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25. 전야제 무도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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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전야제 무도회(1)
아레트 에우데미아는 모든 농작물의 수확과 함께 한 해의 큰 행사들을 마무리하며 나라의 건국을 선포했다. 그 날은 11월 넷째 주의 금요일.
하지만 건국제는 막상 그렇게까지 대단한 날은 아니다. 내가 게임에서 보고 여기와서 느낀 지금의 건국제는, 이전 살던 세계의 추석이나 추수감사절같은 느낌이다.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마법을 사용한 농사법이나 새로운 사업들이 등장했기에, 이 날이 한 해의 마무리라고 하기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국일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크기에 일정만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헤르만, 우리 언제쯤 들어가면 돼?"
"음, 입장이 시작된 지 한 시간은 되었으니까요. 곧 시종이 와서 알려주지 않을까요?"
왕궁에서 열리는 건국제의 전야제 무도회는 저녁 시간대에 입장을 시작한다.
먼저 입장을 한 귀족부터 왕가에 인사를 올리고, 그 해 가문의 소출이나 사업 현황을 보고하게 되어 있다.
이런 보고는 특히 자작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이런 실적과 대중에 쌓인 평판은 귀족들의 작위 등락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영주들은 건국제 인사에 별별 선물까지 지참해서 가져온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국왕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니까.
"마지막에 입장을 하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아무리 형님이 표류자, 프라시스의 가주를 꺾은 실력자, 왕실의 폭.발. 가정교사여도 의심하는 사람은 있다구요."
"폭발은 빼줘…"
"왕실 폭. 발. 가정교사… 무서워!"
제발 그만뒀으면 좋겠다.
이런 분노 조절 장애를 앓는 사람이 가질법한 이명은 반납하고 싶다.
요즘들어 헤르만은 폭발에 악센트를 붙이며 날 놀리고 있다. 하루 할당량을 채워서 딱 두어번 언급하고 관둬서 더 얄밉다.
"……."
"긴장 푸십쇼. 어차피 왕가와 사대가문의 대다수가 형님 편인데요, 뭘."
그래 발람 한 명 빼고는 전부라고 봐도 되니까.
걱정은 고맙다. 그런데…
"딱히 긴장한 건 아니야."
"그럼 다행이고요."
국왕 내외는 다른 귀족들 모두에게 나를 소개해야 하니, 나는 제일 마지막에 입장하라는 전언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입장하면서 모든 시선을 한몸에 받아낸다라…. 생각보다 일은 커졌어도 오히려 괜찮다.
각오는 되어 있다.
똑똑.
"지금부터 입장하시면 됩니다."
때가 왔다.
"알겠습니다. 전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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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알현의 홀 정문.
처음 탄원이라는 이유로 알현실에 왔을 때는, 사방이 벽인데다 창문따위 없는 답답한 구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벽들 너머에 창이 숨어있었나 보다. 저번에는 보지 못했던 여러 창들 너머로 테라스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테라스가 없는 벽에는 11월 늦가을의 추위를 녹일 수 있는 벽난로가 피워져 있다.
높으신 귀족들은 각자 테라스나 벽난로 근처에, 하급 귀족들은 그 외의 자리에서 우리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남성은 영국 신사를 떠올리게 하는 연미복과 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한 크라바트 타이 차림.
여성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형형색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중세 후기에서 근대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에우데미아답게, 파티의 복장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내 옷차림도 다른 귀족들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검은 바탕에 붉은 색으로 포인트를 준 얇은 넥타이라는 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저런 크라바트 타이만큼은 절대 하기 싫다고 했었다. 저건 길에서 보기만 해도 불편하다. 그래서 이번 건국제에는 내가 직접 주문을 넣어 만든 평범한 넥타이를 착용하게 되었다.
좌우를 가볍게 살핀 나는 알현의 홀 중앙을 걷기 시작했다. 헤르만은 그런 나를 수행하듯 내 발걸음에 맞춰 따라걷는다.
내가 귀족들을 한명한명 지나칠때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표류자
예법
출신
평민
무력
결투
운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하지만 굳이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부터 내 평판은 스스로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나는 건국제가 끝나고 나서 본격적으로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있는 데릴라 역시 찾아내야겠지.
전야제는 미래를 위한 첫번째 발판일 뿐.
해야할 일을 떠올리니… 마음 속은 고요해졌다.
엔크라테아는 지금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마치 타라스 마을에서 겪은 그 상태와 비슷하다.
마음속에 시원하고 청아한 기운이 돈다.
그렇게 나는 옥좌의 앞에 도착했다.
처음 알현의 홀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국왕 내외는 비교적 부드러운 눈빛이다.
그리고 다른 차이점이 하나 더.
앉아 있는 사람이 네 명이다.
국왕 필레몬 에우데미아.
왕비 루시아 에우데미아.
