사단장과도 약간 이야기를 해두었다.
“제2군 장군으로서 향후 4년간. 발람 프라시스 장군의 공식적인 무력으로 토벌 가능한 모든 재앙 경보를 도맡아 처리할 것.”
발람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특별한 사유는… 저와 국왕 폐하, 기사단장과 재상까지. 4인의 모두의 허가가 없다면 그 어떤 사유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 조건은 국가적으로 좋은 일밖에 없다. 국왕의 부재로 인해 일거리가 쌓였고, 관리들의 부정도 늘어난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만의 이유로는…
4년. 이방인은 알렉산더가 17세일 때 나타났다. 지금의 알렉산더가 13세이니까, 4년 뒤에 본편이 시작된다는 거지. 그 전까지는 국왕이 가족과의 시간을 더 가졌으면 한다.
국왕은 내가 아는 역사에서 죽는다. 그로 인해 에우데미아의 쇠락은 한 층 가속되었지. 그저 이걸로 미래가 바뀌지는 않을까, 그런 소망이 담겨 있다. 턱도 없는 바람이겠지만.
“제 직책과 제자를 앗아가려 하셨죠. 저는 오히려 발람님이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시고, 프라시스 가문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에서 이 두 가지를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해내었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름대로 최대한 얄밉게 말했다.
발람의 얼굴은 새파래진 상태.
재상에게 고급스러운 받침대에 올려진 마법진이 건네어진다.
“조건은 정해졌으니 맹약을 진행하겠다.”
특정 조건을 정해두고 상호 간에 진행되는 특수한 마법이다. 이 마법을 진행하게 되면, 조건으로 걸린 것은 무조건 이행해야 한다.
“공작 간의 결투였으니, 맹약 파기의 대가는 죽음으로 하겠다.”
이런 게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심상 마법이라 해도, 도대체 어떤 존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이런 잔인한 마법이 생길까.
어찌 되었건, 나는 이렇게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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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들떠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그를 기다려왔고, 이 순간을 기다렸으니까.
처음엔 그저 재앙에게 쫓겨 외성까지 도망친 마을의 주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주민이라 하기에 그는 이상했다. 그의 옆에 있던 인간에게 보이던 것은 그저 공포뿐.
하지만 그는 재앙을 눈앞에 두고도 돌을 던졌다. 돌이 힘없이 떨어지자, 그는 그저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인 양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체념조차 보이지 않았다.
판타스매터가 내뿜는 부정적인 심상 마력은 내성이 없는 인간에게 악영향을 주기 마련. 하지만 하급 재앙에게 저항할 힘조차 없는 저 사람은,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나쁜 아이니까,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아마도 처음 보는 상황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나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를 주웠다. 단지 그것뿐인 일이었다.
그렇게 호기심이라는 이기적인 감정으로 그를 구하고 내 방에 데려왔을 때, 그의 옷과 물건을 보고 기대해버렸다. 설마 이 사람은 표류자인 걸까. 이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유는 혹시나 표류자여서일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몇 년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내 앞에 표류자가 나타난 걸까.
이 지옥에서 나를 구해줄 열쇠가 온 걸까.
분노를 간직한 마녀.
근원으로 향한 위대한 마녀님의 문양.
그의 옷을 갈아입히다 발견한 그 문양을 본 순간, 내 예상은 확신으로 화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생긴 나는… 빛을 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이상했다. 한 번도 못 봤을 천장을 낯익다고 하질 않나, 이내 다시금 낯설다고 하지를 않나. 그래도 나는 문답의 끝에 역시나 그가 표류자임을 재확인했다.
거기다…
그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을 해주었다.
‘겉보기엔 귀여운 10세 근처 소녀이신데, 말씀이 어른스러우셔서요.’
‘흐응. 이제는 좀 나이다우시네요.’
나는 분명 에우데미아의 왕녀다. 이 사람이 표류자이기에 그랬을까. 무례하다고 생각해야 할 저런 말에 왜 내 마음은 들떠버리는 걸까.
알현의 방에서조차, 그는 나를 그저 11세의 소녀라고 해주었다. 역시 그는 무언가 다르다. 확실히 표류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물론, 내 기대를 배신하는 일도 많았다.
표류자는 언제나 강한 심상 마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난다. 에우데미아의 시조님도, 이백 년 전의 해방자님도, 동방의 장군님도. 그리고 역사 속의 모든 표류자는 항상 그래왔다.
하지만 그의 심상 마력 적성은… 없었다. 그저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줄 알았다. 결과지의 그 무색을 보면서 걱정했다. 내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거기다 그는 항상 틀린 선택지만을 골랐다.
완수하기 어렵지만, 이득은 적은 선택지.
포기하고 눈을 돌리는 게 나은 선택지.
전혀 승산이 보이지 않는 선택지.
그런 선택지만을 고르는 그를 보며, 내 마음속 불안감은 몸집을 키웠다. 이 사람도 결국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걸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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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결국 모든 길에서 승리했다.
탄원에서 발람 프라시스를 논파했다.
국정을 소홀히 하던 관리들을 치웠다.
자라난 재앙을 스스로 물리쳤다.
오라버니의 마음을 구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승부에서 승리했다.
기디언님을 억압에서 구해냈다.
나라를 좀먹던 이들의 기반을 부숴버렸다.
