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21. 왕실 폭발 가정교사와 집구하기.
* * *
21. 왕실 폭발 가정교사와 집구하기.
또다시 꿈인 걸까.
나는 하늘에 붕 뜬채로 어떤 방을 보고 있다.
그 방안에는 어떤 소년이 있다.
굳게 닫은 방문.너머로 들려오는 폭언과 부서지는 소리.친족이라는 큰 단위로 미쳐있는 집안.
소년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멍하니 둘러본다.
벽에 걸린 못 하나.
열린 창문.
책상의 볼펜.
저걸로 편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천하진 않았다.
무언가 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흔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흔하디... 흔한 집안일 뿐이다.
.
.
.
일어나고 보니 왕궁 동관의 내 침실이었다. 내 옷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다.
... 그래.
흔한 일이지.
요즘 세상... 아니 나는 에우데미아에 와있으니 이런 말을 쓰면 안되지.저쪽 세상에서 가정폭력이라는 일은 흔하지 않은가.
그리고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흔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썩 괜찮은 유년기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날 생각해주는 어머니가 계셨으니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나이에, 흔한 집안에서 흔한 일만을 보고 배웠다.친구들을 보며 우리 집이 비정상이란 건 깨달았긴 했어도, 무엇이 정산인지 몰랐다. 결국 나는 감정을 휘둘러대는 괴물의 씨앗에서 태어난... 작은 괴물일 뿐.
어느 순간 어머니께서 이혼을 결심한 날, 나 역시 버림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를 홀로 키우셨다.
당신께서도 힘드셨다고,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쉬운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렇게 번듯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전이하기 직전만 해도... 나름 명문 대학에 적당한 인간관계, 사회적인 인정을 받지 않았었나.
객관적인 시선에서 나는 분명 행복한 인간일 터였다.
... 물론 정말이지 유감스럽게도, 껍데기만 그럴듯한 인간일 뿐이지만 말이다.
…….
오늘 할 일이나 해볼까.어쨌거나 나는 이 쓰레기같은 에코니아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실로 향했다.
* * *
토요일.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기에 나는 집을 찾아보기 위해 토지주택 관리처에 왔다. 지금은 자리에 앉아 담당 관리를 기다리는 중이다.
에우데미아의 왕도 아레트의 공식적인 영주는 당대의 국왕으로 정해져 있지만, 주택의 관리와 보급은 재상부 산하 기관인 토지주택 관리처에서 행해진다.
주택의 분양이나 재개발과 같은 업무를 이곳에서 전담하고 있기에, 새로운 집을 구하려면 이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냥 왕궁에서 사시지…"
"시끄러."
물론 헤르만도 함께다.
귀찮은 티를 팍팍 내고는 있어도, 이 녀석은 첩보와 요인 암살에 특화된 훈련을 받는 티오리아의 장남이다.
주택을 고를 때 방법이나 안전에 관련된 자세한 조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오늘은 무슨 일로?"
"입주할 주택을 찾으러 왔습니다."
손을 싹싹 비비는 직원 한 명이 나타났다.
진짜 저러는 사람이 있구나…
인사를 하며 나타난 직원은 나와 헤르만을 눈으로 간단히 훑어보더니, 갑자기 식은 땀을 흘리며 적당한 팜플렛을 하나 들고 왔다.
"여기, 손님께 어울리는 저택들의 명단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관상만 보고도 찾는 집을 아는건가.
내가 찾는 주택의 조건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명단을 건네받았다.
음,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데.
"저기."
"왜 그러십니까?"
명단의 주택은 서너채 정도.
근데 다… 너무 컸다.
저택 관리인만 대략 20명 정도 필요한 프로네시스 공작저만큼 컸다. 층수 3층은 기본인데다, 방은 60개 정도가 우습다는 수준.
"저는 이정도 대저택은 필요없습니다."
"아니, 저명하신 폭발 공작님께서는 그 정도 저택에 사셔야죠."
…….
뭐라고요?
"형님, 왕도 신문에 그거 올라간 거 몰랐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결투 이후로 유명인사라구요."
"뭐?"
나와 헤르만의 대화를 듣던 직원은 자신의 근처에 신문을 뒤적거리더니, 한 부를 나에게 넘겨줬다.
[왕궁에서 울려퍼진 굉음의 정체 왕실 가정교사의 폭발 마법으로 밝혀져.]
본문에는 '왕실 폭발 가정교사'가 원수부 장군 발람이 마음에 안들어서 터트려버렸다는 식으로 기사가 적혀 있다.
왕실 폭발 가정교사가 뭐야, 나는 왕실을 폭파하기는 커녕 사이에 다리를 놔주었다고.이거 쓴 놈은 내 명예를 훼손했다. 진짜 터트려버리고 싶네.
"어이가 없어서…"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곳은 공공기관이오니 참아주십시오…."
직원은 내가 화가 나서 이곳을 터트텨 버릴거라 생각했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이세계에서 기자에게 당하다니… 내가 왜 분노조절장애를 앓는 환자 취급을 받아야 해…
"왕궁에서 근무하시는 자작부터 검소한 백작분들의 저택 수준으로 보여주세요. 마당이 꽤나 넓었으면 좋겠네요."