왕자 알렉산더 에우데미아.
왕녀 아셰리아 에우데미아.
알렉산더는 생기가 도는 눈빛으로, 아셰리아 공주는 처음보다는 약간 더 밝아진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낮은 단의 층계를 올라가 그들 앞에 선다.
그리고
한나에게 배운대로.
오른발을 약간 바깥으로.
왼발은 앞쪽 45도 대각선.
오른손은 가슴에 대, 왼손은 쭉 뻗는다.
그 상태를 유지한 채
최대한 몸을 천천히 숙인다.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 필레몬 에우데미아 국왕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가정교사직이 유지되는 동안에 한해서지만, 나도 일단은 공작이다.
다른 귀족들에게서는 인사를 받는 입장이라 내게 인사는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인사의 의미는 크다.
지금 이걸 보는 눈 중에는 쓰레기가 많다. 하지만 힘이 되어줄 가문 역시 많다. 그들 모두가 이 자세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나를 품평하겠지.
쓰레기들에게는 나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의미가 될 것이며, 힘이 되어줄 귀족들에게는 내 평판을 올릴 수단이다.
"자네 왔는가."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인사에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좀 의외인 일이다.
오늘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거니까.
전야제에 왕실 어른들의 역할은 그저 아래의 귀족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12살의 생일이 갓 지난 자제들이나 무도회에 참가한다.
그렇기에 원칙적으로는, 국왕과 왕비는 오늘 하루종일 앉아만 있어야 한다.
"모두에게 소개하지."
국왕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뒤돌아보라는 듯 손짓했다.
"나와 루시아를 비롯한 여럿은, 50년 전 혜세국에 표류한 장군께 가르침을 받았다. 너희가 알듯, 수많은 재앙을 물리치고 많은 이들을 구해낸 그 사람이 맞다. 항상 지켜야할 것을 떠올려라, 그것이 그의 가르침이었지."
내가 뒤로 돌자, 국왕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에우데미아가 세계의 기둥으로 존재할 수 있던 이유는, 선조를 시작으로 윗 세대들이 미래의 세대를 잘 키워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와 책임은 매우 무겁다."
이를 듣는 귀족들은 모두가 기립해 있다.
"여기 있는 이시하 역시, 우리 에우데미아 왕실에 어울리는 새로운 교사다.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이미 확실한 공을 여럿 세웠다. 거기에 분명 왕실의 가정교사에 어울리는 책임을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그를 에우데미아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이를 마지막으로, 경청하던 귀족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 앞으로는 자네가 잘 해야하네."
"감사합니다."
일전에 국왕에게 세 가지 소원을 모두 말했을때, 귀족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도록 도와준다고는 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해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말로는 에우데미아의 국민으로 받아들인 정도지만… 자신이 후견인임을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국왕은 다시 옥좌에 앉았고, 나는 약식으로 예를 표했다.
그리고 헤르만과 함께 가장 가까운 테라스로 가니, 한나와 요나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안녕 한나, 오랜만이네요 요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요나, 저번의 일 이후로는 잘 지내셨어요?"
"하하, 교사님 덕분에 많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불량배들 혐의를 하나하나 조사하기도 했고, 판결까지 제 영역이었으니까요."
평소 요나와 한나가 함께 있는 걸 못 봐서 잊고 있었지만, 게임의 본편 시점에서 이 둘은 약혼한 사이로 기억한다.
지금의 약혼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요나가 한나를 에스코트해 온 것은 확실해보인다. 어릴적부터 친했으니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다.
나를 많이 도와준 한나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요나의 처우에 대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조금 죄송스럽네요."
"저는 일을 즐기는 편이니까요, 그렇게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요나스트롱 미모스.
미모스다운 회색 머리칼, 반면 미모스의 울긋불긋한 근육은 없다. 겉으로 티나지 않는 잔근육의 소유자.
거기에 째려보는듯한 강한 안력과 날카로운 턱선, 거기에 잘 웃지 않는 표정은 깐깐한 남자를 연상시킨다.
미모스 가문의 차기 수장. 부모를 일찍이 여읜 그는 현재로서도 사법부의 법관이자 왕도 치안본부의 고문이다. 수완은 뛰어나지만 원칙에 얽매여 있다는 평을 듣는 인물.
이런 요나는 본편 루트의 시점에서는 상당히 음침한 인물로 등장한다. 요나가 증거 부족으로 형기를 낮게 줄 수 밖에 없었던 범죄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풀려나자마자 왕도에서 큰 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자기 비관이 심해진다.
게임에서 그 범죄가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하지만 몇몇 루트에서 요나는 그 범죄자에게 없는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지금 모습만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수완을 생각하면 요나는 아까운 사람이지만… 타락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방치한다면 미래에 해가 될 인물이라는 것이다.
"음…."
