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EP14. 그들만의 플라네타리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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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그들만의 플라네타리움. (1)
“저를. 근원으로. 데려가 주세요. 표류자님…”
내가 잘못 들은건 아닐까.
근원. 에코니아를 만든 창조신의 거처.
아레트 에우데미아와 헬레니아가 향한 곳.
해방자와 분노를 간직한 마녀가 향한 곳.
신화속에서 등장하는 미지의 장소.
내가 가본 적이 있을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 힘으로 도달한 게 아니었다.
"안될까요… 표류자님?"
이렇게나 조심스레 말한 소원이다.
그녀의 이 소원은 절대로 간절하다.
입이 바짝 마른다.
나는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전혀 예상치 못한 소원이었다.
나에게 그녀의 소원은 너무나 크고 무겁다.
"그게…"
짧은 말 한 마디. 나는 그저 한 단어를 말하면서도 마른 침을 겨우 삼켰다.
그저 '아이'의 치기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아셰리아 에우데미아라는 인간은 그저 세간의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을것만 같았던 현인, 어린 시절 나의 이상이자 동경. 하지만 절대로 닿을 수 없었던 이성과 합리의 여왕님.
내가 에서조차 도달할 수 없었던 그 여왕님의 어릴 적 소원이 근원에 향하는 것이다.
에코니아라는 대지에 함께 존재하게 되었는데도, 그녀는 아직 11세 아이에 불과한데도, 나따위와는 바라보는 곳이 너무나도 다르다.
"저는…"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주고 싶었다. 게임 속 지식이던 미래던 아는 걸 전부 이용해서라도 이루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근원이라니, 저 소원은 나에게 너무나 무겁다. 그곳은 신화이자 숭배의 영역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위층도 감히 그곳에 오를 발상조차 하지 못한다.
'저는 올바른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첫 수업 도중, 당신의 행복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담담하게 답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올바른 세상. 신은 자신이 살던 곳, 즉 근원을 본따 에코니아를 만들었다고 한다.
어떤 철학자의 세계관이 떠오른다.
근원이라는 이데아, 에코니아라는 메아리.
이상향의 모조품에 불과한 에코니아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그렇기에 여왕은 올바른 세상인 근원에 가고 싶은 것인가.
'……. 제가 왕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왕족인 건 아니니까요. 출생은 정할 수 없습니다.'
출생은 정할 수 없다. 그 한 마디가 내 가슴에 꽂힌다. 나 역시 태어났음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초라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린 여왕의 두 눈에는 흔하디 흔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명한 내 앞의 여왕님은, 지금 자신의 두 눈에 무엇이 보일까. 지난 11년간 어떤 세상을 눈에 담아오며 살아왔을까.
그저 불완전한 세상일 뿐인 에코니아. 결말마저 저주받은 듯한 이 대지에서 살아오면서,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공주님."
아마도 나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소원을 감당할 수 없다.
그저 표류자라는 이유로 부탁한 것 같지만…
결국 나 역시 흔하디 흔한 인간에 불과하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눈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보이고 있으니까, 약간은 이해해주지 않을까.
내가 '틀린 선택지'를 고른다고 했었지.
맞는 이야기다. 합리를 추구한다던 나는 틀린 선택지를 고른 결과로 많은 실패를 겪었었다. 이 곳에 와서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여기와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저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해요. 근원에 향하는 것은 저에게 너무나 멀고… 위대한 일이에요."
이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
언제나 많은 것을 보는 이니까.
그저 내 최선을 말할 뿐이다.
이정도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나는 그녀를 목표로 삼았을 뿐이었다.
그저 나는 흔하디 흔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녀를 속이려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공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도와드릴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제가 공주님을 근원에 데려간다니… 그건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그녀의 최후를 안다.
아마 나는 바꾸지 못할것이다.
이미 나는 바꾸지 못했으니까.
99개의 결말을 찾아도 닿지 못했다.
