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EP15. 두번째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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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두번째 내기
사흘이 지나고.
후궁의 응접실 문 앞.
나와 공주는 왕비를 만나기 위해 왔다.
"그게… 정말 괜찮을까요?"
"공주님께서 준비하신 건데 괜찮지 않을 리가요."
"으…"
"일단 해보는거죠. 제가 이번 내기에서 진다면 다른 방향으로 힘내보죠."
"그게 아니라, 약간…"
공주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자신의 감정을 애써 숨기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아닐까.
"아닙니다. 일단 해보죠."
"그렇죠. 그런 자신감입니다. 이제 응접실 문을 두드릴게요?"
"잠시만요."
공주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흐흡 크게 하더니 스스로 문을 두드렸다.
"어마마마,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세요."
왕비의 허락이 떨어지고 공주는 응접실에 입장했다. 나는 자연스레그 뒤를따랐다.
공주에게 듣기로는 왕가의 일원이나 가까운 이들이 사용하는 응접실이라고 한다. 가구도 장식을 제외하면 다탁과 접대용 소파 정도 뿐이었다.
우리는 왕비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어마마마."
"안녕하세요 리아, 선생님도 안녕하신가요?
"덕분에 평안합니다."
무난한 인사가 오가는 때에, 후궁의 시중이 컵에 차를 따른 뒤 문을 나섰다.
"선생님, 저번 결투에서 입은 상처는 호전되셨나요?"
"네, 얕은 상처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실은 결투를 거신 것 자체부터 걱정이 되었는데 말이죠."
말씀에 약간 가시가 돋혀계시네…
"그 점은 죄송합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발람에게 제시한 조건들을 듣고서는 다시 안심했습니다."
"하하…"
"그래도 다음부터는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그 이전의 행동들도 보고가 들어와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심 전이 후에 무리한 일만 했다는 자각은 있어서 미안하긴 하다.
하지만 왕비님, 제가 지금부터는 그거보다 더한 짓도 많이 해야 합니다만…
"그래서, 두 명이 함께 여길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행히 당장에는 격무가 없었습니다만…"
이제 건국제가 세 주 앞으로 다가온 상황. 왕비와 재상은 한참 바빠질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요즘은 발람 녀석이 고분고분 토벌을 나간다고 한다.덕분에 국왕도 내정을 돌볼 수 있어 업무 강도는 나아진 편이라고 전해들었다.
"아셰리아님께서 왕비님께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셔서요."
"선물… 말인가요?"
왕비는 내 이야기를 듣고 공주를 보았다.
공주는 왕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들고온 두루마리를 꺼냈다.
"여기… 받아주세요. 어마마마."
왕비는 약간 의아한 기색이다.
하지만 이내 두루마리를 받아 펼쳐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
별하늘이 빛나던 그날.
세 사람이 나란히 누워있을 때.
"다음 내기는 말이죠…"
공주와 아샤는 시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공주님께서 그림을 한 폭 그려주세요."
"네?"
"뭐요?"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치 못한 것.
공주는 의아한 기색으로, 아샤 티오리아는 맥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간단하지 않나요? 물론 이번 그림은 공주님께 익숙한 종류는 아닐거예요. 하지만 저도 약간 도와드릴 겁니다."
원래의 세계에서 워낙 많은 취미를 가져보았던 그였다. 그 수많은 취미 중에는 드로잉 역시 있었다.
한창 그는 거리의 카페에서 사람들을 그려왔기에, 지금부터 그릴 그림은 특히나 자신있는 분야이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나요?"
공주는 호기심을 띈 채 물었다.
"인물화를 그립시다. 그리고 왕비님께 선물해드리죠."
.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셰리아와 시하는 이젤 하나에 도화지를 둔 채, 그 앞에 나란히 앉았다.
"자, 시작해보죠."
"네…"
하지만 아셰리아의 마음은 마냥 편치 않았다.
"그게… 정말 그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화내시지는 않을까요…"
"가족을 그렸는데 왜 화를 내십니까."
