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22. 해방자의 집, 그리고 엔크라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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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해방자의 집, 그리고 엔크라테아.
일요일.
나는 헤르만, 한나와 함께 해방자의 저택에 도착했다.
"이건 엄연히 추가근무야…"
헤르만은 입을 삐죽 내민채 말없이 불만을 표출하고 있으며, 한나는 그런 헤르만을 무시하고 저택의 특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아카데미와 왕도 거리의 사이에 있어서 선생님의 출퇴근에 편할거에요."
저택은 왕도 북동쪽의 언덕 위에 있었다.
인게임에서도 올 수 있었던 낮은 동산 언덕. 그곳에서 가끔 지나치기만 하던 저택이 해방자의 것이라니, 참 감회가 새롭다.
"이 근처는 저택에 딸린 사유지에요. 황룡의 산맥과 맞닿아 있더라도, 아카데미의 숲과는 다르게 외부인이 침입하기 힘든 구조고요. 저택 앞의 마당도 넓어서 수련하기 좋을 거에요."
확실히 아카데미의 숲과는 차별점이 있다.
아카데미의 숲은 산맥의 골짜기라 불러도 될 낮은 곳과 맞닿아 있다. 물론 보초병이 그곳을 항상 지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이 저택의 뒤편에는 깎아지른듯한 기암 절벽이 층층이 쌓아져있다. 거기다 높은 절벽의 끄트머리는 뾰족하게 솟아있다.
누가 감히 여길 넘을 수 있을까.
이래서 왕도 아레트가 천혜의 요새구나.
내가 절벽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사이, 입을 삐죽이던 헤르만이 왕도의 경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형님, 그래도 여기 경치는 좋네요."
"그러게."
"오길 잘했지?"
우리가 서있는 곳은 언덕이라 해봐야 10층 아파트의 높이조차 안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기에, 우리의 시야를 막는 존재는 전혀 없었다.
왕도의 중심에는 일전 공주와 함께 갔던 새하얀 박물관이 보였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왕궁의 정원이, 왼편 저 멀리에는 아카데미의 건물이 보인다.
루트 파훼에 지칠 때마다 이곳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축제 시즌의 밤에는 시시각각 떠오르는 마법들이 눈을 즐겁게 해줬지.
모두가 행복해지는 엔딩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내 마음에 들던 게임이었다.
"자, 그럼 들어가볼까요?"
"그래, 안쪽도 구경해봐야지."
저택의 주변을 허리높이의 울타리.
한나는 열쇠를 꺼내더니, 울타리 한쪽의 자물쇠를 풀고 들어오라 손짓했다.
"근데 여기, 200년 된 거 맞아?"
"제가 멀쩡하다고 했죠?"
이백년이 된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외관은 깔끔해 보인다. 흰색의 벽면과 붉은 지붕이 조화롭게 보인다.
관리는 뜸했었는지 벽면에는 약간의 이끼와 덩쿨이 붙어 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의 분위기를 더했다.
이 정도 되니까 내부가 기대되네.
"여기서부터가 약간 문제가 되는데요."
"문제라니?"
"해방자님이 만든 마도구가 엄청 많다고 했죠?"
"그렇지."
"대부분 생활 용품인데, 이곳의 상식으로는 필요가 없는 물건뿐이라서요."
도대체 뭘 만들어뒀길래…
"그럼 열게요."
한나는 저택 중앙의 출입문에 섰다.
그러고선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한 얼굴로 해방자 저택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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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나의 모습에 나마저 긴장한 채 들어간 저택의 모습은…
"와… 이런 건 처음 봅니다. 형님."
"나는 너무 익숙한데…"
"예?"
"저쪽에서 보던 가구들이랑 비슷해."
너무 현대적이었다.
해방자는 약간 맛이 간게 틀림없다.
왜 이세계에 와서까지 이런 삶을 사는건가.
저택의 조명, 벽지에 마룻바닥까지.