"교사님, 왜 그러십니까?"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하하, 저번 작전에서 뵈었을 때는 고민 하나 없으실 분 같았는데요."
너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단서를 찾지 못한 지금, 4년 뒤의 게임 본편시점을 고민해봐야 답도 안나오겠지.
당장에 중요한 일은 아니다. 지금 당장의 무도회에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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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무도회는 두 파트로 나뉘어있다.
첫번째 파트는 내가 요나와 대화를 나누며 고민하는 와중에도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홀의 중앙에는 한 쌍의 남녀가 곡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곡이 멈추자, 남성이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여성의 손을 잡는다.
"저, 제이콥 이오아니아는 에레트리아 영애를 사랑합니다. 저와 약혼해주시겠습니까?"
"그게…"
여성은 약간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좋습니다…."
이내 남성은 일어나고, 손을 마주잡은 한 쌍의 커플은 옥좌를 바라본다.
"국왕폐하의 앞에서, 에레트리아 영애와의 약혼을 신고합니다!"
"서로를 잘 아끼도록 하게나."
""감사합니다!""
이건 무슨 신종 괴롭힘인가 싶지만, 저게 전야제 무도회의 1부 메인이다.
당연하게도 저 둘은 여기서 눈이 맞은 건 아니다. 이미 양가의 사전 허락까지 모두 받은 상태로 퍼포먼스를 취할 뿐이다.
그저 국왕과 다른 귀족들의 앞에서 '이 사람들은 임자가 있다'는 사실을 공인하는 의식이라 여기면 된다.
솔직히… 머릿속으로 아무리 숙지하고 있어도 나는 저런 거 절대로 못할 것 같다.
저게 뭐야, 무서워.
음, 그나저나 약혼이라…
"헤르만, 너는 약혼 안하냐?"
나는 이 녀석의 답은 알고 있지만, 폭발인가 뭔가로 날 놀려댔으니까 나도 놀려야겠다.
"형님… 형님은 왠지 제 사정을 전부 다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하하, 잘 모릅니다. 티오리아는 약혼을 늦게 하나 보아요?"
"이 인간, 절대 알고 있어…"
어차피 이 녀석은 내가 에우데미아의 사정에 밝다는 걸 얼추 파악하고 있으니 이런 장난도 칠 수 있다.
헤르만은 흔히 말해서 여성에게 꽤나 먹힐 외형이다. 하지만 작중 티오리아 가문의 일원들은 사랑마저 제한된다. 다른 가문이나 나라에 미인계로 접근해야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혼인을 늦게 하는 것이다.
"예쁜 사랑 찾으세요."
"예에…"
게임 속에서 헤르만이 직접 말하길, 자신의 눈에 차는 여성은 없었다고 한다. 한나 역시 소꿉친구일 뿐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다행히 헤르만은 비극의 주인공은 아닌 셈이다. 그래도 자신의 자유를 제한당한다는 게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이 녀석은 나를 많이 돕고 있으니, 만약 사랑을 찾는다고 하면 내가 열심히 도와줄 생각이다.
헤르만의 기빠지는 대답과 함께, 다음 커플이 알현의 홀 중앙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기다려야 한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이 무도회의 2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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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부의 약혼 퍼레이드가 끝났다.
상대적으로 작위가 높은 귀족들은 한쌍씩, 작위가 낮은 귀족의 경우에는 여러 쌍이 한번에 약혼을 신고했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2부의 무도회는 본격적인 사교를 목적으로 한다. 나 역시 귀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여기 있는 모든 이에게 알려야만 한다.
"다들 눈치를 많이 보네요."
"당연하지, 기반따위 없는 사람인 걸."
"허허…."
국왕이 나를 마구 포장은 해주었어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아직 나에 대한 확신은 없을 것이다.
백작급 이상의 귀족들은 전부 멀찍이서 나를 흘깃흘깃 보며 눈치만 보는 중이다.
하지만 괜찮다.
"공작님, 함께 춤춰주실 수 있으신가요?"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 초면에 실례를 범했네요. 라리사 자작가의 차녀, 아네모네 라리사입니다."
결국 고위 귀족은 아니더라도, 낮은 작위의 사람들에게 나는 '오를만한 밧줄'이다.
비록 가정교사 직에서 물러나면 공작의 자리를 반환해야 한다는 점은 리스크지만, 당장에 왕실과 연을 맺을 수 있을테니까.
"반갑습니다. 그럼 중앙으로 가실까요?"
"감사합니다…."
나에게 같이 춤을 추자고 제안해 온 아네모네 라리사는 내가 적극적인 것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나는 내 앞으로 온 여인의 손을 잡고 알현의 홀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지금부터높으신 분들은 내가 낮은 귀족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지를 보고 나를 판단하겠지.
자신있게.
그래.
자신있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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