"정말… 그걸로 괜찮으십니까?"
"예, 두번 말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예이!"
직원은 쏜살같이 명단을 찾으러 달려갔다.
폭발 공작이라니. 너무 무례한 명칭이다.
멸칭은 잠시 접어두고, 집에 관해서는 내가 품위를 유지해야하는 공작이라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가족 한명 없는 독신에 불과하다.
혼자 사는 주제에 집이 커져봐야, 관리하는 데 필요한 돈만 늘어난다. 인력은 물론이요, 저택에 마법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것도 다 돈이다.
내가 풍족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부터 내가 준비할 싸움에는 돈이 많이 들 것이다. 아낄 수 있는 부분에서는 아끼는 게 무조건 옳다.
"그냥 편하게 왕궁에서 사시죠."
"…헤르만, 이제 그만."
"예."
그 후로 직원이 새로이 가져온 명단을 확인하고, 조건이 맞는 집들을 오전과 오후 내내 돌아다녀 보았다.
하지만 죄다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집의 요건.
첫번째.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최소한의 대접은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왕국의 높으신 분들인데다, 이후에도 높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늘어날 수 있다. 그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너무 작거나 허름한 집은 안 된다.
두번째. 내가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당이 넓어야 한다.
앞으로 내가 쳐내야할 인물도 많고, 이 세계는 어디까지나 미쳐버린 몬스터와 재앙도 존재하는 곳이기에 무력은 필수다. 마법을 갈고닦을 수 있을 정도의 부지는 확보해야 한다.
마지막은 정말이지 소박한 이유로, 왕궁에서 멀면 안된다. 왕도에서 왕궁은 북쪽, 아카데미는 동쪽, 성문은 서쪽과 남쪽에 있다. 적어도 나는 북쪽 구획에서 집을 구해야 출퇴근이 용이할 것이다.
오늘 돌아본 집들은 대체로 2번에서 탈락이었다. 아무래도 왕도이다 보니, 주택이 빼곡히 들어서있다는 시점에서 마당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본 명단에 있는 집들에 사는 것은 내 예산만 꾸준히 깎아먹을 게 뻔했다. 애초에 직원 말을 들어보니 그런 곳들은 아카데미에 유학을 오는 타국의 왕족들이나 빌리는 곳이라고 한다.
집을 구하는 건 이세계에서도 힘들구나…
.
.
그렇게 허탕을 친 우리는 그대로 프로네시스 공작저로 왔다.
요즘은 건국제 데뷔를 위해 사교 댄스를 배우고 있다. 내가 있던 곳의 왈츠와 비슷한, 천천히 움직이는 종류의 댄스다.
게임에서의 상식을 조금 떠올려 보자면, 이 세계는 나라마다 다른 춤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에우데미아의 경우, 중세 말에서 근대 유럽의 태동기 시절의 문화가 주류이다.
"힘들어…"
"그냥 왕궁에서 사시죠…"
"어허…"
왜 헤르만 이 녀석은 계속 왕궁에서 살라고 하는거야.
방범 마법 살펴주는게 그렇게 어렵나…
"선생님, 헤르만 오라버니. 뭐하다 와서 그렇게 힘들어 해요?"
내 예법 담당, 한나가 물어왔다.
"이렇게 지쳐 있으면 댄스 수업을 못한다구요. 이제 건국제가 다다음주 금요일이라구요?"
"알고는 있어… 그런데 나 그렇게 중요한 위치야? 그냥 댄스 홀에 안나가면 안되려나…"
"안. 돼. 요."
오늘따라 깐깐하신 선생님이다.
아마 요즘 들어 결투를 준비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예법 수업은 뒷전으로 밀렸으니 이러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둘 다 왜 이렇게 지친 거예요?"
"조만간 왕궁에서 독립하려고 집을 찾는데, 조건에 맞는 집이 없어."
"집이요?"
내 말에 한나가 의문을 표했다.
"어떤 집을 원하시는데요?"
"왕궁에 출퇴근이 용이하면 좋겠어. 집의 구조는 손님맞이할 거실에… 방은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어차피 나 혼자 살거니까."
"음."
"그리고 마법을 수련할 공간이 좀 넓었으면 하는데, 왕도에는 대부분 집이 붙어 있으니까 말이야. 조건에 맞는 곳이 없어."
골똘히 고민하는 한나.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좀 오래되었어도 괜찮아요?"
"오래된거야 상관없지… 튼튼하기만 하면 돼."
"있어요, 그런 집."
"당연히 없겠지… 는 뭐?"
"있다니까요."
그런 집이 있다고?
"샤크티님이 정의선님에게 선물하신 저택이 있어요."
정의선?
샤크티?
"그게 누군데."
"해방자 정의선님과 분노를 간직한 마녀, 샤크티 프로네시스님이요."
"아…"
해방자의 이름이 정의선이라고?
어떻게 사람이름이 정의 + 선.
다른 사람을 엄청 귀찮게 할 것 같다.
"근원에 함께 가셨다는 두 분 맞아?"
"네."
"둘이 무슨 관계였길래 집을 선물했대."