약간씩 모자란 부분은 있지만, 대부분이 저쪽 세상의 인테리어와 닮아 있었다.
취향이니까 존중해드려야 하나?
"그래도 저한텐 처음 보는 것들이 잔뜩 있어서 신기하네요."
"그러냐."
헤르만은 언제 자신이 오기 귀찮아 했었냐는 양, 저택을 이리저리 탐사하기 시작했다.
저택의 현관을 기준으로 왼편은 부엌, 식당, 탈의실이 붙은 욕실, 화장실 등이 모여있는데, 그곳에 있는 가구들은 겉보기엔 투박해도 현대의 그것들이었다.
싱크대, 냉장고, 가스레인지, 저건 오븐인가?
거기다 해방자 이 인간, 식기세척기에 김치냉장고까지 마도구로 구현해두었다.
"이 사람, 마도구로 유명했어?"
"네, 해방자님께서 마도구에 대한 기초 이론을 재정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어이가 없어서 한나에게 묻자, 역사적인 인물답게 이론을 재정립까지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정도로 가전기기가 훌륭하게 갖춰져 있으면 생활 공간으로서 괜찮은 거 아닌가?
왜 이 저택을 안 사는거지?
"한나, 이런 저택이 왜 안 팔린거야?"
"에우데미아 귀족들의 시종들은 대부분 전부 초급 마법 정도는 사용할 줄 아니까요. 집안일에는 마법을 사용하면 되는 일이고…."
"거기다 어떻게 보면 수상한 마도구들이 잔뜩 있는거니까… 이 저택이 안 팔린 이유도 이해가 가네. 너희 가문 입장에서는 치우기도 뭣하고 말이야."
"그렇죠… 헤르만 오라버니가 별종이죠."
헤르만은 겁도 없이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다. 새로운 마도구에 관심이 많나 보다.
"거기다 해방자님께서 만든 마도구라 하면, 대부분이 감히 손을 못대겠다면서 도망쳤어요."
"……."
대단하다, 해방자!
그러고보니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엄연히 집을 구하러 온 것이니, 집 구석구석을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 이제 응접실이랑 2층 구경도 해봐야겠다."
"아, 선생님. 일반적인 가구들은 새로 채워넣어야 할 거에요. 마도구에는 품질이 유지되는 식이 기술되어 있는데, 가구들은 아니니까요."
"그래, 고맙다."
그렇게 나는 전체적인 방 점검에 나섰다.
프로네시스의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청소를 했는지, 집 자체는 깨끗했다. 한나의 말대로 가구만 다시 채워넣으면 될 것 같다.
저택의 한켠에 있는 2층 계단. 그곳을 오르니 목재 바닥의 2층 마루가 나왔고, 마루에서는 1층의 거실이 훤히 보인다.
침실은 저택의 1,2층을 통털어서 작은 크기가 하나, 중간 크기가 넷. 서재가 딸린 큰 침실도 하나. 이러면 침실은 총 6개다.
작은 방은 사용인실로 두고, 큰 방은 내가 쓴다고 가정했을 때, 나머지는 손님방으로 쓰면 생각하면 적당한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지하실인데…
"한나, 지하실에는 어떤 물건이 있어?"
"그냥 창고로 쓰셨다고 들었어요. 그 이상으로는 저도 잘 몰라요."
"그럼 헤르만, 같이 내려가보자."
"네, 알겠습니다."
지하에도 뭐가 있을지 기대하는 눈치의 헤르만이었다.
"오기 싫다더니 제일 신났네."
"보다보니 신기해서요."
1층 탈의실의 문과 작은 침실 사이에 있는 원형 계단. 그곳으로 내려가니 지하실 문이 하나 있었고…
"정말이지, 해방자님은 이 저택에 진심이었구만."
옆에는 전등 전원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한나, 이 집은 마력석을 사용하는거야?"
