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EP16. 세 번째 내기 (2) 100번째 선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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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세 번째 내기 (2) 100번째 선택지.
루시아 어머님께 그림을 드린 순간, 여느때처럼 그분에게서도 감정의 색이 피어올랐다.
너무나 익숙한 슬픔의 검정과 연민의 보라.
하지만 지금껏 본 적 없던 움직임이 있었다.
노랑…
초록…
빨강…
하양…
색들은 시시각각 생겨나고 사라져갔으며,
서로 섞이고 분리되어 다른 색을 만들고,
매번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나갔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보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저 모습을 본 경험이 있었다.
집무실에서 첫 업무를 맡았을 때, 나를 칭찬하던 관리의 뒤편에 보이던 색. 그것은 초록이라 단정짓기엔 너무나 밝았다.
밝은 초록과 함께, 마음속 별하늘이 떠올랐다.
'인간의 감정은 한 단어로 정의될 수 없답니다. 슬픔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상황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져요.'
별하늘 아래에서 들었던 표류자님의 말씀.
나는 지금껏 감정의 색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검정을 슬픔이라고, 보라를 연민이라 정의했다.
그렇다면 섞이고 있는 저 색들은 무엇일까.
저렇게 여러가지 형태를 띄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나는 감정의 색을 감히 정의할 수 없다.
루시아 어머님의 감정을 감히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다.
어머님의 뒤로 피어난 감정의 색은…
단순한 슬픔과 연민만이 아니었다는 것.
기쁨…
기대…
사랑…
해방…
색의 의미를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괜찮을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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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작은 오두막.
그 안의 작은 의자에 내 손은 가볍게 묶여 있다.
표류자님께서 제시한 마지막 내기.
'국왕님과 눈을 마주하신다면, 제 승리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봐주지 않는 분이시다.
과연 나를 봐주실까,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다.
'눈을 못 마주치신다면 제가 진 걸로 하죠.'
담담하게 말씀하시던 표류자님.
오두막 근처까지 따라와준 아샤.
그리고 그림을 받아주신 루시아 어머님.
세 명을 떠올리자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그리고 때가 왔다.
"리아, 어디 있느냐!"
문을 박차고 들어오신 아바마마.
그리고 곧장 달려오셔서는 밧줄을 풀어주셨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네…"
화살과 마법에 스친 전투복.
피어오르는 금빛 오라.
정돈되지 않은 호흡.
전신에 흐르는 땀.
'상황에 따라 감정의 의미는 달라져요.'
상처를 입으시면서도한달음에 달려오셨다.
"내 이놈들을…!"
지금 아바마마는, 나를 위해 분노하셨다.
굳이 감정의 색을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왜… 왜 그러니! 역시 어딘가 다치기라도…"
아바마마의 말씀에, 난 울고 있는 걸 깨달았다.
말을 해야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놈들이 널 어떻게 한거냐!"
아바마마께서 무릎을 꿇은 채 나를 바라보셨다.
습관적으로, 아바마마의 뒤편을 확인하려 했다.
그 모습은 루시아 어머님의 때와 비슷하다.
정확히는 그때보다 격렬한 변화가 일고 있다.
하지만… 어두운 색따위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아바마마와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눈을 돌리시진 않을까.
두렵다.
하지만.
내 눈을 계속 봐주신다.
"아바, 마마…"
"그, 그래! 왜 그러니…"
제대로 말씀드리기 힘들다.
울음이 계속나와 숨쉬기가 힘들다.
하지만 말하고 싶다.
"구, 구해주러, 와주셔서……"
애써 숨을 골랐다.
아바마마는 나를 기다려주셨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는 그저 내 눈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이다."
나는 '선생님'과의 내기에서 모두 졌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기쁘다.
◆◆◆
국왕이 떠난 왕궁의 정문.
"쿨럭"
"가셨어요. 어서 치유나 받으세요."
"약효가 떨어졌어… 약…"
"더 드시면 죽어요…"
오늘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모두 왕실 가정교사가 벌인 연극이었다.
결투 당시 이시하를 치료했던 치유 마법사가 먼 발치에서부터 다가왔다.
"못 죽어서 안달이 나셨네요…"
"흐억!"
"참으세요. 거기다 공작님이 자해라니요."
이시하는 성당의 수녀인 그녀와도 사전에 교섭을 마쳐 둔 상황. 그녀는 이런 상황을 마주해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자해는 정말이지교리에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의도가 좋으니 봐드리는 겁니다."
"아아악!"
치유 마법은 기본적으로 아프다.
특히 외상을 치유하는 계열은 상처가 날 때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다시 느끼게 되는 마법식이 영창에 추가되어 있다.
헬렌 교국의 역사서는, '다쳐도 치유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질린 초대 성녀가 치유 마법에 약간의 고통을 동반시킨 것이 유래라고 전한다.
"형님… 이렇게까지 해야 했습니까."
"전장에서 몇십 년이나 구르신 분이야. 속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말이죠…"
이시하는 진통제를 먹은채 여기저기 자상의 흔적을 냈었다.
물론 충분히 치유 마법으로 회복이 가능한 수준까지였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아… 이제 좀 살만하다. 헤르만, 숲으로의 출입은 통제했지?"
"치안본부가 갔으니까 충분할거에요."
"이제 친위대와 티오리아 사람들이 연극만 잘 해주면 되겠네."
"하아…"
왕궁부의 첩보대를 어떻게 아는 걸까, 헤르만 티오리아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정보습득과 요인 암살에 특화된 왕궁부의 소규모 부대. 이들의 존재는 장관급 인사를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다.