그렇다. 지금부터 그들은 아셰리아 공주의 가족들을 그릴 예정이다.
"자 일단 구도부터 잡읍시다."
"표류자님…"
"분명, 그분들이라면 받아주실 겁니다."
"……"
그녀가 걱정하는 이유는 둘.
자신이 감히 가족의 그림을 그려도 되는가.
그래도 이것 뿐이라면 감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도화지에 그려진 구도는…
"정말 이렇게 그려도 될까요?"
"음, 오히려 이렇게 그려야만 합니다."
얼핏 보기에 키가 크고 건장한 남성.
남성의 어깨까지 오는 키의 여성.
그 두 사람 앞 의자에 앉아있는 오누이.
"정말 에스더님을 그리지 않아도 될까요."
"네."
감히 에스더님을 뺀 그림을 그려도 되는가.
그 사실에 공주를 괴롭히고 있었다.
"공주님. 공주님만이 힘든 게 아니에요."
시하는 스케치를 계속하며 말했다.
"알렉산더님께서는 마음의 짐이 크지 않으실겁니다만, 나머지 세분의 마음속에는 에스더님이 너무 크게 남아있어요."
그는 내심 자신을 스쳐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인연을 기억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저도 지금에서야 깨달았지만… 과거로 인해 현재가 슬퍼지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그가 하지 못했던 일.
지금은 어느정도 극복해낸 일.
아셰리아는 시하가 그림을 그리는 옆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다가…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아기였던 나보다 훨씬 더 가까웠던, 서로를 사랑하셨던 분들이 더 힘드시지 않았을까.
그녀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해야할 행동을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제부터 제가 그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시하는 아셰리아의 말에 약간 의자를 뒤로 빼며 물러났다.그렇게 둘은 그림을 완성시켜가기 시작했다.
물론, 공주의 마음 속 고뇌는 끊이지 않았다.
만약 결심 한번으로 마음이 바뀌는 이가 있다면, 그는 그저 머릿속이 단순한 인간이거나 진정으로 마음이 강철같은 인간일 것이다.
'나는 이 구도에 끼어도 되는가.'
'나는 이 그림을 그려도 되는가.'
'생모님을 그림에 그리지 않아도 되는가.'
'그분을 마음속에 그리지 않아도 되는가.'
마음속에 여러 물음이 소용돌이쳤다.
'나와는 다른 세분의 머리칼.'
'그분을 떠올리는 머리칼을 가지고서.'
'나는 그래도 여기 끼어도 되는걸까.'
하지만 그 순간순간마다.
"공주님, 간식을 내어왔습니다. 드시고 마저 진행하시지요."
"저기 아샤, 제 간식은요?"
"알아서 가져다 드세요."
"하아…"
"저를 속이신 벌입니다."
"ㅇㅏ, ㅇㅖ."
두사람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마 두사람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 그림을 그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구도를 잡는 것을 도움받았고, 마음을 잡는 것을 도움받게 되었다.
"완성…"
"역시 훌륭하십니다."
"이제 내일 뵙기로 할까요?"
그림이 완성되고… 공주는 생각했다.
두분의 침실에 그림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
왕비님은 오랜 시간동안 그림을 보고 계신다.
내 옆의 공주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있다.
공주의 표정에서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게… 리아?"
"네."
"지금 막 생각났는데 선생님과 업무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 자리를 비켜줄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선물, 정말 고마워요."
"저도 항상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는 가볍게 드레스를 들어올리며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 발걸음은 얼핏 가벼워 보였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까.
이 가족은 정말이지 서로를 아낀다.
이 부분은 내가 한 일이 전혀 없다.
그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할 기회를 만드는 것. 그것만 가능하다면 관계의 회복은 절로 진전될 것이라 예상한다.
잘 됐으면 한다.
"저 아이에게는 강한 어머니로 남고 싶어서 말이죠."
공주가 떠난 자리.
왕비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아… 선생님 앞에서는 꼴사나운 모습을 자주 보이네요."
"괜찮습니다."
한동안 왕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항상 고민해왔어요."