하지만 끝을 함께하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어찌보면 나는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다.
어차피 나는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역시나… 그런가요…."
여왕님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힘없이 일어나 방문으로 향한다.
"실례했습니다…."
방문이 닫힌다.
닫히는 문 사이로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에는 눈물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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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이 나가고 나서 나는 누워버렸다.
내 몸은 매우 지쳐있다.치유마법을 받으면 몸이 피곤해진다더니, 나는 지금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져버린 상태.
하지만 그런 내 머릿속을 채우는 한가지 생각.
'따라가서 죄송하다 해야하나.'
어찌보면 나는 그저 못할 일을 못한다고 했을 뿐이다. 공주가 가는 길을 돕겠다고도 했었지. 겉보기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문틈으로 보인 우는 모습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그 눈물 하나하나가 돌이 되어 나에게 날아오는 것 같다.
"하아…"
한숨을 쉬며 자연스레 왼팔을 이마에 대었다.
셔츠 너머로 흐릿하게 새겨진 문양이 보인다.
썩을 마녀년. 무슨 해방자야.그럴싸한 특전이라도 주고 이세계행을 시키던가.
만약 그 마녀가 진짜 분노를 간직한 마녀라면, 적어도 근원으로 향하는 하이패스 정도는 개통해줘야 하지 않나?
에코니아에 떨어진 뒤로 마냥 힘들었던 일만 있던 건 아니다. 좋은 일도 있었다. 그래도 이게 무슨 고생인거야…
정말이지 부조리하다.
아레트 에우데미아와 헬레니아라는 성을 가진 최초의 성녀. 그 둘은 신수들과 공모하여 신을 끌어내린 자들이다.
해방자와 분노를 간직한 마녀. 도대체 근원에서 뭘 해방시켰는지 몰라도 악인들을 없애 태초의 혼란을 잠재운 자들이다.
나? 23세 인서울 대학생.
다른 경력사항은 전혀 없음.
거 스펙차이 참 심각하네.
……그러고 보면.
아셰리아 공주는 왜 근원에 가고 싶은 걸까.
올바른 세상에 가고 싶다는 목표는 알겠다.
그렇다면 이 썩어빠진 에코니아에서 무엇이 공주를 괴롭혔을까. 물론 짐작가는 건 많다. 정말이지 많아.
하지만. 도대체. 왜. 근원에 가려는 걸까.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 발단을 알고 싶다.
왜 근원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거지?
거기 간다고 무언가 바뀌기라도 하는걸까?
그 새하얀 공간의 작은 벽돌 집에서 빨간 마녀는 정말이지… 행복과는 거리가 먼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에야 나를 보며 웃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웃음은 정말이지 어색했다. 200년간 웃지도 않다가 겨우 웃은 느낌.
마녀는 아마 혼자인 것 같았다.아레트와 헬레니아야 천년 전 사람이니 죽었다 치면해방자 놈은 도대체 어디에 있던 걸까.
정말이지.
부조리한 일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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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이미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차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난 어린 아이를 울렸다.
"못난놈, 모질이, 병신, 쓰레기."
나 자신을 말로 흠씬 패준다.
그래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공주는 지금 자고 있을까.
이야기라도 해보고 사과하고 싶다.
사과하는 게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다.
그저 내 마음 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일단… 사과는 관두자.
찾아가서 이야기라도 나눠 볼까.
내 방은 2층 중앙에서 왼편.
공주의 방은 3층 중앙에서 오른편이다.
으슬으슬한 밤공기에 약간 냉정해졌다.
이래서야 야밤에 공주의 방에 감히 침입하는 개 쓰레기 자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샤에게 암살당해도 할 말이 없다.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래도 가야한다.
나는 어린 아이를 울린 못난 놈이다.
어느새 도착한 공주의 방 앞.
문을 두드리지만 아무 응답이 없다.