게임을 통해 그 존재를 알고있는 이시하는
'티오리아는 그럴 것 같아서요? 상식입니다.'
라고 얼버무렸지만 말이다.
"자, 여기.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술이나 하러 가자고, 하하!"
왕도 정문에 있던 사람들 역시 전부 바람잡이들, 사전에 고용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은화 몇 장을 손에 쥐고 거리로 돌아갔다.
"우리도 이제 구경이나 하러 갈까. 지금쯤 가면 딱 맞겠지."
헤르만은 이제 다른 말을 힘조차 없다.
"아, 예…"
어제부터 이 일을 꾸미는데 그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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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근방의 숲.
"자네는 미친 게 틀림 없어."
"동의합니다."
"……."
왕궁부장 카일 티오리아와 치안본부장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이시하.
치안본부장은 직급이 낮다보니, 동의한다는 말로 욕을 대신했다.
"도대체가 어떤 인간이 한 나라의 국왕을 속일 생각을 하는가."
"그걸 알고도 도와주신 분들은 누구신데요…"
"동의합니다."
"……"
카일 티오리아의 추격타에 이시하의 반격.이번에는 반대로 카일이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그들에게 기사단장 어거스트 라코니아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발람에게 결투를 신청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네만… 자네는 미친 게 틀림 없어."
그는 카일과 똑같은 말을 했다.
오늘의 작전은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국왕의 최측근이라 볼 수 있는 왕궁부장 카일 티오리아와 상황을 유도한 제1군 친위대.
도적을 연기한 티오리아 가문의 왕궁부 첩보대. 숲으로의 출입을 통제할 왕도 치안본부.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 너무 뭐라는 거 아니오?"
"이번 일이 잘 풀리면 좋다고 생각하오."
근처에서 쉬고 있던 친위대가 말했다.
"공주님을 만나시고 나면 말이야, 매번 표정이 죽을 상이 되셔서 얼마나 신경쓰였는데."
"야, 죽을 상이라니. 너 그건 불경죄야."
"상관 있나, 나 평민이라 그런거 잘 몰라."
작위를 막론하고 실력 중심으로 선발된 이들은 수많은 전투를 함께 하며, 국왕과의 친분도 깊어진 편이다.
거기다 대부분이 10년 전부터 국왕을 지탱해왔기에, 국왕가의 사정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
오히려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팔불출 국왕을 10년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뭐, 저런 놈들이니까 말이야. 설득은 쉬웠네만… 자네는 미쳤어."
"단장님, 미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허, 참. 그건 반박할 수가 없구만."
말로는 다들 이시하를 미쳤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내심 국왕 가족의 화목을 바랬기에 이렇게 모인 것이리라.
"국왕님은 오두막에 도착하셨나요?"
"방금 도착한 걸 확인했다네."
"그럼 가서 확인이나 해볼까…"
"우린 여기 있을테니, 헤르만과 갔다오게."
"알겠습니다."
게임에서도 등장하는 장소라 길을 아는 시하였지만, 헤르만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으로 향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리에 남아있던 이들이 말했다.
"정말이지 신기한 친구일세."
"동의합니다."
모두가 국왕 가족의 화목을 바란 것은 맞다.
"재앙을 표류 열흘 만에 무찌르고, 그 후엔 슬럼가에 발람과의 결투까지."
"상상도 못한 일을 한단 말이죠."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한데 뭉쳐 행동하게 만든건, 어디까지나 왕실 가정교사의 공이였다.
이때까지의 성과가 없는 채로 이런 일을 추진하려 했다면, 그는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런데 자네는 갑자기 왜 이러나?"
"그래, 다른 말을 못하게 되었나."
"동의…. 그게, 저 분 앞에선 저도 모르게…"
"……."
"……."
타인에게 이상한 영향을 끼치는 그이기도 했다.
◆◆◆
이 세계에 도착한 뒤로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셰리아 공주는 '여왕'다운 사람일 것이라고.
그녀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현인이 되리라고.
내가 오두막 앞에 도착하자,마침 국왕과 아셰리아 공주가 오두막에서 나오고 있었다.
둘은 모두 웃고 있었다.
한 명은 땀에 절은 채 웃고 있었고, 한 명은 울다가 웃는건지 볼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부녀는 손을 꼭 잡고 있다.
"형님, 그래도 잘 되었네요."
"그래…"
아셰리아 공주는 한명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다.
현명한 척 하지만, 자신과 타인에게 서툴렀다.
타인을 멀리 했지만, 타인에게 닿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간단다.'
국왕 가족의 행복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것은 예전부터 그들이 항상 바래왔던 행복이다.
원래부터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있었기에,나는 그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줬을 뿐이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화목을 바라지 않았다면, 무슨 짓을 해도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시하 형님, 무슨 생각하십니까."
"그냥… 그런게 있어."
'저 아이가 너처럼은 안되게 해주렴.'
저 사람들은 나와는 다르다.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거기다 나는 저 아이의 선생이다.
저 아이의 행복을 지킬 의무가 있다.
나는 게임 속 초월적인 이방인은 아니다.
그가 이 세계에 올 지도 확실하지 않다.
거기다 아직 내 삶의 의미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목표 정도는 정해도 되지 않을까.
수단과 방법 따위 가리지 않는다.
분명 나는, 그런 걸 가릴 만한 초인이 아니다.
내가 고르는 선택이 바르던 그르던,
내가 아는 99개의 루트 전부를 없애버리겠다.
그리고…
새로운 100번째 선택지만을 남겨둘 것이다.
해낼 자신은 없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나는 저 아이의 선생이기에,
기꺼이 저 아이의 앞에 설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삶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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