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24. 축제를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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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축제를 보고 싶습니다.
건국제를 나흘 앞둔 날.
후궁의 교실.
"그럼 오늘까지의 수업을 정리해봅시다. 저번 수업에서는 혜세국의 정책 결정 과정을 배웠었죠. 서로 다른 이익을 대표하는 당들이 모여 안건을 논의하고, 국가의 수장이 논의를 토대로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나는 왕실 가정교사가 된 뒤로 토론식 수업을 주로 하는데, 마지막 시간에는 이렇게 토론 내용을 정리해준다.
토론의 주제는 에코니아 각국의 역사, 사회, 문화를 다루는 도서들을 내가 직접 읽고 선정하는 중이다.
이런 수업을 진행한지 벌써 한달이 넘었다 보니, 이제는 학생들도 꽤나 적응을 한 편이다.
"기디언, 이런 정책 결정 과정의 전제 조건은 무엇이었죠?"
"먼저, 수장이 되는 자는 모든 안건에 밝아야 합니다. 여러 당은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기 때문에, 수장은 모든 주장을 중립적으로 판단하고 득실을 저울질해야 합니다."
기디언은 분수에서 겪었던 일 이후로 꾸준히 노력하는 중이다.
원래는 그저 자신의 주장에 소극적일 뿐이었다면, 이제는 신중하게 따져보고 생각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다음으로 각 당들은 서로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여러 이유로 각자 다른 당들이 규합하게 되면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이는 파벌로 이어지게 됩니다. 파벌이 형성되는 순간, 이 정책 결정 과정은 이점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배웠습니다."
배웠다고는 말하지만, 기디언이 직접 도출해낸 생각이다. 나는 그 생각을 좀 더 세련된 표현으로 바꾸어 줬을 뿐이다.
기디언은 가끔 학습 주제를 고민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경우가 잦아 졌고, 그렇게 생각해낸 것을 수업에서 가감없이 말해준다.
약간 문제가 있다면, 생각에 잠겼을 때는 주변에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실눈인 아이가 대답도 없으니 영락없이 자는 것처럼 보인다. 적응하는 데 나름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수업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기디언의 생각을 조금씩 기다려주는 편이다.
"이점을 잃어버린다. 저희는 이런 정책 결정 모형의 이점도 같이 고민해보았죠. 알렉산더, 혜세국의 이런 방식은 에우데미아에 비해 어떤 장점이 있을까요?"
우수에 젖은 금빛 왕자, 알렉산더는 내 질문에 지금껏 해온 수업을 떠올리는 듯 생각에 잠겼다.
게임에서 밀어주던 캐릭터답게, 이 녀석은 왕족으로서의 자긍심과 의무감이 큰 아이다.
하지만 자긍심은 넘치면 허영심이 되고, 의무감은 넘치면 조급함이 되는 법. 엄격하게 말해서, 주변 환경에 몰려있던 알렉산더는 유능한 왕족이라 불리기는 부족한 아이였다.
"에우데미아의 정책 부서들에 비해 각 당들이 자기 분야에서 더 나은 전문성을 보입니다. 이것 하나만으로 정책의 효율성과 부작용을 모두 판단할 수 있기에 정말이지 큰 장점입니다."
예전의 알렉산더였다면, 나는 수업에 이런 주제를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에우데미아와 다른 나라를 감히 비교하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알렉산더는 다르다.
판타스매터에게 당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타라스 마을에서 겪은 일이 저 아이에게는 양분이 되어준 것 같다.
알렉산더는 눈 앞의 일을 차분히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다. 교사로서는 내심 대견스럽다.
"좋습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이지요. 현재의 혜세국은 건국 당시의 이상적인 모습에서 멀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아셰리아,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나요?"
"간단하게는 기디언님께서 정리해주신 전제 조건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공주님.
나는 아셰리아 공주를 마냥 총명한 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생활이나 수업을 함께하며 느낀 것이 있다.
사람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이 위협에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 진화해온 것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셰리아 공주는 이런 부정성 편향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도 훨씬 심하다. 어릴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쌓아온 죄책감이나 외로움이 원인이었겠지.
"200년 전 악인기에 접어들면서 세상은 불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만큼 충분한 교육을 받은 후임 명월주(?月?)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는 첫번째 전제 조건이 깨진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꽤 밝아진 편이다.
공주와의 내기 이후, 국왕 내외는 건국제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틈틈히 자녀들을 신경쓰게 되었다. 매일 가족 모두가 모인 티타임을 가진다던가, 저녁 식사만큼은 같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건국제 이후로는 함께 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전제가 깨진 이유로는 악인기 이후 종적을 감춘 신수, 청룡의 영향이 큽니다. 본래 청룡의 감시 아래 각 당들은 파벌을 형성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청룡이 사라지자, 당들은 현재 두 파벌로 나뉘어 버렸습니다."
물론 나도 신경은 쓰겠지만, 꾸준히 다른 사람들과 원활하게 지내게 되면 지금보다 더 밝아지지 않을까.
좋은 의미에서, 내가 알던 여왕님의 차가운 표정은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내심 그런 미래를 바라고 있다.
