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23. 오랫동안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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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오랫동안 함께.
검집째로 지반에 박혀있던 엔크라테아의 모습은 검이라 부르기에 너무나 투박한 형태였었다.
적의 저항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공격을 관철하기 위해, 무게를 가진 참격을 가능케 하는, 대검에 가까운 중검. 그것이 엔크라테아의 모습이었다.
"어?"
하지만 어느새 이시하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처음과는 다른 형상을 하고 있었다.
검은 배경위에 붉은 선이 그려진 검집.
시하가 그 검집에서 자연스레 검을 뽑자, 올곧게 뻗은 새하얀 검신이 드러났다.
"형님, 방금 뭐야."
"뭔가 생김새가 바뀐 거 같지 않아요?"
헤르만 티오리아와 한나 프로네시스는 눈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벙찐 상황.
"선택받은 용사 그런거야!?"
"저거 악인의 검인데…?"
시하 역시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그는 일전에 느꼈던 시원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냥 얘가 왔는데…?"
그저 이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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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가 해방자 저택에서 얼이 빠져 있는 그 때.
한때 별빛이 내린 왕궁 중앙 정원의 티테이블.
그곳에 왕녀, 아셰리아 에우데미아가 앉아있다.
곁에는 언제나처럼 아샤가 함께하고 있다.
"하아…."
아셰리아는 마시던 차에 티스푼을 넣고 이리저리 휘적거리는 중이다.
"공주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가요?"
"별 건 아니에요."
아샤의 물음에 공주는 별 게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근심은 있었다.
'나는 왜 선생님의 앞에서 울어버린걸까.'
왕궁부와 재상부의 각종 정책에 논리적이고 합당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아셰리아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시하가 독립하려는 이유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 국왕 부부와 티타임을 마친 그녀는 마음 속에 초조함만이 가득했다.
그저 한가지 두려움.
'선생님께서 나와 거리를 두시려는 건 아닐까.'
공주의 생각을 제삼자가 보았다면,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 평할 것이다.
애당초 이시하가 그녀와 거리를 둘 생각이라면, 독립을 허가받을 필요도 없이 가정교사 직을 반환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거기다 한 명의 공작이 왕궁의 한켠에서 지내는 것 역시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이시하의 독립은 늦었다면 늦었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와서 아셰리아가 이런 사실들을 모를 수는 없다.
왜 하필 그 날, 그 시간에 이런 당연한 이유들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평소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셰리아 에우데미아의 짧은 삶.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수많은 고민을 거듭하고, 타인의 감정 변화에 조심스러워하며 살아왔다.
한가지 판단을 하기 위해 수많은 환경과 조건을 고려하고, 그 선택으로 인한 리스크마저 염두에 두던 그녀였다.
아셰리아는 그런 자신이 처음으로 '틀린 선택지'를 골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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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이것 이외에도 수없이 많았다.
「왕궁 밖은 위험합니다」
「그래도 위험해요」
그의 무력은 이미 결투를 통해 확인했었다.
그는 왕도 안에서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시진 않을까요?」
왕실 가정교사, 공작위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그런 그가 금전적으로 부담이 있을 리 없다.
「선생님은 거짓말쟁이십니다…」
딱히 거짓도 없었고, 당사자 앞에서…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논리와 근거가 없는 말들의 향연.
이시하의 방에서 했던 모든 말을 스스로 곱씹을 때마다 가슴 속이 답답해져갔다.
자신은 도대체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그런 기억의 되새김 끝에 도달한 말.
「곁에 계셔주신다 하셨잖아요….」
타인에 의지하며 기대는 말.
평소의 다른 이를 대하는 자신이라면, 절대로 입에 담지 않을 말이다.
사고는 자연스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선생님을 의지하고 있는 걸까.'
'만약 내가 선생님께 의지하는 것이라면, 그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겉보기엔 귀여운 10세 근처 소녀이신데… 이제는 좀 나이다우시네요.」
그저 표류자임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나와는 살던 문화가 다르기에 저런 말을 한 것이리라, 라는 생각이 컸었다.
「적어도 들어 드릴 수는 있어요.」
근원으로 함께 가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한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표류자이기에 기대했었다.
「저와 세 가지, 내기를 하실래요?」
만약 내기에서 지더라도, 근원에 가는 걸 돕겠다고 약조했으니까.
내기를 결심한 순간까지도, 그녀의 마음 속에는 이시하가 표류자라는 계산이 섞여 있었다.
내기를 시작한 그 순간까지, 표류자라는 특징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었다.
'아마 그 순간부터겠지.'
모든 내기에서 진 순간, 근원에 도달하는 것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을 처음으로 아이로서 대해준 사람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마음 속에 항상 품고만 있었던 것을 처음으로 들어준 사람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하나하나 고쳐준 사람이다.
근원에 도달하는 것에 아무런 미련을 느끼지 못하게 된 순간부터,
아셰리아에게 이시하가 해주었던 말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지금와서는 약간의 죄책감도 드는 그녀다.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왔다고는 해도, 근원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했으니까.
소녀는 그런 사람에게 구원받아 버렸다.
가슴이 벅찬 동시에 쓰리고,
행복한 동시에 내심 답답하며,
적지만 많았던 대화가 떠오르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며,
그와 함께할 미래를 그리게 된다.
아셰리아는 자신의 감정만큼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감정을 정의내린다면 무엇일까.