내가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만난 빨간 여자가 분노를 간직한 마녀라면… 그 살풍경한 집의 벽에 걸려있던 그림 속 금발 남자가 정의선이라는 사람일 수 있겠다.
연인이라던가 그런 관계가 아닌가?
한 집에서 같이 살면되는데, 왜 저택을 선물한거지?
"해방자님이 표류하시게 된 날 큰 병에 걸리셨었나 봐요. 샤크티님은 당시에 의술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셨는데, 우연히 지나가다 치료해주셨다고 해요. 그 때가 아마 두분이 모두 9살 무렵이였다고 해요,"
아홉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꿈도 희망도 없는 에코니아에 끌려온 것인가.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
"그 후로는 해방자님이 프로네시스 전속 집사 가문의 양자로 들어오셨어요. 하필 후계자 없이 근원으로 승천해버리셔서 집사 가문의 대는 끊겼지만요. 승천하시기 전에는 큰 공적을 세우셨기에 작위를 받고 독립하신 거에요."
연인관계라던가 그런건 아니었구나…
"그런 유서 깊은 분의 생가를 소개해줘도 되는거야?"
"그게… 저희 집안에서도 좀 애물단지에요."
"왜?"
"그 집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뭐라고?
중대장은 한나에게 매우 실망했다.
그런 집을 나한테 소개해주려는거야?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에서도 유령 나오는 집은 있었다. 검은 마력에 잠식된 지방 영지의 대저택이었는데, 이방인이 신성으로 분류된 마법을 익히지 않으면 공략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설마 그런 곳은 아니겠지.
"아하하… 사실 농담이에요, 선생님. 해방자님이 만든 마도구가 엄청 많은데… 저희들 상식으론 받아들이지를 못해서요. 선생님은 해방자님과 같은 세계에서 살다 오신 분 같으니 적응하기 편하실 것 같아서요."
내 표정에서 생각이 새어나왔는지, 한나가 곧바로 설명을 해주었다.
도대체 어떤 마도구가 있어서 그런 유서깊은 집을 묵혀만 두고 있던거야…
"거기다 그 집에는 해방자님이 모으신 여러 무구들도 많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조건에 완전히 부합해요. 어떠세요?"
"나랑 같은 세계 사람이 무구를 모았다고…?"
"지하실에 꽤나 쌓여 있긴 해요."
정의선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보면 한국 사람인 건 확실하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호전적으로 살았다고?
하긴 악인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정리하고 근원에 도달한 사람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 아닐까.
약간 희망을 보태서 나에게 맞는 무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다. 게임에서 아이템의 입수 방법 정도는 알고 있지만, 죄다 미래의 이벤트이기에 나는 써먹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잠자코 듣고만 있던 헤르만이 끼어들었다.
"형님."
"음?"
"뭐 하나 빼먹은것 같다는 생각안해요?"
"뭔데?"
집과 무기를 동시에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 절호의 순간이다.
내가 빼먹은 사실이 뭐가 있지?
"해방자님께서 이 세계에 떨어지신 게 약 200년 전이에요."
"……."
아.
그 말은 200년 전 사람.
그 집 참 어르신이시겠네.
춘추가 대단하시겠다, 이 말이야.
"헤르만 오라버니, 그 저택은 샤크티님이 건축하신 거거든?"
"샤크티님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되었잖아."
"그래도, 역대 최고의 자연 마법사 샤크티님이라고. 소재에도 전부 마법처리를 해서 앞으로도 몇백년은 끄떡 없을거야."
"우리 이해를 뛰어넘는 마도구라니, 그런게 무서워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면 너무 수상하잖아."
"지금 날 의심하는거야!"
"에베베베벱"
"헤르만 오라버니!"
…….
헤르만, 너 아버지를 닮았구나.
좀… 깬다.
"둘 다 그만."
그래도 양측의 주장 모두 타당하다.
마법적인 처리를 가했으면 아직까지 저택이 멀쩡할만도 하고, 무려 200년이 된 집이니 무너지기 직전일 수도 있다.
결국에 확인은 해봐야 한다는 거지.
"그럼 내일은 일요일이잖아. 둘 다 업무 쉬는 날이지?"
헤르만이야 당연히 쉬는 날일거고, 한나 역시 재상부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쉬는 날일 것이다.
"그냥 다같이 가서 그 저택 확인하자."
"그러죠, 뭐."
"형님, 나 귀찮아…"
역시 헤르만 이 녀석, 귀찮아서 왕궁에 계속 살라는 거였어.
"그럼 내일 보자. 오늘은 헤르만도 나도 둘다 꽤 지쳐서 빨리 쉬러 가자고."
나는 인사를 하고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정말 몸이 천근만근이야, 쉬고 싶어.
자연스레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한나가 말했다.
"선생님, 잊어버리신 게 있으신데요?"
들킨건가.
"오늘은 리드하는 법을 연습하셔야죠? 저번에는 연습하면서 제가 리드했으니까, 오늘은 선생님께서 리드하셔야 한다고요?"
"아…"
이래서 눈치빠른 녀석들은 싫다니까.
예법수업.
싫다.
죽여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