"아샤, 혜세국의 최근 정세를 배운 것을 토대로 설명하자면 어떤가요?"
"두 파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장이 혈연 중심으로 등용. 하지만 외척이 득세하여 오히려 수장을 압박. 그 결과 4년 전, 명월주의 첫째 딸이 자객에게 사망."
"그 딸은 어머니가 외척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죠. 그것도 중요하니까 꼭 말해줘야 해요? 외척 세력의 소행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까지 덧붙여야 하고요."
아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샤는… 한결같다.
그래도 여기까지 말해주는 게 어딘가. 원래는 '혈연등용외척득세수장압박딸사망' 이라며 연대표를 외우듯 말했을 것이다.
공주님과의 내기 이후로 아샤는 나에게 약간은 살가워진 편이다. 과연 살갑다고 해야하나 의문은 들지만 말이다.
"건국제 축일을 준비해야하니 이번 주에 남은 수업은 없어요. 그리고 제 이사도 진행해야하다 보니, 다음 주까지 수업은 없어요."
"예~"
"아샤, 그렇게 기빠지는 좋은 티는 내지 마요…. 그럼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수업도 무사히 마무리구만.
정리하고 동관으로 돌아가야겠다.
내 이사일은 왕자와 공주가 거처를 옮기는 날로 정했다. 이사라고 해봐야 옮겨갈 것은 몸밖에 없지만 말이다.
이사.
해방자의 저택.
책을 정리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왼편 허리춤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엔크라테아를 슬쩍 보게 된다.
다행히 프로네시스 가는 내가 엔크라테아의 주인이 되버린 것에는 별 문제를 표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을 해주면서 부작용이 있다거나 하면 자신들에게 알려달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다른 걱정이 있다.
"후우…"
엔크라테아의 손잡이 끝에 팔을 걸치듯 올려두자, 맑고 시원한 느낌의 기운이 몸안에 퍼진다.
타라스 마을에서 경험한 그 기운. 이사문제나 예법수업으로 한참 바빴기에 아직 정확히 이 기운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림짐작으로 게임의 스탯을 생각해보면, 이게 이성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건 재앙을 잡도록 도와준 기운이기에, 최대한 좋게는 생각해보려 하지만…
쓰레기들이 가득하던 집무실이라던가, 타라스 마을이라던가, 슬럼가의 폭력배 소굴이라던가.
에코니아에 온 뒤로 매 순간순간, 내 가슴 속이 메스껍거나 답답해왔었다. 저쪽 세상에 있었을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요즘도 꾸준하게 답답한 느낌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는데… 엔크라테아에 닿았을 때는 그런 착잡한 느낌들이 모두 사라진다.
하필이면 최고 악인의 검을 뽑고나서 속이 후련해지다니, 이 검의 마력에 히든 스탯으로 건강 관련 보정이라도 붙어 있는건가?
… 그냥 단순히 우연이겠지?
우연이었으면 좋겠다.
엔크라테아 문제로 고민을 하며 책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시하 선생님."
"네?"
아셰리아 공주였다.
공주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건국제 당일에 선약이 있으십니까?"
"건국제 당일이요?"
"네."
건국제 당일이라…
어제 국왕내외에게 들은 것이 있었다.
'올해는 당일 연회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네. 이곳에 온 지 첫해이니, 축제 구ㄱ…'
'전야제인 무도회에는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선생님을 소개하는 자리니까요. 당일 연회는 내년부터 참가하시죠.'
왕비가 국왕을 슬쩍 찌르면서 말하는데, 도대체 국왕이 왜 찔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듣기로 당일 연회에는 정치적인 이야기들이 오간다고 했었나…
정치적인 일은 가끔 집무실에 들리는 일 이상으로는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국왕 내외의 제안에는 고맙게 따르기로 했다.
나중가서 정치적 명분이 필요할 일은 있겠지만, 그건 그때가서 허락을 구하면 될 일이다.
"당일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왜 그러시나요?"
"그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땅을 바라보는 공주.
선약이라니, 그 날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걸까.
"음, 무언가 부탁할 거라도 있으신가요?"
공주는 내 물음에 약간 고개를 들었다.
"거리의 축제를… 보고 싶습니다. 사고 싶은 것도 있구요."
"거리라…"
"그게… 같이 가주실래요?"
힘들게 꺼낸 말은 정말 작은 부탁이었다.
하긴, 아셰리아 공주는 일평생 남에게 부탁하거나 의지한 적 없는 아이다.
거기다 무언가를 즐길 생각도 못하고 자신을 다그치던 아이였지.
지금도 많이 고민하고 힘들게 말하고 있을거다.
축제 구경도 아샤와 다른 기사 몇 명을 대동해 나가면 될 일이지만… 그나마 부탁하기 쉬운 게 나 아닐까.
"저도 축제를 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네요. 같이 가죠."
"정말요?"
공주는 확인을 하고 싶다는듯이 되물었다.
"당연하죠. 그 날 같이 나가봅시다. 대신 옷차림은 저번 박물관에 갈 때처럼 평범하게 꾸미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부탁을 마친 공주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축제 구경이 그렇게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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