역시나 이 사람은 달라.
심상 마력이 없더라도…
내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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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동관까지 오는 데는 꽤 고생했다. 구경하던 관리들이나 기사단, 군인 출신의 귀족들… 하물며 발람에게 줄을 댔던 떨거지들까지 전부 나에게 악수를 청했기 때문이다. 아마 헤르만이 없었다면 아직도 악수와 인사를 하고 있었겠지. 헤르만에게는 정말이지 고맙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알렉산더와 기디언이었다.
“스승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치유마법 덕분에 괜찮아요.”
알렉산더는 어느 순간부터 날 스승님이라 부른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정말 부담스럽다.
“처음에 그 마법, 정말 멋있었습니다! 한나 누님께 들은 건데, 스승님께서 직접 만드신 거죠? 마법을 창조하시다니 역시 스승님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왕자님, 사실 그냥 베낀 거예요…
반면에 기디언은 옆에서 말을 고르는 모양.
“그게… 감사합니다.”
“제가 멋대로 한 일인걸요. 왜 감사해요.”
“숙부님께서는… 제가 왕자님과 동행하는 것도 제한하고 저택에 가두려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사라지시고 나서부터는…”
기디언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쓰레기 자식, 파도파도 괴담만 나온다.
“괜찮아요. 이제부터는 당신에게 손도 못 댈거에요. 맹약까지 나누었는걸요.”
기디언은 어머니와의 좋은 추억이 많은 아이인 듯하다. 그렇기에 더 힘들었겠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와 알렉산더는 기디언의 울음이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속으로 참다가 터질 바에는, 가끔 우는 게 낫다.
“음, 스승님께서는 쉬셔야 하니, 우리는 나가보자. 다음에 뵙겠습니다, 스승님.”
“네, 기디언도 잘 가요.”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잘 한 거겠지.
무의미한 오지랖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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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찌뿌둥하네.”
치유마법을 받아서 그런가.
약간의 피로감이 몰려온다.
좀 쉬어야겠다 싶어 침대에 누우려 했다.
그런데 밖에서 목소리가 또 들려 왔다.
“들어가도 되겠나.”
“네, 들어오세요.”
기사단장이었다.
“팔은 괜찮나.”
“진통제도 먹었고, 치료마법도 받았기에 꽤 상태는 좋습니다.”
“다행이군.”
기사단장은 지난 일주일간 내 전투 방식을 잡아주었다. 검을 든 적을 상대할 때 심리전, 검사가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식, 제일 중요한 프라시스 가의 검술까지. 모든 걸 가르쳐 주었다.
“그나저나, 왜 안개를 피웠나.”
“물소리를 들으면 상대방의 위치를 알 수 있으니까 상대방의 눈을 가리려 했습니다. 일방적으로 공격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아쉽구만.”
“네?”
갑자기?
“자네는 눈이 가장 큰 장점일세. 자네를 베려는 참격을 앞에 두고도 눈을 감지 않아.”
“그런가요?”
음, 예전부터 겁이 없다는 말은 꽤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무인이 자신의 격을 높이기 위해 극복해야 할 가장 어려운 단계 중 하나지. 거기다 자네는 상대를 침착하게 분석하고, 수 싸움을 강요할 줄도 알아.”
“자네는 순수한 전투력 그 자체만을 길러도 된다는 거지. 안개 따위 없었어도 자네는 아마 발람을 이겼을 것이야. 그래도 잘했네.”
무언가 어거스트 기사단장은, 나를 무인으로 알고 이런 조언도 해주는 느낌이다.
그런데 저는 그저 태권도 검도 취미반이었다고요.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은데…
“말씀 감사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몸이 힘들어 보이는군. 거기다 밖에 다른 손님이 온 것 같아서 말이야.”
허허! 웃음소리를 내며 그는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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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다른 손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공주님.”
평소처럼 무표정한 공주님이었다.하지만 평소보다 풀이 죽어있다 해야하나, 긴장해있다 해야하나. 약간 굳은 느낌이다.
그런 공주님은 자주 들고 다니는 역사책을 옆에 끼고 있다. 저 책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승리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축하 인사 후에는 말이 없었다.
내가 이기면 소원을 들어달라 했었지. 그걸 말하고는 싶은데 참고 있는 건가.
승패와 관련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울 생각이었다. 말해주면 좋을텐데…
“공주님.”
“네?”
“소원을… 들어달라 하셨었죠?”
공주는 나를 보고 있다.
평소보다는 긴장한 기색이 보인다.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해낼 수 있는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
"정말… 인가요?"
"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면 좋겠지만, 못할 것 같아도 노력은 해볼게요?"
어떻게 보면, 알렉산더와 기디언을 신경 쓰느라 공주에게는 해준 것이 없다. 내가 가정교사가 된 이유도, 루시아 왕비가 내게 교사직을 맡긴 이유도 아셰리아 공주인데 말이다.
고민이나 소원같은 게 있으면 들어주고 싶다.
…
방안에는 우리 둘밖에 없다.
공주는 앉은 채 바닥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런 공주를 한참 보고만 있다.
건물 전체가 고요하다.
“그게…”
드디어 말하기 시작한 공주님.
“저를…”
…….
“저를. 근원으로. 데려가 주세요. 표류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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