"태양열 마력 충전이었나? 재현할 수 없는 마법진으로 자동충전되는 마력석이 있어요. 우기에만 갈아주면 되요."
"이젠 놀랍지도 않아…."
해방자는 전생에 공돌이가 틀림없다.
파멸 직전의 세계를 구한 공돌이라… 빠루 한자루로 지구를 구한 자유남이 떠오른다.
전원을 올리고 지하실에 들어가자, 그곳에는 여러 물건들이 박물관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그 물건들 하나하나마다 태그처럼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 띄는 선반 위의 책 한권.
이 저택을 지으면서 있었던 일을 적어뒀나 보다. 책을 펴보니 첫장에는…
[…… 샤크티님과 에버마리님은 언제나 내가 살던 세계를 보고 싶다고 말해왔었다. 그렇기에 나는 샤크티님께 이 저택의 건축을 부탁했고, 이 저택의 내부를 꾸미기 시작했다. …… ]
…….
해방자는 로맨티스트였다.
가전제품을 본따 마도구를 만드신 위업을 쓸데없는 일로 취급해서 죄송합니다…
건축일지의 첫장 이후로는 자신의 마법진에 대한 철학, 가전 마도구 제작에 써온 마법진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나중에 훑어보면 마법진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형님, 이것보세요. 전설 속의 성검!"
"헤르만 오라버니, 어차피 저거 아무도 못 뽑아…"
헤르만이 들뜬 채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자극에 약한가?
생각해보면 게임에서도 소소한 즐길 거리를 좋아하던 녀석이다. 이 저택이 놀이터라도 된 느낌이겠지.
나는 지하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물품들을 훑어보며 헤르만과 한나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
너클, 검, 방패, 단도, 단검, 활, 심지어 머스킷 총까지. 전쟁 박물관에라도 온 느낌이다. 이 모든 것에 해방자가 달아둔 설명문은 전부 꽤나 길었다.
그리고 헤르만과 한나의 곁에 도착하자…
"어떻게 땅에 박힌 검을 땅 채로 뽑아왔다냐…"
"해방자님과 맞붙었던 당대 최강의 악인이 사용하던 검이에요. 그 악인이 최후를 맞이하는 그 순간, 검집째로 땅에 박아버렸다고 해요."
"악인이 쓰던 검이라고?"
"네, 해방자님의 동료 중 그 누구도 이 검을 뽑지 못했어요. 그래서 해방자님은 이 검을 지반째로 들고와서 이곳에 보관하신 거고요."
해방자님. 당신은 미친 게 맞아.
아무리 악인이 쓰던 검이라도, 땅에 박힌 검은 누군가 뽑을 때까지 그곳에 고고히 박혀있는 게 정석아닌가.
검집째로 박힌 검에도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이성과 절제의 검 엔크라테아.]
엔크라테아? 게임에서도 나왔던 검인데 왜 여기 있는걸까. 거기다 생긴 모습도 내 기억과는 약간 다르다.
게임에서는 새하얗고 곧게 뻗은 검이었다면, 지금 이 검은 적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용도의 중검(??)처럼 느껴졌다.
외형은 둘째치고, 내 기억속 엔크라테아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이성 수치를 제공하는 검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전혀 장점이 없었다.
이성.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에서 마법과 연관된 수치 중 하나.
게임에서 이성 수치가 떨어지면 디버프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이성 수치는 게임에서 그리 선호되는 스탯이 아니었다.
여기 와서 보아온 마법들을 생각하며 설명하자면, 이성의 소모값은 마법의 구현 난이도에 비례해 증가한다.
예를 들어, 파이어볼에 엄청난 마력을 주입해 키워 발사하면 그 위력은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파이어볼은 어디까지나 파이어볼. 위력이 아무리 올라가도 이성 수치의 소모는 변함이 없다.