약간은 진정된 왕비가 말을 꺼냈다.
나는 그저 들을 뿐이다.
"나는 과연 에스더의 대신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요."
"가끔 관리들이 저 아이를 칭찬할때, 나는 부모로서 해준 일도 없는데 잘 자라줘서 고마웠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해준 일이 없으시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미 저는 저 아이의 어머니였군요."
"그것도 정말 현명하신 분이시죠."
왕비는 격무로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면이 있긴 했다.
하지만 항상 둘의 동향을 파악하고 꾸준히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당장에 내가 가정교사가 된 이유가 왕비의 판단이었으니까.
"정말이지 잘 그렸네요. 리아가 그림을 그린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라고는 모르고 있었어요."
내가 자리라도 비켜줘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아련하게 그림을 보는 왕비였다.
"침실에 이 그림을 걸어두어야 겠네요."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아직은 그 그림 거시면 안됩니다.
"사실은 말이죠. 제가 공주님과 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기라고요?"
심상치 않음을 느낀 왕비님이 나를 째릿하고 쳐다보았다.
새삼 느끼는건데, 에코니아 여자들은 전부 하나같이 무섭다.
"세 가지 내기를 하기로 했는데 말입니다. 지금 이게 두번째에요."
"네?"
"이 그림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지, 슬퍼하시는지로 내기했습니다."
"……"
"물론 제가 이겼습니다."
내가 이겼다.
이 한마디로 왕비는 모든 상황을 유추했다.
"저도 필레몬과 다를 바가 없네요…"
"그러시라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내가 약간 단호히 말하자 왕비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왕비는 나를 보았다.
"무언가 생각하신 게 있으신가요."
"마지막 내기는 약간 큰 무대가 필요해서 말입니다. 협조를 부탁드리려고요."
"일단 들어보죠."
.
"흠, 재밌겠네요."
왕비는 나름 흡족한 웃음을 내비췄다.
이 사람도 은근히 이런 걸 즐기네.
"그런데 호기심이 생기네요."
갑자기요?
"세 번째가 이정도라면 첫 번째는 뭐였죠?"
"… 비밀입니다."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와요?"
…….
야밤에 얼음검을 만들어 공주님께 휘둘렀다고는 절대 말 못한다.
"하하. 공주님께서는 혼자가 아니시라는 그런 내기였습니다."
"어떻게 내기로 증명하신거죠?"
거… 끈질기시네.
또 온도조절계 마법을 누가 쓰나.
왜 춥냐.
"제가 오늘 협조를 요청할 곳이 많아서요!"
오늘 어디를 들려야 하더라.
헤르만은 곧 출근할거고…
치안본부에 기사단까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쁘다 바빠!
나는 바빠서 나가는 것이다.
절대로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 아니다.
◆◆◆
이시하가 떠난 응접실.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을건데."
그녀는 여러 방법을 유추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자신의 딸'의 '고독'을 없앨 수 없을 것 같았다.
"리아에게 직접 물어볼까. 대화도 할 겸."
분명 모녀간의 대화는 좋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시하가 첫번째 내기로 한소리를 듣는 미래가 정해져버렸다.
왕비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필레몬 역시 이 그림을 본다면 아마 울어버릴 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침실에 걸 때는 아니었다.
지금은 건국제도 얼마 남지 않아 거리도 꽤 떠들썩한 상태, 분명그녀에게 바쁜 시기다.
건국제 연회의 준비, 파티 후 귀빈들에게 돌릴 선물의 선정, 거리의 점검, 거리 행사 준비.
거기다 탈락 귀족 자제들의 숙청 연극 구상까지, 올해 축제는 여러모로 떠들석 할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우선인 일.
가정교사 이시하에게 들은 세번째 내기를 준비하려면 그녀도 꽤나 움직여야 한다.
거리의 통제도 모자라 왕도 신문까지 몇 장을 위조해달라니. 정말이지 철저한 인간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지금까지 그의 행적들은 우연이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그녀였다.
그렇게 그녀는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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