자고 있는건가. 살짝 확인만 할까.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저 머리만 들이밀어 확인만 했다.
방은 어둠고, 이불은 헤집어져 있다.
이 야밤에 어디 나가기라도 한건가.
나는 잠이 확 달아난 상황.
밤 산책이라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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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감을 쏟은 듯한 밤하늘.
그 하늘에 달과 별이 하얗게 박혀 있다.
내가 걷는 곳은 모든 불이 꺼진 왕궁 정원.
이곳에 달빛이 내리니
정원 풀잎에 맺힌 물방울은 각자
자신이 별이라도 되는 양 빛을 반사했다.
티타임에 쓰이는 화원의 테이블이 보였다.
그곳에는 새하얗고 작은 무언가가 잠옷을 입고 바람막이만 걸친 채 엎드려있다.
내가 테이블에 가까워질수록 나지막이 울먹거리는 소리가 점점 확연하게 들려온다.
평소라면 ‘저녁이 추우니 들어가셔야죠.’ 훈계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지는 아직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래도 저 어린 것이 이 정도로 울고 있으니, 죄책감이 한층 더 깊게 스며들고 있다.
테이블 옆자리에 앉아 근처를 보니, 공주님이 소중하게 안고 다니던 책이 떨어져 있었다.
《모든 감정과 마력의 해방자들 그들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사료의 분석》
이 세계의 전설적인 인물들에 관한 논문집이다.
가만히 있기도 무안하고 마냥 떨어진 책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책을 주워들었다.
공주의 꼼꼼한 성격을 반영하듯 책은 깨끗한 편이었지만,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순 없었다.
책 옆면의 주름이 '공주님께서 이 페이지를 가장 많이 펼쳐보았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나지막이 울던 소리는 어느새 멈춰 있다.
공주는 분명 내가 자신의 책을 주운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만…미동도 하지 않았다. 울다지쳐 반응할 여력조차 없는 것이겠지.
이제 화원에는 가끔 우는 풀벌레의 소리 이외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락
책을 펼치자 그곳에는 그림이 있었다.
달빛이 이걸 보라고 그림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곳의 전설적인 인물인 해방자에게는 한 명의 여인과 다섯 신수가 따랐다고 한다.
이 페이지에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고 다섯 신수가 그들을 지키듯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오래전에 덧그려진 무언가가 있었다.
남녀의 사이에 덧그려진 아이의 모습.
손가락 끝으로 남녀를 붙잡고 있다.
'아 …'
나는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삐뚤어진 플레이어였던 나에게, 그녀는 게임 속 그 누구보다 고고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의 죽음마저 나에겐 숭고하게 보였다.
이 세계는 분명 게임이 아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지금 내 옆자리에서 울먹이던 공주님은 게임 속 그녀가 아니다.그런 그녀를 게임 속 그녀로 착각한 채 대했다.
그녀에게 위대한 여왕의 삶은 필요없다.
아직도 고개 숙인 소녀를 보았다.
익숙한 어린 소년이 겹쳐 보였다.
잊고만 살았던 아이였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는 테이블에 있는 힘껏 이마를 박았다.
아픔이 뒤늦게 올라온다.
소녀의 움찔거림이 테이블을 타고 내 이마로 전해졌다. 그녀는 그저 쉽게 풀죽는 아이일 뿐이었다. 알현실과 도서관에서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처음 전이한 그날부터, 그녀는 어린아이 취급이 익숙하지 않을 뿐인 한명 소녀에 불과했다. 첫날 보았던 그 자그마한 미소가 떠오른다.
애시당초 근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가치는 숭고한 이상향 따위가 아니다. 박물관에서 소녀의 혼잣말이 떠오른다.
나에게 분노한다.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나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지금 다짐을 위한 첫걸음을 행하려 한다.
정말이지 치졸한 행동이다. 하지만 필요하다.
쿵.
그것은 테이블에 이마를 한번 더 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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