이런 이성은 게임에서 하루하루 잘 쉬는 것으로 회복할 수 있었기에, 이방인의 능력치는 마력 자체를 올리는 방향으로 세팅하는 게 공략에 편했다. 위력 자체가 높은 마법은 마력이 높아야 사용이 가능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엔크라테아는 딱히 선호되는 검은 아니었고, 이성 관리를 못하는 뉴비들에게나 추천되는 검이었다.
"그럼 이 검은, 200년간 쭉 여기있었던 거지?"
"네, 여기에 있는 동안에도 여러 사람들이 도전해보았지만, 아무도 뽑지 못했어요."
"여러 사람들?"
"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기사들이나, 방범 마법을 깨고 들어온 악인들이죠."
원래는 이방인이 특정 던전을 공략해야 얻게 되어 있다. 그럼 누군가가 이걸 훔쳐서 던전에 설치라도 해둔 건가? 참 이상하네.
검의 근처에는 해방자가 쓴 것으로 보이는 설명도 있었다.
[ ……. 그 녀석은 이 검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올바른 이상을 품은 이를 돕는다 했다. 생각해보면 그 녀석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이유도 나름 그럴싸했었다.]
[ ……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이상은 이상일 뿐,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누군가를 해치는 이상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 나 역시 그 녀석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마음을 고쳐먹었기에 막을 수 있었다. 타인에게 상냥한 이상을 품은 자가 이를 뽑길 바란다.]
인간의 욕망 역시 하나의 가치.
해방자님, 저는 동의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안 입히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물론, 남에게 자신의 욕구를 강요하며 피해를 입히는 쓰레기들은 치워야 하는 것도 옳다.
지금부터 내가 가야할 길도 그런 길이겠지.
그나저나 이 검이 그렇게나 대단한 검이였구나. 그저 게임 내에서 보았을 때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검에 붙어있는 설명문은, 다른 설명문들에 비해 해방자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거기다 그 해방자가 막지 못할 뻔한 악인이라니, 그가 품었던 이상은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나 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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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크라테아의 설명문을 보며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이제 가야할 때다.
저택은 내가 생각한 조건에 안성맞춤이었다. 침대나 소파같은 가구들만 전부 갈아치우면, 바로 입주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본심을 살짝 말하자면, 뜬금없긴 했어도 김치냉장고에 식기세척기까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며 가사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꿈의 아이템이다.
있으면 정말 편한데, 없어도 별 문제없이 살 수 있으니 급하지 않았던 가전 제품. 그런 느낌이지.
"다 보았으니까, 올라갈까?"
"형님, 저 뽑아봐도 되요?"
"한나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헤르만 오라버니는 어차피 못 뽑을 걸요…"
"그럼 도전!"
헤르만이 낑낑거리며 검을 뽑으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거봐, 헤르만 오라버니는 턱도 없지."
"너 은근히 나 무시한다…."
"어제의 복수야."
"허…."
구경을 마친 우리는 1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향했다.
"어?"
그리고 첫 계단을 밟은 순간, 나에게 맑고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한나?"
"네?"
"방금 바람 뭐야?"
"바람이요? 바람분 적 없는데, 여긴 지하잖아요."
이 감각은… 느껴본 적 있다.
타라스 마을에서 재앙을 죽일 때 느낀 그 감각.
맑고, 시원하다.
나는 올라가려다 말고 등을 돌렸다.
"선생님?"
당연하게도 지하실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저 마법진으로 습도와 온도가 유지되는, 어떤 환기구조차 없는 지하실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에게는 그 청아함이 느껴졌다.
나는 홀린듯이 엔크라테아 앞에 섰다.
"형님, 갑자기 뭐 하는거야?"
여기가 맞다.
시원한 감각이 계속 흘러들어온다.
나는 그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이 검을 뽑을 수 있을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쓰던 검이다.
지금 느끼는 이 감각이 허무일 수도 있다.
그저 나는 꿈속의 나비일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그 순간.
검신을 속박하고 있던 바위가 깨졌다.
"어?"
엔크라테아는 어느새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내게 익숙한 모습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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