'나는 정말… 선생님을 필요로 하는구나.'
수많은 고민 끝에, 아셰리아는 자신의 마음 속 감정을 두루뭉술하게 정의했다.
"시하 선생님…"
어느새 찻잔을 휘적거리던 티스푼은 멈춘 채로, 곁에 없는 스승의 이름을 작게 불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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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녀의 앞에 왕궁의 두 시녀가 지나간다.
그들의 나이는 1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인다.
"이번 건국제 때는, 그 녀석에게 은방울꽃 장식을 주려고."
"평생 함께 있는다거나 하는 그거? 잘도 그런 걸 믿는구나."
"너도 나중가면 이해할 걸?"
"정말이지, 소녀 납셨네."
무언가를 주면, 평생 함께 있을 수 있다.
분명 미신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신에는 적당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아셰리아 공주였다.
"아샤, 저 분들을 불러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샤는 본인이 직접 설명을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녀들이 말하는 주제는 본인도 잘 모르는 분야였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철저한 암행교육을 받는 티오리아 가의 일원. 타국에 숨어들거나 특정 영지의 특별한 풍습만큼은 줄줄 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특별한 차이점'만을 배워왔기에, 정작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문화'는 모르는 부분이 꽤 많았다.
"알겠습니다."
아샤는 빠르고 조용하게 시녀들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잠시동안 시간을 내주었으면 한다는 짧은 말을 전한 뒤, 그들을 아셰리아 공주의 근처로 데려왔다.
"데려왔습니다, 아셰리아 공주님."
어린 시녀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지 불안해 하는 상황.
왕궁 내 잡역을 맡은 자들 사이에서 공주의 평판은 비슷하다.
냉철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추구하는, 언제나 무표정한 왕녀.
어린 시녀들은 그런 평판을 전해들었기에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의 화제는 무엇이었나요?"
그런 경직된 분위기에서 공주는 말을 꺼냈다.
"네?"
"지나가시면서, 건국제에 선물을 하신다고…"
"아."
아직 왕녀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녀들은 그 분위기를 살피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하기로 했다.
"그게… 건국제 당일 저녁의 축제 때마다 있는 소문인데요…."
"소중한 분에게 은방울 장식을 전하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다는, 그런 미신이 있어요."
공주는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었다.
"오랫동안… 함께."
약간이나마 풀어진 공주의 표정.
시녀들은 지금껏 들어온 공주의 소문은 과장이 아닐까, 라는 약간의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두 시녀의 앞에 있는 공주는 그저, 소중한 고민을 품고있는 작은 소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주제넘은 발언일수도 있습니다만…"
한 시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는 아직 17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않으셨으니, 축제 당일 파티에는 참여하지 않으시죠?"
"그렇습니다."
에우데미아의 건국제.
건국제는 전야제 무도회와 축제 당일의 파티로 나누어진다.
전야제는 귀족의 경우 12세 이상, 왕족은 전원 참여가 원칙이다. 이는 국가의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자리로, 사전에 합의된 약혼을 대중에 공표하고 인정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건국제 당일 파티는 17세 이상의 성인만이 참여한다. 이 자리에서는 여러 정치적인 성향을 띈 주제들로 토론을 진행하며, 이시하가 알고 있는 '전쟁과 연극' 역시 벌어진다.
아셰리아는 아직 11세이기에, 전야제에만 참여하게 된다.
"그렇다면… 축제의 당일에는 거리에 나오셔서, 소중한 분께 무언가를 선물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저 '쓸데 없는 오지랖'일 수 있었다.
일개 시녀가 왕족에게 부리는 만용일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말'이었다.
"그럼…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 아셰리아는 이시하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수줍은듯 말하는 왕녀의 모습은 시녀들에게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느껴졌다.
두 시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조이신 아레트님께서 프로포즈에 은방울꽃을 선물하셨다는 소문에서 출발한 건데요!"
"두 분은 근원까지 가셨으니, 영원히 함께했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장식을 만들었어요. 그게 유행이 된 거에요."
"지금 그런 로맨틱하지 않은 이야기 하지마!"
시녀는 왕녀의 앞임을 망각한 채 동료 시녀에게 소리쳤다.
지금은 그런 말 한마디가 정말 중요한 순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인걸…"
사실, 아레트가 헬레니아의 초대성녀에게 정말 은방울 꽃을 전했는지는 모른다.
충분히 상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소문이 퍼져서… 저희같은 평민 사이에서는, 가족간에도 선물하는 경우도 잦아요."
"결국에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흠, 그렇군요."
공주에게는 선물이 가지는 의미 자체가 너무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렇게 비슷한 또래의 여성과 그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경험은, 아셰리아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껏 아셰리아는 정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면, 언제나 침묵한 채로 지내왔으니까.
아샤도 좋게 말해서 과묵한 타입이고, 나쁘게 말하면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 이유도 컸다.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본래 아셰리아의 역사대로라면 없었을 일이었다.
"공주님께서는 축제 당일에 거리에 나와보신 적 없으시죠?"
"네."
"아샤님이 계셔도 위험하실 수 있잖아."
"아, 그런가?"
시녀들은 은방울꽃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평민들이 거리에서 어떻게 축제를 즐기는지 왕녀에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는 아샤는,
귀찮은 일을 예감하는 동시에.
'그래도 표정은 좋아지셨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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